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분야에서 박사과정 혹은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어떤 모습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부스스한 머리에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쓴 수줍은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나 역시 석·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 연구원은 연구실에만 박혀 사회와 교류가 적고 사회적 관계가 필요 없는 직종으로 생각했다.

외향성과 내향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나는 연구실에만 박혀 실험을 한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묻고 또 묻는’ 내 성향을 파악한 부모님은 연구원을 권유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거부했다. 대학 졸업 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해외출장이 잦은 직종을 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스포츠마케팅회사 통역사로 하와이에 한 달 동안 출장 간 적도 있고,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여러 사람들과도 교류했다. 이런 직종은 나의 외향성향은 만족시켰지만, 어떤 진리를 찾고자 하는 내향성향은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석사과정 진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석사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나만의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기회가 주어졌고, 현재 알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내 방식대로 풀어간다는 점이 마치 탐정이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 같았다. 석사 후 과정에서도 생각 외로 다른 실험실 연구원들과도 교류가 있어 실험실에 처박혀 일만 한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향성향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캐나다 박사 생활은 어떨까?

그동안 잠시 묻어 두었던 외향성향이 캐나다에서 조금씩 살아난다. 외향성향이 연구에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작은 범위에서 보자면 실험실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매일 커피타임을 갖는다. 이 시간은 보통 아침 그리고 오후에 한 번씩 있다. 실험실원들이 커피를 마시며 각자 하고 있는 연구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코멘트를 준다. 실험실원들 각각 맡은 프로젝트와 연구 분야가 다르기에 생각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정말 좋은 시간이다. 종종 옆 실험실원들과도 커피를 마시며 서로 부담 없이 연구에 대한 정보를 교류한다.

처음 연구실에 왔을 때, ‘여기 연구원들은 참 여유롭네. 일이 별로 많지 않나봐. 커피도 자주 마시고..’ 라고 생각했다.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바쁘단 핑계로 종종 커피타임에 가지 않기도 했었다. 하지만 30분 혼자 논문을 보며 끙끙거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 내가 생각치도 못한 아이디어, 연구방법을 갖고 있는 연구원들과 교류하는 것이 생각에 활력을 주고 실제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커피를 내려놓고 “커피타임!”이라고 실험실원들에게 외친다. 

실험실 안을 넘어 더 큰 범위에서 보자면, 요새는 거의 한 달에 한번 정도 대중 앞에 서서 현재 연구에 대한 타당성과 영향력을 발표하고 끊임없이 코멘트를 받는다. 주로 우리기관 교수님들과 연구원들 앞에서 하지만 국제학회에서도 한 번 했다. 지속적으로 대중 앞에서 연구 발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사고의 편협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보통 연구는 세부적이고 특정한 한 분야에 집중해 있는데 자칫 작은 거에 집착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나만의 사고에 빠져 연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처음으로 국제학회에서 진행 연구를 발표했다. 학회는 여태껏 내가 가본 학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학회 이름은 'Society of Neuroscience Conference'다. 참가 인원이 약 27,000명 되는 대규모 학회였다. 이 모든 사람을 수용하기 위해 북미에서 제일 큰 컨벤션 센터 'McCormick Place'를 통째로 빌렸다. 4층 규모의 McCormick place는 미팅룸만 61개, 전시장은 3곳이다. 참가원들은 10분마다 운행하는 7개 다른 셔틀을 타고 학회장으로 이동했다. 이런 큰 학회는 과학계 거장들이 발표하는 메인 발표장(Main symposium), 각 분야 전문 교수님 발표장(Mini symposium), 학생들 발표장(Nano symposium)이 있다.

▲ 국제학회에서 발표

내가 하고 있는 연구가 Nano symposium에 뽑혔다. 15분 발표시간이 주어졌다. 발표대에 올라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사람들과 눈 마주치고 웃으며 해야지 했던 계획은 무대에 오르자 까맣게 잊어버렸다. 약간 헐레벌떡 시작했지만 곧 나의 페이스를 찾았고 되도록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내려와 자리에 앉자, 모르는 옆 학생이 잘했다며 따듯한 미소를 지어 주었고, 호랑이 보스 스테판도 잘했다며 칭찬해주었다.

학회를 다녀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기관에 있는 한국박사과정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한국 몬트리올 총영사관과 '맥길한인교육문화단체'가 협동으로 주최하는 ‘학생 멘토링/네트워킹 이벤트’에 멘토로서 참여해달라고 했다. 다양한 분야에 있는 석·박사 학생 및 직장인을 초청하여 학부학생들이 궁금했던 점을 직접 물어볼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였다.

처음 친구에게 요청이 왔을 때 잠시 망설였다. 나는 외향적이긴 하나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누구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대학생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길을 잃은 듯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던 적이 있었다. 박사과정 중인 선배를 만나 연구생활이 어떤지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고민도 덜하고 빨리 결정했을 텐데... 생각이 들어 참석을 결정했다.

네트워킹 이벤트 당일 ‘멘토 이지산’이 적힌 명찰을 받아 어색하게 목에 걸었다. 생물을 전공하는 학부생들이 있는 라운드 테이블에 앉았다. 총 10명이 앉았고, 그 중 멘토는 나까지 3명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라 잠깐 어색함이 돌았지만 먼저 용기 내어 웃으며 나를 소개했다. 곧 돌아가며 이름, 전공, 관심사를 이야기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학생들이 하나둘씩 질문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멘토들이 번갈아 가며 답해주었다. 눈을 반짝이며 우리가 하는 얘기를 열심히 듣는 학생들을 보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무한한 열정을 느껴졌다. 이런 에너지에 힘입어 더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싶어 신나게 떠들었다.

놀랍게도 네트워킹 이벤트는 나를 지치게 하기보다 오히려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을 보고 그들이 앞으로 나와 같은 길을 갈 수도 있고, 미래에 연구자로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절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 다음날, 뜻밖의 이메일을 받았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학생 중 한명이 너무 고맙다며 다시 한 번 만나서 궁금한 것들을 자세히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기쁜 마음으로 답장을 하였고, 더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박사과정 중인 한국인 친구와 같이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혼자 열심히 실험하여 결과를 내는 것만이 연구원에게 주어진 책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에서 배운 방법, 결과 등 지식을 공유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는 것 또한 연구원의 중요한 책임이 아닐까?

실험결과가 잘 나왔을 때 보통 손을 올렸다 내리며 “Yes”라고 한다. 굉장히 뿌듯한 감정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을 때 느끼는 감정 또한 저 “Yes"와 같다. 그런데 그 감정은 더 오래간다. ”Yes", "Yes", "Yes"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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