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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鄭南局 1897-1955)선생

작성 마광남 주주통신원 | 승인 2019.10.20  18:5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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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58년에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된 것이 93회

▲ 정남국 선생

항일운동을 하다가 수감 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게 많다. 그중 수감 횟수가 제일 많은 사람이 아마도 정남국 일 것이다. 생전에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 된 것이 무려 93회나 되니까.

▲ 정남국 선생

정남국은 1897년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의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5세가 넘도록 가정이 빈곤하여 완도읍으로 유학할 수가 없어 바다에서 해조류를 채취하여 가정을 꾸려갔다. 선생은 또래들이 완도읍에 유학하여 사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완도 유학을 갈망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부친에게는 더없는 무거운 짐이 되어 어려운 형편이지만 선생을 완도사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입학은 하였으나 어려운 형편은 월사금(학비)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이듬해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해조류 수집상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하였다. 여기에서 4~5년 모은 돈을 통틀어 일본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이것도 오래가지 못하고 2학기에 중퇴하고 만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기까지 선생이 정상적인 수업을 받은 기간은 3년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고향인 소안도로 다시 돌아왔다.

1914년 소안도에 배달청년회가 결성되자 부회장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항일투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는 완도에서 만세운동을 하고, 전남노동연맹 상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사람인 송내호의 권유로 상해임시정부 지원군자금 모금원이 되었다.

당시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감시를 피하고자 엿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원을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 간에 비밀연락책이 되었다.

스스로 “일황 사형선고장”을 만들어 엿판 아래 숨겨 다니면서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엿장수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엿장수독립운동가”로 알려지면서 오래가지 못하고 소쿠리장수로 변장하여 전남 일대를 누볐다. 당시 전라도 동지들 간에는 “엿장수 정서방” 또는 “소쿠리장수 정도령”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렵게 모은 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한양에서 출발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헌병대 검문이 삼엄하고 자신은 전과가 있기에 동지에게 자금 보따리를 맡기면서 검문이 끝나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약 내가 체포되더라도 이 자금은 임시정부에 꼭 전달해야 한다고 부탁한다. 예상대로 선생은 검문에서 다른 전과 때문에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1926년 일제는 소안면민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만든 사립소안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켜 공립학교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7월 13일 그는 공립학교 개편에 반대하는 면민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방문하여 항의하였다. 성과가 없었다. 선생은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5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완도향우회와 동경향우회가 힘을 합해 재 일본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사립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하는 총독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실정반대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위원장으로 추대 받고 오사카 항구에서 4개 단체 회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대회를 열어 축사를 하는 도중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는 무산되고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사립소안학교 복교운동은 결국 무산되었지만 일본 오사카에서 복교대회를 하면서 사립소안학교 복교운동은 국제화되었다.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당시 전라도는 총독부에서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에게 국유지를 불하하고 있었다. 선생은 농민운동을 하기로 작심한다.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들이 총독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은 현지에서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던 농토였다. 현지 농민들은 자기가 벌어먹고 사는 땅이었기 때문에 자기 땅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지신들의 땅으로 등기할 기회도 없었기에 국유지로 남아있던 것이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농토를 잃고 소작인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높게 받았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완도를 비롯해 신안의 섬 지역과 영광, 무안, 해남등지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전라도 소작쟁의는 소안도 토지계쟁사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소안도 토지계쟁사건이 승소하면서 항일운동이 더 활기차게 진행되었으며 전라도 소작쟁의사건도 소안도에서 불씨를 댕기면서 결국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소안도에서 토지반환소송에 승소했던 경험을 살려 다른 지역의 농민들을 선동하였다. 소작쟁의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어 전라도의 농민운동이 되었다.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23년의 암태도 소작쟁의가 있고 다음으로 하의3도를 시작으로 영광, 해남등지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 농민운동에 불을 붙여준 사람이 완도사람 정남국이다.

한편 청산도 출신 김흥곤은 광주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안으로 내려가 소작쟁의를 취재하여 전국에 알렸으며, 선생은 신안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같이 투쟁했다. 선생은 이렇게 활동하던 중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고향인 소안도에서 살았다.

선생의 생애 58년에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된 것이 무려 93회이며, 옥고를 치른 것이 10년으로 감옥살이 경력?은 항일민족운동자 중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선생은 일본어를 잘했기에 재판과정에 변호사 없이 본인이 변론하여 감형을 받았기에 10년이지, 그러지 못했다면 20년도 넘었을 것이라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데 지금도 친일본인들이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생은 1951년 5월 31일 실시한 국회의원선거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4년 임기가 끝나고 바로 여수병원에 입원했다.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수많은 고문과 감옥살이에 허약해진 몸을 여수 병원에서 치료하던 중 1955년 6월 19일 타계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국장(제83호)이 추서되었다. 후손이 완도읍에 살고 있으나 삶이 편하지는 못하다.

●, 정남국 선생은 소안 노농대성회, 배달청년회, 살자회의 지도적 인물로 3,1운동 당시 전남노농연맹 상임위원, 소작쟁의운동, 군자금모금활동,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 조선총독부폭압정치반대동맹, 중국국민혁명비간섭동맹 등 3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투쟁하였고, 신의주사건(3차공산당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수 차례의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마광남 주주통신원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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