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봉오동전투와 미디어컨텐츠

작성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 승인 2019.09.15  17:35:59

공유
default_news_ad1

그동안 한국의 미디어가 보여주는 만주의 무장투쟁은 대부분 신흥무관학교에 관한 이야기였다. 본격적인 독립전쟁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잘 모르는 사람들도 신흥무관학교와 이회영 형제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만주 무장독립운동을 다루는 컨텐츠가 오랜 세월 서간도와 신흥무관학교에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압록강 건너편이 서간도이고 북간도는 두만강 건너라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대부분 만주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를 바로 연결지어 설명하곤 했다. 

서간도와 북간도는 공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서간도는 조선인이 거의 없었고 북간도는 주민의 90%이상이 조선인이었다. 두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환경의 차이는 무장독립운동의 결과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 형제들과 이상룡 일가가 서간도 유하현에서 중국인들의 견제를 받으며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세우고 압록강을 건너온 동포들과 함께 새로운 터전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북간도 봉오동에는 이미 무장력을 갖춘 군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국내의 한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는 마을공동체 봉오동이 있었고, 그 신한촌을 지키기 위한 무장부대가 존재했다.

▲ 북간도의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실은 ‘헐벗고 굶주리는 만주 독립군’, ‘춥고 배고픈 황량한 만주벌판’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봉오동에는 마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사병부대에서 출발했지만 독립군으로 발전한 <도둑부>가 있었다. 무술실력과 사격술을 갖춘 독립군부대의 근거지, 풍요로운 논밭과 맑은 강이 흐르는 풍요로운 마을 봉오동은 독립군이 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애국청년들을 품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역사다큐는 연대장인 홍범도 장군을 사령관으로 묘사했다. 봉오동전투가 벌어지는 날 다급하게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장면을 재현하거나 봉오동댐 위에서 전투현장은 모두 물속에 잠겨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에서 활동을 하던 홍범도 장군은 국민회군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5월 말에야 봉오동으로 들어와 ‘대한북로독군부’에 합류했다. 당시 봉오동의 주민들을 이미 마을을 모두 비우고 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댐 아래 잠긴 것이 아니라 그 댐에서 산 길을 따라 10km 정도 더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오랜 세월 한국의 역사학계는 그 사실을 몰랐다. 만주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도 2016년에야 처음으로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와 함께 봉오동전투 현장을 답사했다. 그들은 봉오동의 자연과 독립군기지가 있었던 공간을 확인하고 놀라워하며 이러한 공간에 대한 오해가 오랫동안 만주의 무장투쟁사를 왜곡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 100년 전 봉오동전투를 준비하며 독립군이 팠던 실제 참호에서

최근에야 언론에서 봉오동전투 승리의 의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서 특집기사로 봉오동과 최운산 장군을 재조명했고 2018년에 ebs 광복절 특집 다큐 <어느 3형제의 선택>이 방송되었다. 지난 7월 kbs 다큐세상 <봉오동전투 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가 방송되었다. 또한 mbc '다큐 기억록'에서 가수 구카스텐이 최운산장군을 기억했다. '놀라운 tv서프라이즈'는 <난세의 영웅> 편에서 봉오동전투의 주역 최운산 장군을 놀라운 삶을 재구성했다. 하나둘 컨텐츠가 늘어나고 있다. 느리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이다.  

2020년은 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외면당했던 봉오동전투 승리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구체적 기획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개봉된 영화 '봉오동전투'도 여전히 홍범도장군이 봉오동전투 전체를 지휘한 총사령관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 영화 우리 독립군들이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해오는 실제 봉오동전투의 작전을 그렸다고 한다. 두만강변 삼둔자에서, 후안산에서, 그리고 봉오동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까지의 전투가 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그런데 아쉽게도 영화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실제 이 전투에서 승리한 주체 세력은 독립군 통합부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다. 북간도의 독립군은 봉오동전투가 시작되기 전 봉오동에서 대통합을 이뤘고 '大韓北路督軍府'로 거듭났다. 최운산 장군과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은 5월 중순부터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키고 산에 참호를 파고 매복전을 준비했다. 이 영화는 정규 군대의 모습과 실력을 갖춘 독립군 통합군단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를 마치 게릴라군처럼 묘사하고 있다. 공문서에, 통행증에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했던 그들은 정식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은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역사공부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다.

▲ 영화 봉오동전투의 주인공들

봉오동전투가 있었던 6월은 여름을 향해 가는 초여름 날씨였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은 두꺼운 코트를 입은 게릴라의 모습이었다. 더구나 전투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철에 봉오동을 떠나가는 장면에서 겨울코트를 입고 겨울모자를 쓴 홍범도 장군의 모습은 정말 현실성이 없다. 모두가 알고 있는 홍범도 장군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겠지만 그런 표현이 오히려 영화의 설득력을 떨어뜨렸다.

영화는 신출귀몰한 주인공과 몇 명의 독립군이 대규모 일본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고 동료의 목숨을 담보로 기적처럼 성공하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그런데 우리 독립군의 규모나 역량에 대한 이해가 없는 탓에 전투 상황 묘사가 대규모 군대의 작전이 아니라 아이들의 전쟁놀이처럼 가볍다. 무엇보다 영화 속 일본군은 너무 무모하게 독립군을 뒤쫓아 온다. 아무리 영화적 서사로 이해하려 해도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 중 하나로 평가받던 일본군을 잔인하고 어리석은 군대로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 영회에서 잔혹성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일본군 장교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 전투를 마지막 조선전쟁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 있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했는데 설명이 없다. ‘봉오동전투’를 치른 독립군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통합서약서과 공문에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했던 그들은 마지막 조선이 아니라 첫 대한민국의 군인이었다.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된 역사영화를 만들 수 없다. 봉오동전투는 완전무장한 정예 독립군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이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대에 맞섰던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사실적 묘사가 아쉬운 영화 봉오동전투의 한 장면으로 만든 영화 포스터

이 영화는 만주의 독립군들이 제대로 된 군대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작전에 투입된 독립군이 죽을 끓여 먹고 10 명이 넘는 장정이 구운 감자 한 알을 맛있게 나눠 먹는다. 영화 내내 말을 타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일본군대와 죽어라 뛰어다니는 독립군의 모습이 극적으로 비교된다. 봉오동의 독립군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이런 한장면 한장면이 영화가 주장하는 바를 드러낸다. 역사를 비틀어 극적 효과를 노리는 이 영화의 한계가 안타깝다.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는 독립군, 지나치게 허름한 복장의 주인공들은 그 자체로 역사왜곡이다. 

당시 봉오동에는 8대의 미싱이 독립군의 군복을 제작했다.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 산위에 세워두는 작전을 준비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사료에 의하면 “‘대한북로독군부’ 병사들의 복장은 상하가 황색이고 모자 또한 같은 황색으로 태극 견장을 달았으며 예복에는 매화형 금장이 박힌 견장을 달고 헌병대는 오른쪽에 검은색 흉장을 달았다. 그리고 장교들은 모자와 견장에다 금줄을 넣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 김성녀 여사도 어깨에 황금색 술이 달린 견장과 팔에 금줄 장식이 된 예복을 입은 최운산장군의 멋진 모습을 후손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실제 봉오동의 독립군기지는 두께가 1m가 넘는 토성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군단의 주둔지였다. 기지의 중심에 위치한 최운산 장군 일가의 대저택이 바로 본부였다. 당시 신문이나 일제 보고서는 봉오동을 '성채'나 '장원'으로 표현했다. 토성으로 둘러싸인 봉오동 독립군기지는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이름으로 발급한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마을을 지나 산 아래에 연병장이 있고 대형 막사 3개동과 훈련소 등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었다. 

▲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이 발급한 봉오동 독립군의 통행증(독립기념관)

그러나 영화가 보여준 봉오동의 독립군 본부는 허름한 시골농가 몇 채가 전부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 봉오동의 독립군 규모와 기지에 대한 상상력 부재가 이 영화의 한계다. 봉오동전투는 대한민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벌였던 본격적인 대규모 전쟁이었다. 주인공들의 열연만으로는 비어있는 역사를 메울 수 없다. 제작진이 당시 봉오동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 구체적 사료를 찾아보고 준비했어야 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민초들의 승리를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봉오동의 독립군들은 지휘관인 사령관부터 사병까지 모두 민초였다. 스스로 군대를 만들고 자비로 무기를 구입했던 민중, 곧 우리들이었다. 승리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다는 영화 ‘봉오동전투’는 어떻게 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