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품 한양도성 요충 혜화문...조선 태조 5년 최초 건립 후 일제 강점기 철거 후 재건립

▲ 문화유산 '한양 도성'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惠化門)' 의 웅자. 성북동 쪽에서 본 정문과 동대문인 흥인지문쪽에서 본 성루 측면.

기해년(己亥年) 한가위를 맞아 문화유산 '한양 도성'을 순성(巡城)했다. 민속절인 추석 명절에는 뭐니뭐니 해도 '문화유산 답사가 제격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서울 시내  5대 고궁도 명절 관람 인파가 출렁인다고 한다.  이때는 무료 관람 할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다.

문(門).

문하면 우선 "문문 **문이 열렸다" 하며 뛰놀던 여자아이들의 노랫가락이 연상된다. 인간이 안전 생활을 위해 집을 짓게 됐고, 집엔 문이 필수다. 개인 집 문에서부터 적의 침입을 막는 거대 성문까지 여러 종류 문이 있고, 개선문이나 독립문처럼 상징성 의미가 깃든 문도 있다. 정문인 솟을대문도 있고 소문과 뒷문, 대피용 비밀문(암문)까지 있다. 동양 봉건 왕조 시절과 중세 유럽에선 성문 앞에다 국사범과 포로를 효수해서 목을 걸어놓거나 말뚝형을 집행한 끔찍한 역사도 있지만, 일반 백성은 '소문만복래'라 해서 복이 들어오고 화가 나가는 통로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수도 서울엔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한양 도성’이 있다. 아직 인류문화유산 등록은 안 됐지만, 이 성은 유럽의 그 흔한 중세 영주가 살던 그렇고그런 작은 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현재는 멸실 구간도 많지만 상당 구간을 복원했다. 우선 규모가 넓고 웅대하다. 둘레 전체 길이가 무려 18.6㎞다. 전시엔 백성이 성내로 이주해 보호받으면서 농성도 하도록 축조했다. 성곽도 아름답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히 가미돼 있을 뿐더러 600여 년 전에 이미 실명제가 도입돼 있다. 충북 영동 등 전국 지역에서 동원된 공역자의 출신 지역 명을 돌에다 새겨 넣었던 것이다. 구역별 책임 보수를 위한 행정관리 차원이다.

이런 한양 도성에도  웅대하고 아름다운 성문이 있으니 일명 ‘4대문 4소문’이다.  사통팔달을 상징하는 8문 체계다. <4대문>은 동대문(東大門=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西大門=돈의문(敦義門), 남대문(南大門=숭례문(崇禮門), 북대문(北大門=숙정문(肅靖門)/숙청문(肅淸門)이다.  <4소문>은 동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 북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소의문(昭義門),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인 광희문(光熙門), 북대문과 서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인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북문(北門)이다.

▲ 문화유산 한양 도성의 아름다운 성곽로(동소문인 혜화문과 동대문인 흥인지문 사이의 성곽 담장 아랫길). 도심 구간이라 탐방객이 많다. 외국인도 많이 찾는다. 이곳에 서면 서울 북부 도심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멀리 북한산도 보여 조망이 뛰어나다. 성곽로에서 낙산(洛山) 산지 공원으로도 이어진다. 아름다운 산능선에 크고 작은 돌을 조화롭게 쌓아올려 높은 담장을 만들어졌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도 일품이다. 다만 혜화문에서 숙정문을 경유해 청와대 뒷산을 넘어 창의문으로 가는 북악쪽 도성 성곽길은 다소 가파르고 험하다. 

그 가운데서도 동소문으로 불리는 ‘혜화문(惠化門)’은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307호가 주소다. 종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돈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이 부근을 ‘혜화문 고개’ 또는 ‘동소문 고개’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동소문동이란 동명도 이에 기인한다. 과거부터 이 문을 나서면 수유리를 거쳐 경기도 의정부 및 양주 일대로 통행하던 요충지이다.

문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 지붕 건물이다. 모습은 문루 아랫쪽에 아치형 출입구를 육축(陸築)으로 쌓았다. 문루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과 싸울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가 있다. 기둥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鷲頭)와 잡상 7개를 두었다.

원래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조선시대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사신 숙소 북평관(北平館)이 그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이 문은 조선 태조 5년 9월(1396년)에 전체 한양도성 수축과 함께 건립돼 한양성 방호와 출입에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던 문이었다. 처음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리다가 87년 뒤인 성종 14년(1483년)에 창경궁 동문을 같은 이름으로 지음에 따라 중복을 피하고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28년 후인 중종 6년(1511)에 현재의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 했다.

그 후 한때 문루가 유실됐다가 영조 20년(=1744년)에 새 문루를 건축하고, 천정에는 용 대신 봉황을 그려 넣었다. 부근에 새가 많아서, 새들로 인한 단청의 훼손 방지를 위한 풍수 비보로 보인다. 이 문은 애초엔 도성 소문 중 하나로 지어졌으나 소용은 대문 못잖은 통행을 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높은 지대의 산등성이에 지어진데다 늘상 폐문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종반정 시기에 반정군이 월담한 사실로 인한 경비 목적도 있을 뿐더러, 당시 조야가 맹신하던 풍수지리 이론상 경복궁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 주산인 응봉으로도 지맥이 통하기 때문에 지맥 훼손 방지 차원이라고도 전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의 상시 폐문으로 인해 동북방 거주 백성과 군사 통행은 죄다 동소문으로 몰렸다. 이 빈번한 통행량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 돈암동 행 전차선로 부설과 도시개혁이란 명목 아래 문루와 아치형 홍예 석문까지 다 헐려서 역사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었다. 이후 정부에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6년에 걸쳐 차로를 피해 위치를 고지대로 옮겨서 문루와 성곽부터 우선 복원했다. 다만 누각은 1992년부터 3년간 추가로 시공해 오늘에 이른다.

지리상 도심구간에 위치해 있어서 현재도 통행인과 방문객이 많다. 주말의 경우는 도성 탐방객으로 북적거린다. 산등성이 성곽 길이라 운동을 겸한 단체 관람객이 다수다. 이곳은 서울시 한양 도성 관리 부서에서 사업 관리를, 종로구청 문화과에서 안전관리를 맡고 있다.  혜화문은 현재 수리 공사 중이지만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엄중 관리하고 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소실된 비극의 학습 효과로 보인다.

한편,  이곳을  방호근무하는 종로구청 김경모(70)씨는 "구청 지침과 관리소장(최창규 주무관)의 통제에 따라 근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화재 사랑 정신으로 사명감과 애국심에 입각해 충실한 안전관리를 하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당연히 문화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조상이 내려 물려줬듯이 반드시 후손에게 대대손손 고스란히 물려줘야 할 책무와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이 관리원의 말처럼 상시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후손의 관리 소홀로 조상의 위대한 유산이 유실되는 슬픈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겠다. 정부는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이 소실되던 그날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2월 10일을 문화재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물론 정부의 투자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관리의 최일선 현장에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화재는 관리하는 당세인의 정성의 손길과 돌봄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을까. 혜화문의 웅자를 후손만대에 물려주자.

▲ 한양 도성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 내 구조(사진 차례대로 '내성쪽 문', '문루 서편 출입문', 북대문인 숙정문 쪽으로 가는 '성곽로', '문 관리소')

편집 :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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