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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안당 일기>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 묘를 찾아서

작성 정우열 주주통신원 | 승인 2019.10.13  21: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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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 태풍 파타가 한바탕 몰아치고 난 뒤 하늘은 더욱 높고 푸르르렀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집나간 며느리도 찾아온다는 전어철!

"한송, 이달엔 전어와 꽃게나 먹세" 우영의 전화다. "어디 좋은데 있어?" "노량진 사육신묘 돌아보고 수산시장에 들러 그곳에서 하면 돼" "알았어" 한송은 바로 회원들에게 '알림글'을 보냈다.

"동우회 가족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태풍 파타가 지나가고 나니 하늘이 더욱 맑고 높아졌네요. 나들이하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그러고 보니 9월 탐방일이 됐네요. 어디로 가냐구요?

이달 탐방은 노량진 사육신묘와 공원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주위에 노강서원터, 심훈의 문학비, 사충서원터 등 많은 유적지가 있습니다.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 묘, 이 묘와 사당을 통해 그분들의 충절 정신을 되새겨보고 주위의 유적지를 둘러본뒤 수산시장에 들러 전어와 꽃게탕으로 한잔 '카악~'하려합니다.

노들섬과 한강, 백로가 노닐던 섬이라 해서 부쳐진 '노들섬', 한잔 하고 한강 바라보며 그 노들길 걸어봄이 어떠하실까요?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한송"

한송의 알림글을 받은 우리는 그날 오후1시 노들역 5번 출구 역내에서 만났다. 우영. 우사. 향산. 경산. 한송, 그리고 멀리 밴쿠버에서 우빈이 참석했다. 탄월과 이산은 몸살감기가 들어 못나오겠다 했고, 정재는 병원에 간다고, 범산은 회의가 있어 참석이 어렵겠다고 했다. 그밖엔 모두 참석했다.

우리는 경산의 안내에 따라 노들역 5번 출구를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건너 국민은행 옆 <청기와 갈비>(동작구 본동 400번지, 010-2460-2900)집으로 갔다. 갈비탕 전문집이다. 인건비 탓인지 중년 주인아주머니가 혼자서 바쁘게 하고 있었다. 갈비탕에 소주를 곁들였다. 갈비탕 맛이 진국이었다. 오랜만에 갈비탕 같은 갈비탕을 먹었다. "경산, 여길 어떻게 알았지? " 모두 한마디씩 했다. 오늘 식당 예약은 경산이 했기 때문이다. 역시 경산은 우리 동우회의 보배다.

홍살문을 지나 사당으로

점심을 마친 우리는 우측으로 높이 선 '김문기 선생기념관'을 바라보며 노량진역 쪽으로 걸었다. 얼마쯤 걸으니 우측에 현판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이 현판의 글은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중의 한 귀절이다.

우리는 '의(義)'가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오른쪽으로 돌아 홍살문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홍살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길은 언덕길이다. 얼마쯤 오르니 <사육신묘>(死六臣墓)안내판이 서 있다.

사육신묘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라고 했다.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 음력 윤 6월(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肅宗) 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正祖)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忠魂)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忠義) 정신을 널리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紅箭門),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忠孝思想)의 실천도장(實踐道場)으로 정화하였다.

본래 이 묘역(墓域)에는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河緯地), 류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허묘(虛墓)도 함께 추봉하였다."

안내문의 전문이다. 안내문을 읽고 다시 더 들어가니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불이문을 지나 의절사(義節祠)앞으로 갔다. 의절사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한송은 방명록에 '경동14기 역사탐방팀 동우회 일동'이라 적고 향을 피웠다.

우리는 모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한송의 구령에 맞춰 경건한 마음으로 영전에 고개 숙여 묵념했다. 의절사에서는 매년 10월9일 추모제향을 올린다 한다.

사육신묘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반대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의 시신이 뭍힌 곳이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이 여섯 사람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 '육신전(六臣傳)'에 의해서다. 그런데 현재 묘역엔 6신이 아닌 7신의 묘가 있으며 사당에도 7신의 위패가 모셔저 있다. 그분이 바로 김문기(金文起, 1399 - 1456) 선생이시다.

왜? 사6신이 아닌 사7신이 되었나?

김문기 선생이 이 사육신 묘역에 묻히게(가묘) 된 것은 1977년 이다. 그해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차례 논의 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김문기(金文起)는 정종(定宗)1년(1399)에 태어나 세조(世祖)2년(1456)5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시호는 충의(忠毅)이며 본관은 금녕(金寧)이다.

세종8년(1426) 식년과에 별과로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느라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1430년 이후 예문관 검열, 사간원 좌헌납, 함길도 도진무, 지형조사, 병조참의를 거쳐 문종1년(1451) 함길도 관찰사, 단종1년(1430) 형조참판, 함길도 절제사, 1455년 세조가 즉위하여 공조판서가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 당할 때 김문기도 연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절의 6인을 남효온이 <추강집> '육신전'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김문기는 판서급으로 삼중신(三重臣;이조판서 민신/閔伸.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공조판서 김문기/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유응부. 하위지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김문기의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는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신도비(神道碑)와 사육신비(死六臣碑)

다시 층계를 내려와 오른쪽 비각 앞으로 갔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가 우뚝 서있다.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이라 새겨진 이 신도비는 1782년(정조5)에 건립된 것으로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 1691 - 1757)이 찬(撰)하고, 글씨는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 709 - 785)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라 한다. 비각은 1978년 묘역 성역화 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

"우사, 저기 비문에 노량진을 해오라기 '鷺'자가 아닌 이슬 '露'자로 썼네."하는 한송의 말에 우사도 "그러게. 애오라지 노자 아니네"했다. 노들섬이 애오라지가 날고 들며 노니는 곳이라 해서 부쳐진 이름이라면 응당 노량진의 노자도 애오라지 노(鷺)자를 써야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현재 동작구의 노량진은 시흥, 수원 쪽으로 도강하는 나룻터[渡船場]으로 일명 노들나루, 노량도(露梁渡), 노량진(鷺梁津), 노도(露渡)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음을 알았다.

우리는 다시 맞은편 '육각의 사육신비' 앞으로 갔다. 원래 이 자리는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있던 곳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 되었다. 지금의 이 육각사육신비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 때 세워진 것이다.

비를 살펴보니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 1905-1977)선생님이 짓고 김충현(金忠顯, 1921-2006)선생님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 일중 김충현 선생님이 쓰셨네" 김충현 선생님은 역시 우리 경동인들의 자부심이다.

다시 중.하단을 살펴보니 거기엔 손재형(孫在馨, 1903-1981)선생님이 쓰신 육신의 이름과 그분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 씩 새겨져 있다.

묘역을 둘러보며

이렇게 불이문 안의 의절사. 신도비. 육각비 등을 샅샅이 살펴보고 묘역으로 갔다. 묘역에는 모두 7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헌데 그중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의 4기는 원래 있었던 것으로 각각 묘앞에는 '成氏之墓. 朴氏之墓. 兪氏之墓. 李氏之墓'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 4기의 묘는 1972년5월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그 뒤 1977년, 1978년 사육신묘역의 성화공사 때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假墓)가 조성되었는데 역시 그 각각의 묘앞에도 '河氏之墓. 柳氏之墓. 金氏之墓'라고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주위에 이름 모를 꽃들이 우리를 반기며 무엇인가 역사 속에 숨겨진 비화를 들려주려는 듯 했다. 새들도 나무 가지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그 비화를 듣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사육신 역사관'으로 옮겼다.

충신들의 이야기

사육신 역사관은 2층 건물로 2층에서는 '충신들의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우리는 사육신과 단종 복위를 함께 모의한 김문기 등 일곱 분을 소개한 마네킹을 보며 왜? 사육신공원에 6기가 아닌 7기의 묘가 있게 되었을가를 설명한 전시실로 가서 그 까닭을 알아보고 다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형틀방으로 가서 그 분들의 의절에 다시금 고개 숙였다.

이렇게 충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사육신묘소 탐방을 마쳤다. 사육신 묘역을 나오면서 우리는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의 시를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았다.

   桐千年老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번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柳經百別又新枝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가지가 올라 온다.

2019. 10. 11. 김포 하늘빛마을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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