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노자, 데일카네기 등은 여고 재학 당시 닫혀있던 나의 내면세계를 풀어주었고, 넓은 세계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심어주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내 생활권을 이루고 있던 많은 지식과 권위에 대해 불신해야 할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1964년 브라질 이민 후, 상파울로에서 살면서 KOTIA 라고 부르는 일본인 농업협동조합에 사무직에 취직을 해서 다녔다. 그런데 눈에 이상이 생겨 머리가 아프고 글자가 흐리게 보였다. 추천하는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니 ‘난시’라며 이 병은 좋아질 수 없는 것이고 평생 난시 안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교정 렌즈를 끼고 보니까 전보다 잘 보이는 것 같아, 하라는 대로 안경을 맞췄다. 후에 컨택트 렌즈도 맞춰 끼었는데 그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내 눈의 문제는 안과 진단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해서 해결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십년 후 나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토론토로 재이민 한 후, Aldous Huxley 저서, The Art of Seeing를 보게 되면서 눈 운동과 눈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실천하여 나의 시력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6개월 집중적인 훈련을 한 후 안경 없이 살게 되었고 지금 72세에도 안경 없이 운전하고 책을 읽을 수 있다.

두 번째 닥친 상황은 평생 따라 다니던 어머니와의 애증 관계였다. 어머니는 정말로 헌신적인 분이셨는데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 방식이 괴로워서 대학 도중에 집에서 나가 버렸다. 이건 정말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나가버리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어머니에 대한 내 가슴은 평생 막혀 있을 것이고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각 끝에 나는 내 자신의 내면 치유에 2년을 투신한 후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우리 모녀 관계를 바꿉시다. 우리는 모두 우주적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우주적 정체성을 들어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 과업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알아내어 거두어 냅시다.”라고 말했다.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두 가지.

먼저. 서로 존댓말 쓰고, 다음으로, 어머니가 호를 만들어서 내가 엄마 (어머니) 라고 부르는 대신에 호를 부르도록 합시다.

윗사람 아래 사람으로 살아오던 것을 동격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하는 도반이 되었고 함께 통일 운동하는 동지가 되었다. 이것을 해내는데 자그마치 십년이 걸렸고 그 후 이십 년 간 우리는 동지로 남북을 다니면서 함께 중립화 통일운동을 했다.

 

▲ 권투하는 김반아

세 번째 내 인생에 닥친 큰 사건은 지난겨울에 미국에서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 진단을 받은 것이다. 딸이 중국에 살 때 북경을 여러 번 다니면서 폐에 문제가 생겨 기침이 심해지더니 폐렴을 앓게 되었고 뒤이어 기관지확장증이 생겼다. 만성 폐쇄성 폐질환은 나을 수 없는 병이고 점차적으로 악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즉시 딸과 의논 후, 딸이 다니는 Pharos Athletic Club 운동관에 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주 일회 한방병원에 다니면서 침을 맞기로 하고는 꼬박꼬박 실천했다. 권투가 폐 운동으로 최고 좋다고 하여 했고, 역기, 아령 등으로 근육운동을 하고 실내 자전거, 실내 스키운동으로 호흡기 운동을 꾸준히 4개월간 했다. 그리고 다시 테스트를 했더니 호흡기 작동이 정상이라고 나왔다.

다음 번은 무엇일까? 현재 도전 하고 있는 것이 여러 개 있다. 기대하시라!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시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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