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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⑥>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작성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 승인 2019.09.11  10:5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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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자서전 여섯 번째 주인공 최정술(86, 동이면 지양리)씨 이야기

▲ 최정술 할머니 댁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거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가족사진이다. 그 벽 아래 앉은 최정술 할머니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어린다.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고? 내가 밭에서 깨 떠는 모습이 옥천신문에 실린 적이 있는데, 읍내 약국 약사님이 "신문에서 할머니 사진 봤어요,"라고 말해줬을 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나는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식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욕심을 조금만 더 내본다면 자식들만이 아니라 손주들과 증손주들까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걸 다 말하려면 며칠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 후쿠오카를 거쳐 옥천으로

나는 1932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다. 옥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3세가 되던 1945년이었다.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가 있다는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한 탄광촌으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찾아간 것은 그보다 두 해 전인 1943년이었다. 그곳에서 일본 소학교를 다니다 해방을 맞았다.

"조센징은 모두 죽여 버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감격의 해방이었지만 일본인에게는 치욕의 패전이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악몽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살기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도망치듯 우리 식구는 귀국길을 서둘렀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고향인 무주에 기댈 언덕이 없었다. 이모네가 살고 있던 옥천읍 양수리에 들어와 새 둥지를 틀었다.

우리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나까지 모두 넷이었다. 나와 동생의 나이 차이는 열 살이나 되었다. 그 10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죽다 보니 그렇게 둘만 남았다. 당시는 의료시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생아 사망률이 높았다.

우리 식구는 옥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버지는 이모네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지었고, 나도 13세 어린 나이였지만 제사 공장에 다녔다. 공장은 현재의 옥천역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술이는 한 번만 가르치면 잘 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공장에 다녔다.

■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결혼

나는 17세가 되던 해인 1949년 안남면 오대리 노총각 조재한과 결혼했다(현재 오대리는 옥천읍에 속해 있다). 사주단자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던 날, 아버지처럼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 왔다는 예비 신랑을 처음 봤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

중매로 평생의 인연을 맺게 된 신랑은 나이가 나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았다. 더욱이 강 건너 오지 중의 오지에서 농사를 짓다가 배를 타고 왔으니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얼마나 시커멓고 볼품이 없었겠는가.

신랑이 돌아간 다음 어머니에게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 같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사주단자만 들여도 혼인한 것으로 간주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싫다고 혼인을 물릴 수는 없었다. '거기 강이 있다니 가서 정 살 수 없다면 빠져 죽자'고 독한 마음을 먹고 시집을 갔다.

오대리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금강 건너 깡촌이었다. 버들개, 오리티, 보내, 양로골, 터골 등 5개 마을에 주민들이 흩어져 산다고 해서 '오대리'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시댁은 5개 마을 중 버들개, 그 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높은 집'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신랑이 시아버지, 시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시집 생활은 낯설고도 힘겨웠다. 강변 마을이다 보니 논밭을 가려고 해도 배를 타야만 했다. 그나마 인적이 드물어 고사리 등 산나물은 지천이었다. 모든 일을 처음부터 배워서 시작해야만 했다. 목화도 기르고 누에도 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길쌈을 했다. 옷감 80자를 짜면 4~5벌 정도의 바지저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아이도 돌봐주고 베틀질도 도와주는 다른 집 시어머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 환갑 당시 남편과 함께 찍은 장수사진이 최씨 집 거실에 나란히 걸려있다.

■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처럼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힘들면 강물에 빠져죽자'고 생각했던 내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에 나오는 선녀처럼 아이를 하나둘 낳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장녀 현순, 장남 광현을 필두로 18년에 걸쳐 6남2녀의 자식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아이가 너무 많아 먹여 살리기 힘들 테니 한둘은 남에게 주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펄쩍 뛰며 거절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가족으로 어울려 살아가자고 생각할 수 있었던 데는 남편의 역할이 컸다. 결혼 초기 살림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은 1년 동안 집을 떠나 남의 집 머슴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징집영장을 받고 3년 넘게 공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제대한 후에도 내 권유를 받고 다시 집을 떠나 2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그렇게 부부가 고생한 덕에 어느 정도 살림 밑천을 장만할 수 있었다.

"광현 아범이 피투성이가 됐어요."

남편은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제대한 남편은 일할 때는 주로 튼튼한 군복을 입었는데, 어느 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토벌대로 오인을 받아서 빨치산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았다.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편을 그 다음에 노린 것은 불발탄이었다. 전쟁 후에는 곳곳에 불발탄이 널려 있었다. 남편이 공병대 출신이라 동네 아이들이 불발탄을 가져왔는데, 어느 날 뇌관을 제거하다 폭발하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었다.

남편은 성실하고 생활력이 강했지만 경제 개념은 조금 약한 편이었다. 그래서 집안 살림은 내가 도맡다시피 했다.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한참 나이 어린 아내의 요구를 잘 들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은 참으로 착하고 자상한 남자였다. 살다 보니 그런 남편에게 정(情)이 들었고,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게 됐다.

■ 그림으로 황혼을 수(繡)놓다

시집온 지 30년 만인 1979년 대청댐이 들어서면서 오대리 일대가 수몰됐다. 어쩔 수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는데, 우리 앞에는 선택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많은 동네 사람이 정부가 집단이주지로 제시한 경기도 평택 등 외지로 이사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고향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남편과 상의 끝에 지금 살고 있는 동이면 지양리 현동(玄洞)을 새로운 삶터로 선택했다.

내년이면 동이면 지양리로 이사온 지 꼭 40년이 된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시아버님이 93세로, 남편이 89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8남매 중 장녀와 장남은 어려운 가정 형편과 동생들 뒷바라지 문제가 겹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집안 대소사를 도우며 성장했다. 덕분에 아래 여섯 남매는 학업에 전념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고등교육을 마쳤다.

"잘 살고 못 살고는 팔자와 인연 사이에 달려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하지 말고 무애하고 무탈하게 살아라."

남편이 자식들에게 늘 해주던 말인데, 내 생각도 같다. 한때는 나도 자식들이 출세하고 치부하길 원했으나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지 않고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 점에서 지양리 이장으로 수십 마리 소를 키우며 부모를 모시는 장남 부부(조광현, 한봉선)가 특별히 고맙다."

어머니 이 시간에 뭐 하세요?"

광현이 어느 날 방문을 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3년 전부터 나는 장손녀 훈미가 가져다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주로 화단과 텃밭의 꽃 등을 그리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아마 그날도 새벽까지 그림에 몰두하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것 같다. 팔순 기념으로 예쁜 상보(床褓)를 만들어 동네 집집마다 선물하기도 했다.

오대리에서 남편과 함께 단둘이 출발한 우리 가족이 지금은 47명의 대가족으로 늘어났다. 6남2녀의 자녀가 결혼해 8남4녀의 손주를 낳았다. 그리고 다시 그들 중 결혼한 사람이 현재 9명의 증손주를 낳았다. 남편과 시아버님을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 최정술 할머니는 손재주가 타고난 듯하다. 언젠가 마을 주민이 가져다 준 색종이로 이렇게 많은 꽃을 접어두기도 했다. 최 할머니가 그동안 접었던 꽃을 꺼내 보이며 환히 웃고 있다.

▲ 두루미와 꽃.

최 할머니는 시집 때 가져온 이불에 이런 문양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할머니 화가' 최정술 지상 전시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최정술 할머니가 수줍은 표정으로 스케치북 두 권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할머니가 직접 그런 수십 점의 그림이 담겨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3년 전에 초등학교 교사인 손녀가 가져다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양옥집 앞의 화단과 텃밭에서 자라던 꽃과 채소, 손주들이 할머니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지면을 통해 전시회를 열어봅니다. 

 

▲ 최정술 할머니는 마당과 텃밭에서 자라는 꽃, 채소 등을 그림에 담았다. 사진은 화단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를 보고 그린 것
▲ 손자들의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
▲ 노란 꽃과 진분홍 꽃이 나란히 최 할머니 스케치북을 장식하고 있다.
▲ 마당에 있는 선인장에 꽃이 핀 모습을 그렸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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