국악으로 정신장애인들과 교감을 가지려 노력 중이죠

▲ 옥천의 자원으로 자신을 써달라는 송경희씨

기러기 발 위에 놓여진 가얏고 12줄의 명주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다발적인 손놀림에 복합적이고 아름다운 음색이 공간을 메웠고, 그 소리의 잔향이 흐트러지기도 전에 기다란 오동나무통은 또 울기 시작했다. 연주가 정점에 다다르자, 그녀는 오히려 여유로워졌다.

정열적인 연주는 듣는 사람에게 긴장을 요구했지만, 여유로운 연주는 편안함을 안겨줬다.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녀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큰 영예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자리와 상들이 이젠 부질없어졌고, 낯설기만 했던 복지시설의 생활지도원 근무가 이젠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 가야금을 잡았지만, 이제는 풍경에 취해, 사람에 취해 다시 가야금을 잡는다. 옥천에 둥지를 튼 지 2년 가까이 되는 가야금 산조 명인 송경희(51)씨다. 부활원에서 만난 그녀는 가야금 연주자가 아니라 영락없는 부활원 생활지도원이었다.

◆옥천에 정착한 가야금 대통령상 수상자

한국국악협회 대전시지회장과 대통령상 가야금 수상자(2000년 김해전국가야금경연대회)라는 영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2006년 8월 아무 연고도 없는 옥천으로 왔다. 국악협회 지회장의 임기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고, 송경희 가야금 연구원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녀는 길을 떠났다.

남편과 함께 군북면 용목리에 허름한 집을 얻어 옥천에 정착했다. 그리고 새로운 직장도 얻었다. 부활원이다. 19년 전 작은 아이 5살 때부터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인연을 맺었던 부활원이 일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때 다섯 살배기 작은 아들은 24살의 키 187cm의 늠름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고, 국악기에 관심이 많아 연정국악원 앞 악기점에 들리면서 봉사의 인연을 맺은 부활원 김철수 원장은 어느새 흰머리가 많이 늘어 있었다.

▲ 옥천에서 다시 부활한 가야금 명인 송경희씨

그녀는 모두가 만류했다는, 그리고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는 지인들의 말에도 다부지게 옥천행을 결행했다. 왜 그랬을까? 그녀를 만나고서 드는 첫 번째 드는 생각이었다.

"제 인생의 정점에 있었어요. 제 이름을 가진 연구원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고, 국악협회 지회장이라는 명예도,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것도 제 이력에 상당한 플러스가 됐지요. 특별히 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무언가 비어있다는 마음이 항상 들었어요. 그게 무얼까 찾다가 이거다 싶어 결심을 한 거지요. 이제까지 삶이 순전히 저를 위한 삶이었다면, 이제는 주위를 돌아보고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퍼뜩 든 거에요."

마침 남편은 농촌과 자연에 대해 예찬 중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바쁘게 지내는 옥천 생활

참 좋다고 했다. 공기도 맑고, 사람도 좋고,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녹색풍경들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단다. 하지만, 바쁘다고도 했다. 정신장애인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내는 생활이 예전 잠깐 동안 했던 봉사활동과는 비교가 안 된단다.

월, 화, 목요일 저녁은 주성대 사회복지학과 야간학부를 다니고 있고, 금요일 하루는 온전히 대전에 있는 송경희 연구원에서 제자 가르치는데 몰두한다. 그녀는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더없이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하단다.

"좋아요. 이제 옥천읍 각신리에 새 집이 곧 완성되면 그리로 이사 가요. 이미 각신리 이장님한테도 인사도 드렸구요. 시골에 왔으니 마을 일도 열심히 도와야지요. 제가 이장님 비서한다고 했거든요.

◆'국악치료를 하고 싶어요'

그녀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국악예술고를 졸업하고, 추계예술대를 졸업하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가야금과 국악의 인연과 여전히 맥이 닿아 있었다. 정서적으로 기저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인 국악으로 정신장애인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비 300만 원가량을 털어 지난 1년 동안 음악치료 강사를 초빙해 정신장애인들 강습을 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음악치료에 대한 공부를 해보지 못해 강사들 하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고, 환자들의 정서적인 반응을 체크했다. 효과가 있었다. 즐거워했고, 심성도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부활원은 그녀의 적극적인 음악치료 활동을 보고, 올해부터 자체 예산에 음악치료를 포함시켰다.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는 것도 체계적으로 음악치료를 사회복지에 도입시키고 싶어서이다.

그녀는 부활원 생활지도원이 됐지만, 국악을 버리지는 않았다. 국악은 항상 그녀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화두였고, 그 화두를 들고 부활원이라는 생활 속 공간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 땅에서 태어난 음악이니까 서양음악보다 더 정서적인 안정을 줄 거라 생각해요. 국악기로 정신장애인들과 교감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어요. 직접 가야금도 가르치면서요."

◆대금 부는 남편, 우슈하는 아들

그녀의 남편은 대금 연주자는 아니지만, 대금을 곧잘 분다. 용목리에 들어와 농사를 짓겠다고 1만평을 빌렸지만, 녹록치가 않아 다른 사업을 고민하며 옥천에서 안 지인과 중국에 출장을 갔단다.

그녀의 작은 아들 진우(24)는 우슈를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운 태극권을 살려 중국 북경대 체육학과(1학년)에서 우슈를 전공한다. 지금은 군대를 다녀와 집에서 아버지 일을 돕고 있다.

큰 아들 진수(27)는 어머니의 가야금 피를 이어받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가야금을 전공했고, 지금은 조교로 있다.

아버지가 대금을 불고, 엄마와 큰 아들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작은 아들이 우슈를 하면 환상적인 공연이 되겠다.

"둘째 아들은 재능이 많아 뭘 하든 잘 할 거예요. 그래서 관심 있는 것도 많아요. 우슈 뿐만 아니라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중국에 있을 때 패션잡지에도 실리고, 요즘에는 그린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네요. 첫째 아들은 제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오직 가야금 한 길이구요. 남편은 신학대학을 나와서 상담일을 했는데, 여전히 다른 곳에 관심이 많아요."

가족들 자랑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의 엄마이자,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저를 옥천의 자원으로 써 주세요”

"남은 여생은 옥천에서 보내고 싶어요. 저의 재능을 옥천의 복지를 위해 쓰고 싶어요."

그녀는 옥천이라는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그동안 익혀 둔 재능을 쓰고 싶다 했다. 소외된 농촌 아이들을 위해 가야금 연주를 가르쳐 주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조그만 소망이었다.

"제가 연습용 가야금을 30대 정도 가지고 있어요. 10대는 송경희 가야금 연구원에, 10대는 부활원에, 나머지 10대는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이 가야금이라는 악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요. 소외된 농촌 아이들에게 가야금이라는 악기와 음악을 선물하고 싶어요. 올해는 여러 가지 하는 일이 많아서 힘들고, 내년부터 여유가 되면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서울이 고향인 그녀는 결혼 후 대전에서 19년 남짓 머물다가 50대에 진입할 무렵 옥천으로 내려왔다. 시골, 농촌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던 그녀가 이제 뒤늦게 농촌과 지역사회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고, 자신의 재능을 녹이고 싶어 한다. 그녀의 가야금이 옥천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변주될 지 문득 궁금해졌다.

* 황민호씨는 현재 옥천신문 제작실장을 맡고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황민호 옥천신문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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