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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의 영웅은 홍범도가 아니라 최씨 3형제이다

작성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 승인 2019.09.26  22: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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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 영화 <봉오동 전투> 스틸 컷 : 출처 주(쇼 박스)

2020년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앞두고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

우리는 보통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대첩=김좌진'으로 기억한다.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 그렇게 배운 탓이다. 실제로 검인정 교과서 미래 앤 『한국사』(2015)에도 '독립전쟁의 두 영웅'으로 홍범도와 김좌진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영웅사관에 입각해 기술돼 왔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쟁을 국민들 머릿속에 집단기억으로 각인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의 사상자 전과도 사실에 기초해 있지 않다. 더구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쟁에서 대패한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해 오자 독립군 주력부대 4000명은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역인 밀산부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쫓겨 독립군 부대는 밀산에서 러시아 이만으로 그리고 다시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한다. 러시아 공화국에서 제공한 열차를 타고 안전지대인 시베리아 자유시로 집결한 것이다.

그러나 항일독립군 부대는 대규모 군단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공세에 쫓겨 이동하는 도중 소규모 부대 통합은 있었을지언정 대규모 군단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진 않았다. 그리고 부대이동 역시 각 부대 개별적으로 이동해 자유시에 집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검인정 교과서 『한국사』(2015)에는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결성 시기를 구체적으로 1920년 12월 또는 1921년 4월로 기술한 교과서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공보처에서 발간된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1985)에서 비롯된 사실 왜곡이다. 그리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일제 정보문서가 이를 뒷받침한 탓이다.

더구나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1985)는 봉오동 전투 당시 총사령관을 최진동이 아니라 홍범도로 기술하고 있다. 명백히 역사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숫자를 700 여명으로 기술하는 등 오류가 적잖이 눈에 띈다.

게다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쟁에서 실전을 치른 하급지휘관 이범석은 자신이 쓴 회고록 『우둥불』(1971)을 통해 역사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당시 북로군정서 소속이자 한국광복군 출신임을 자신의 정치적 출세의 자양분으로 삼은 탓이다. 나쁘게 표현하면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국방장관-내무장관을 거치며 자신의 정치적 출세와 맞물리면서 조작된 신화이다.

동북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는 분단된 현실에서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체결되기 전까지 현장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런 연유로 봉오동 전투 현장을 봉오동 상촌이 아니라 하촌 봉오저수지로 잘못 가리키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봉오동 하촌에 있는 봉오 저수지는 70년대 말 두만강 유역 중국 국경 도시 도문시 상수원으로 지정됐다. 거대한 저수지가 형성된 봉오 저수지는 봉오동 하촌 지역으로 봉오동 전투 현장이 아니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현장은 하촌인 봉오저수지로부터 중촌을 거쳐 10km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봉오동 상촌이다.

그러나 분단 현실과 지리적으로 접근이 통제된 현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봉오동 전투 현장을 잘못 가르쳐 왔다. 뿐만 아니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제1의 결정적 요인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홍범도 개인의 영웅사관에 매몰돼 가르쳐왔다.

올해 개봉된 영화 『봉오동 전투』 역시 홍범도 장군(최민식 분)을 카리스마적 인물로 등장시켜 '봉오동 전투=홍범도'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고증을 거치지 않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다. 일제의 학살만행과 잔혹성을 묘사한 장면이나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장면들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감자 한 알을 여러 명이 나눠먹는 장면이나 군복을 입지 않은 채 누더기 옷을 걸친 독립군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명백히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아마도 독립투사들의 신산한 삶과 20-30년대 항일빨치산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듯하다.

봉오동 전투든 청산리 전투든 '홍범도-김좌진' 개인의 카리스마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자 역사왜곡이다. 이젠 역사 서술에서 개인 영웅사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절대 다수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군과 봉오동과 청산리에 정착한 조선인의 피와 땀의 결정체로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에 훨씬 부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 에선 봉오동 전투를 '조선의 마지막 전쟁'이라고 읊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봉오동 전투는 당시 독립군들이 명명했고 일제 관헌자료에도 나오듯이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지 '조선의 마지막 전쟁'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 속 누더기를 입고 등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정식 군대로서 군복을 갖춰 입었다.

무기 역시 체코 병단이 썼던 화력이 우수한 미제 무기로 대포, 기관총, 장총, 권총, 수류탄들로 무장한 최정예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4차에 걸친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자료와 전문 연구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존 『한국사』 교과서나 영화 『봉오동 전투』는 왜곡된 기술이나 묘사가 적잖이 눈에 띈다.

먼저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일구어 낸 승전보가 아니다. 북간도 일대 제1의 거부인 최운산 장군과 최진동, 최치흥 3형제가 보여준 오랜 준비과정과 독립전쟁을 위해 노력한 피와 땀의 결정체이다. 중국군에 복무한 경험을 지닌 최씨 3형제 가운데 최운산 장군은 중국군 복무 당시 동북 3성 군벌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차례 구해준 인물이다. 더구나 지략과 문무를 겸비한 당대 걸출한 호인이었다.

▲ 최운산 장군 (출처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운산 장군은 일찍이 왕청현 간도 일대 황무지를 헐값에 불하받아 이주 조선인들과 함께 옥토로 개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곡물업과 축산업을 통해 오랜 시간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교역을 해왔다.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장춘이나 훈춘으로 가기도 했다.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최운산 장군은 무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당시 봉오동 독립군 기지에는 재봉틀 8대가 있어 한인촌 마을 부녀자들이 합심해 독립군 군복을 모두 제작하고 세탁도 했다. 김성녀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한 끼에 3000명 분 식사를 마련한 적도 있다고 했다. 1912년 최운산 장군이 한인촌 마을을 지키기 위해 100명 규모로 자위대 병력을 양성했다. 물론 일부는 중국군 복무 당시 최운산 장군을 흠모했던 병사들이 따라 나온 경우도 있었고 마을 청년들 가운데 모집하여 자위대를 창설했다.

그러던 중 1915년 무렵 무장한 독립군 숫자가 점점 늘어나 500명을 넘어섰다. 그리하여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산 중턱을 벌목해 연병장을 만들어 훈련장소로 사용했다. 병사들이 머물 거대한 대형 막사 3개동도 지었다.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 자신의 집을 독립군 본부로 사용하였다. 집 주변 3천 평 넘는 둘레에 폭 1m 두께의 견고한 토성을 높이 쌓아 일제 밀정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보안에 철저했다. 최운산 장군의 형 최진동 장군이 발행한 통행증이 없으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곳 지명이 토성을 쌓은 곳이라 하여 토성리라고 부른다.

▲ 최진동 사령관 통행증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독립군 기지는 보안이 철저해 일제 밀정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으로 군사적 요새였다.

그곳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선친인 최우삼의 무덤이 존재한다. 선친 최우삼은 북간도 연변 일대를 다스리던 관리(당시 '도태'라고 칭함)로서 청나라가 간도를 침탈할 때 '도태의 난'을 일으켜 저항했던 애국지사였다.

3・1운동 직후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항일독립투쟁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채 간도지방으로 넘어왔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선 무장투쟁! 바로 독립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의에 찬 망명이었다. 그리하여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머물던 봉오동 역시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몰려들었고 스스로 독립군이 되고자 지원했다.

최운산 장군은 석현 일대 거대한 땅을 5만원에 팔아 군자금으로 썼다. 연해주 체코 병단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고 군복을 제작하며 670명에 이르는 독립군을 먹이고 입히고 매일 실전처럼 훈련시켰다. 당시 5만 원은 전투기 한 대 가격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억이 넘는 큰 금액이다. 실제로 최운산 장군이 소유한 북간도 일대 땅은 3일을 걸어도 다 밟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광활했다.

최운산 장군 부인 김성녀 여사는 봉오동 전투에 참전했던 독립군을 1960년대 부산 국제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최운산 장군 부인 김성녀 여사에게 이르기를 "수많은 독립군들을 먹이고 입히고 했던 김성녀 여사야말로 진정한 독립투사"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최운산 장군 땅이 당시 부산 지역의 6배 정도 넓이에 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통합 임시정부 역시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 모든 무장 부대들을 통합해 거대한 독립 군단을 형성하고자 했다. 일제와 독립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임시정부 산하 통합된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920년 1월 임정 '국무원 포고 1호'와 '군무부 포고 1호'를 공표해 서북간도 청년들이 독립군에 지원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통합군단 실현을 위해 임정 대표로 안정근과 왕삼덕, 조상섭 3인을 만주와 연해주로 파견하기도 했다.

실력양성론으로 널리 알려진 안창호 역시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당시 임시정부 분위기는 이듬해 1921년 신년하례식을 서울에서 치르자며 뜨거운 열기를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상해 임시정부는 초기 외교독립론 못지않게 일제와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을 부르짖었던 게 역사적 사실이다. 적어도 1920년 이동휘-김립이 국무총리와 국무원 비서장으로 재임했던 기간엔 그러했다.

북간도 일대 제1의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은 당시 비누공장-콩기름공장-국수공장-주류공장-성냥공장-과자공장을 경영할 정도로 절대 다수의 생필품 공장을 운영했다. 러시아와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와 북간도 일대 황무지를 비옥한 토지로 개간한 광활한 땅, 그리고 다수의 생필품 공장에서 나온 수익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쏟아 부었다.

1912년 도독부는 임시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 정식 군대인 '군무도독부'가 된다. 군무도독부 부장, 즉 사령관은 최운산 장군의 친형인 최진동 장군이 맡았다. 자신은 참모장을, 동생 최치흥은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렇게 훈련된 정예 군대인 군무도독부가 있었기에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 제1회전'의 승리로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북만주지역에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홍범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게 아니다.

실제로 홍범도의 빨치산 부대인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1920년 6월 7일)에 합류한 것은 1920년 5월 중순 이후이다.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만든 군무도독부가 중심이 되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그리고 안무의 국민회군 등 6개 단체와 통합해 1920년 5월 19일 '대한북로독군부'라는 통합부대를 출범시킨다. 바로 봉오동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부대이자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오랜 기간 준비해 온 독립투쟁의 빛나는 결실이었다.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부장, 즉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참모장은 최운산, 참모는 최치흥이며 김좌진(제1연대장), 홍범도(제2연대장), 오하묵(제3연대장)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들이 보유한 무기류는 대포 10여 문, 기관총 수십 정, 수류탄 수천 개, 장총 1000여 정, 권총 수백 정이었고 수만 발의 실탄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최운산 장군은 동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동북만주지역을 오가던 김좌진, 이상설, 이준, 안중근 의사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지원하였다. 서전서숙을 비롯해 동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단체들 가운데 최운산 장군의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은 단체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항일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역시 최운산 장군이 만들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 왕청현 서대파에 북로군정서 군 기지 터를 제공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망명한 애국청년들을 훈련시킬 사관연성소 역시 자신의 소유지인 십리평에 세웠다. 북로군정서 산하 사관연성소는 6개월 단기 군사학교로 소장은 김좌진이고 이범석은 당시 약관의 나이로 교수부장이었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이범석을 김좌진이 북간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는 일찍이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군사지식과 전술을 익혔다. 그리고 봉오동에 신한촌을 건설해 100가구가 넘는 조선인 마을을 조성했다. 1912년에 만든 자위대 병력 '도독부'를 1919년 '군무도독부'로 확대 개편해 항일독립군으로 양성했다. '군무도독부' 독립군들은 대부분 공교회 교도들이고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는 중국어에 능통해 이미 중국국적을 취득한 상태였다.

그들 3형제는 봉오동 상촌에 3천 평에 이르는 거대한 요새를 건설해 동서남북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을 실전처럼 훈련시킬 거대한 연병장과 수백 명에 이르는 독립군들이 숙식할 막사 3개동을 지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이전에도 군무도독부는 함경북도 종성군과 온성군을 비롯해 36차례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일본헌병대와 국경수비대를 혼란에 빠트렸다. 실제로 1920년 3월에서 6월 사이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독립군은 대부분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들이었다.

봉오동 전투가 시작되기 전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는 일본군이 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출병한다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했다. 그리하여 봉오동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을 전투 개시 한 달 전에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중심이 돼 조직한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들은 참호를 파고 서산, 남산, 북산, 동산 방향 매복에 들어갔다. 일본군 월경추격대대를 봉오동 상촌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시키려는 작전이었다.

1920년 6월 7일 낮 11시 30분경 일본군 월경추격대대는 1500고지 고려령을 넘어 봉오동 마을로 진입했다. 일본군은 기다란 장화를 신은 채 번쩍거리는 나팔을 요란하게 불어대며 마을을 지나 산으로 진군해 갔다.

일본군 후미가 독립군 매복 지점을 지날 무렵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이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을 쏘았다. 일본군은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대혼란에 빠졌고 우왕좌왕하였다. 무기를 실은 말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혼비백산 산 아래로 질주했다.

전투가 4시간 넘게 치러졌고 전투상황이 독립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던 순간, 오후 4시 20분쯤 기상이변으로 우박이 쏟아지고 장대비가 내려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이 틈을 타 일본군은 남산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대한북로독군부' 제2중대는 홍범도의 지휘 아래 퇴각하는 일본군에 사격을 가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갔다.

사령관 최진동의 퇴각명령이 없었음에도 홍범도는 자신의 부대가 정규군이 아니라 빨치산 부대라며 전투상황에서 퇴각한 것이다. 그러자 끝까지 남산 자리를 지켰던 신민단 대원들은 수적 열세로 일본군의 집중 공격 속에 전멸당하는 참극을 빚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홍범도는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으로부터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퇴각한 것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다.

이후 전투상황은 매복전에서 백병전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뒤이어 일본군 후속 지원부대가 도착했는데 이들은 독립군을 속이기 위해 군모에 묶은 붉은 색 띠를 벗겨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장대비 속에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한 일본군은 자신들의 지원부대를 독립군으로 오판하여 서로 총격을 가했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백 수십 명이 아니라 5백 명을 넘어선 이유이다.

봉오동 전투 결과 상해 임정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이나 그 이후 대부분 역사기록은 독립군의 피해가 거의 없는 것처럼 기술해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투는 치열했으며 독립군 전사자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총상 환자 역시 수십 명이 발생했다. 이것이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부른 '봉오동 전투'의 실상이다.

▲ 피 묻은 태극기 (출처 : 독립기념관 소장)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홍범도 1인에 맞춰진 영웅사관을 이젠 벗겨버릴 시점이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으로 인식해 수년에 걸쳐 주도면밀하게 사전 준비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활약상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더구나 자신의 전 재산을 항일무장투쟁에 쏟아 부은 최운산 장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후손들은 기억해야 한다.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최운산 장군은 6번의 투옥과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옥에서 나올 땐 수레에 실려 나오곤 했다. 이젠 『한국사』 교과서를 비롯해 독립운동사 서술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고결한 삶을 기록해야 할 시점이다.

*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레디앙>에도 실었습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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