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정수병(85, 동이면 적하리)씨 이야기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정수병 씨(85)입니다. 옥천신문을 즐겨 읽는 독자라면 '정수병'이라는 이름 석 자가 매우 익숙할 겁니다. 매달 한 번씩 연재되는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옥천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정수병'을 주제어로 입력하고 검색하니 무려 266건의 기사가 뜨네요). 정 씨의 안내로 진행되는 이 시리즈는 2003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989년 정 씨는 동이면 평산리 뒷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좀 특이한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마을에 내려와 주민들을 탐문하고 족보도 뒤져봤습니다. 그것은 바로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시골 선비의 원통한 심정을 새겨 놓은 이기윤의 망북비(望北碑)였고, 나중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9년에는 동이면 석탄리에서 석빙고를 발견했고, 2000년에는 지양리에서 북방식 고인돌을 발견했습니다. 옥천읍 서정리, 동정리라는 지명을 추적하다가 서정자, 동정자 터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정수병 씨의 자택 거실 벽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먼저 휘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정 씨의 가훈이자 좌우명이라고 합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鄕愁)' 전문을 적은 편액과 이런 문구의 나옹선사 시 편액도 보였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지금부터 옥천군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로 물 같이 바람 같이 살아온 정수병 씨의 인생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 정수병씨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를 펼쳐보이고 있다. 300점이 넘는 고서를 갖고 있었으나 대부분 옥천군에 기증하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 서당 훈장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

나는 1934년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적하리는 선대가 약 500년 전에 영동에서 옥천으로 이주해 정착한 마을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중봉 조헌의 참모로 활약한 고암 정립이 나의 11대조가 된다. 선대의 유지를 이어 고향을 지켰던 아버지 정상재는 안남면 배바우에서 시집온 어머니 전순월과의 사이에서 4남5녀의 자식을 낳았다. 올해로 103세인 큰누나 길순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나는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 훈장이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하여 낮에는 어머니와 함께 농사도 지어야 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와 소송까지 불사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우리 집은 경제적 궁핍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아 시절로 기억된다. 부모님이 들에 나가 김매기를 하는 동안 나무 그늘에서 큰누나가 나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큰누나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내가 일어나 부모님께 걸어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린 내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엎어졌는데, 하필이면 뾰족한 끄트러기에 눈동자를 찔리고 말았다. 당시 오른쪽 눈을 실명(失明)했다.

아픔을 딛고 성장한 나는 동이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많은 선생님이 있었지만 6학년 2반 담임인 박광하 선생을 잊을 수 없다. 일방적 명령과 무조건 복종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일제강점기였지만 박광하 선생은 전체 학생이 참여하는 민주적 투표를 통하여 반장을 선출했다. 내가 반장으로, 김숙경이라는 여학생이 부반장으로 뽑혔다(김숙경은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된 오빠의 월북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학생 시절 나는 모범생과 우등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품행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다"는 문구가 들어간 상장을 곧잘 받았다. 상장을 받는 날이면 나는 책보를 몸통에 질끈 동여매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에게 빨리 상장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막내아들이 가져온 상장을 받아든 아버지는 늘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학업을 이어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가난이었다. 막내아들의 진학 좌절이 딱해 보였던지 아버지는 수소문 끝에 옥천읍의 고등공민학교를 소개해주셨다. 학비를 낼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무료로 운영하던 학교였다. 그런데 영어 알파벳 ABC를 막 배우기 시작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나의 제도권 교육은 여기서 끝났다.

▲ 소장 중인 고서를 살펴보고 있는 정수병씨.

 

양조장에서 일하며 목격한 서울 풍경

전쟁이 끝나갈 즈음 나는 대처(大處)로 나갔다. 대전일보 해판부 직원이 나의 첫 번째 직업이었다. 해판부(解版部)는 말 그대로 신문을 찍기 위해 조판했던 활판을 해체하는 부서였다. 해체한 글자를 가나다라 순으로 정리한 다음 문선부(文選部)로 넘겨주면 되었다. 당시 경찰관으로 일하던 작은형의 처가가 대전 판암동에 있었는데, 거기서 1년6개월 동안 숙식을 제공받으며 출퇴근했다.

하지만 해판이 너무나 단순한 업무라 20대로 막 접어든 나에게도 전망이 그리 밝아 보이진 않았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가 매형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광화문 건너편에 매형 동생이 친구와 합작해 운영하는 양조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전표를 떼어주는 단순한 업무를 하다가 2년이 지난 뒤에는 공장장이 되었다. 어깨 너머로 술 담그는 법을 배우다 사내 최고의 양조 기술자가 되었던 것이다.

양조장 공장장으로 일하던 당시의 일이었다. 나는 업무에 지치면 가끔씩 가까이 위치한 사직공원에 놀러갔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는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치 깡패로 유명했던 김두한 의원이 사직공원으로 유세를 하러 왔다. 연단에 오른 그는 상의를 벗어 단상 위에 올려놓더니 팔을 걷어붙이고 연설을 시작했다. 단상 위에 오르기 전 그는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양조장 일을 모두 끝내면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옥상에 올라가 쉬었다. 그런데 바로 옆 건물이 댄스홀이었다. 성인 남녀가 서로 안고 춤을 추는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낯설어 보였던 춤추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우리는 저녁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옥상에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양조장 근무는 5년 만에 끝났다. 양조장 사장이 바람을 피우며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자 일터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술을 배달하는 직원들이 장난을 쳤다. 실제로는 대금을 받았음에도 회사에는 외상으로 처리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조장은 부도를 냈고,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 2000년과 2001년에는 국가 통계 조사에 기여한 공로로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 김대중 대통령 서한 등을 받기도 했다.

 

포도 농사 잘 지었다고 금메달 받아

나는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귀향했다. 그런데 유성에 있는 한 양조장에서 나를 찾아왔다.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된 나는 여기서 먹고 자며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서울에서 터득한 술 만드는 기술은 물론이고 정성과 영혼까지 쏟아 부었다. 그러자 주변에 술맛이 좋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성 생활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사장 아들이 바람을 피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양조장도 망해버렸다. 아무리 술을 잘 만들어도 기강이 무너지고 구성원 간의 신뢰가 깨지면 조직이 존립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1960년대 초반에 적하리로 돌아온 이후 나는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옥천읍 삼청리에서 시집온 아내 곽순순과 함께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농사를 지었다. 사실 도시 생활을 하다 돌아온 나는 농사에 한참 서툴렀다. 하지만 일 잘 하는 아내 덕분에 농촌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논농사와 밭농사도 지었고, 포도농사에도 뛰어들었다. 열심히 일하자 농산물 품평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포도농사를 잘 지었다고 금메달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키운 포도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오기도 했다.

나는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라 마을의 공익과 발전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73년 잠업전진회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새마을지도자, 산불방지 명예감시관, 동이면자치발전협의회 회원, 동이중학교 마을교사 등으로 활동했다. 1991년 농지개량조합 대의원으로 일할 때는 주민들의 숙원이었던 경지정리사업을 추진해 성사시켰고, 1994년에는 적하-금암 우회도로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 어려운 환경에서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묵묵히 지켜봐준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수병씨와 아내 곽순순씨가 가훈 '가화만사성'이 적힌 액자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다.
▲ 고서를 펼쳐보이고 있는 정수병씨.

 

■ 귀향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향토사 연구

사실 내가 고향에 돌아와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매진한 일은 향토사 연구였다. 이것은 어린 시절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 아버지는 서당에서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때는 물론이고 주민들이 사랑방에 모여서 담소를 나눌 때도 항상 지역의 역사 이야기를 해주었다. 옥천에 어떤 현감이 언제 부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지역의 지명에는 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설명하곤 했는데, 그게 나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유년 시절 우리 집 골방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던 고서(古書)도 나를 향토사 연구의 길로 이끌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이 엄청난 분량의 고서를 지키려고 땅속 깊이 파묻었다. 당시 비가 오는 바람에 일부 고서에 얼룩이 생겨나기도 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고향을 지키던 둘째형이 이 고서를 귀향한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때부터 옥편을 찾아가며 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는 불을 밝히고 자료를 읽었다. 재미가 있으니까 신기하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게 소문이 나면서 공무원, 언론인,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은섭, 박재흠, 윤길원, 전순표, 김성장, 이안재 등이 그때 인연을 맺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1986년 향토사연구회를 결성했다.

나의 향토사 연구는 고서와 자료를 읽는 것에서 현장을 조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아버지와 형이 남겨준 자료에는 1919년 발간된 옥천 지도도 있었다. 그런데 지도를 살펴보다 동이면 석탄리 뒷산에 '성골'이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단서로 삼아 마을을 찾아가 노인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민들과 함께 성터를 찾아냈다.

이후 역사와 관련한 연락이나 제보를 해줄 수 있는 지인들을 중심으로 옥천 곳곳에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때부터 집에서 일하다가도 오래된 분묘를 이장한다거나 유적이나 유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으면 현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나를 골동품 장사로 여겼다. 하지만 이런 만남이 자꾸만 반복되니 지금은 새로운 유물이 나오면 나부터 찾는다.

아마도 이 일을 누가 시켜서 했다면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하다 보니 지치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이 내 학력의 전부였기에 자료를 일일이 읽고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더욱 정성을 쏟았고 반드시 전문가의 감수를 받았다.

▲ 향토사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 활동에 기여한 공로로받은 수많은 상장과 상패들이 방 한쪽에 진열돼있다.
 

 

■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 동참해요

나의 향토사 연구는 금강 줄기를 따라 산재해 있는 수많은 여울과 바위, 마을과 골짜기의 이름의 유래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옥천신문 2003년 6월 27일자에 '정수병과 함께 여울길을 건너다' 시리즈 연재가 시작되었다. 옥천과 영동의 경계인 이원면 원동리 오배거리여울에서 시작된 이 답사는 약 3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5년 동안 쉬었다가 2011년 4월 15일부터 다시 '정수병과 함께 걷는 여울길'로 제목을 바꾸어 현재까지 7년째 이어지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이 답사를 위해 나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행선지가 결정되면 그 지역 역사와 사정에 밝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궁금한 것을 묻는다. 그것을 기초로 관련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를 한다. 그리고 혼자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사전 답사를 한다. 처음에는 이안재 옥천신문 상임이사와 단둘이 시작했던 답사에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가족의 이해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평생을 동행해준 아내와 후손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나는 아내 곽순순과의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인숙, 용규, 미숙, 광규, 남규 등 5남매가 모두 10명의 손주(5남5녀)를 낳아주었다.

▲ 가훈 '가화만사성'이 적혀있는 액자 아래에 정수병, 곽순순씨 부부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정수병씨
▲ 고서를 살펴보고 있는 정수병씨.
▲ 정수병, 곽순순씨 부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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