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어떤 나라인가?

베트남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와 많이 닮았다. 오랫동안 중국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점이 그렇고, 중국. 프랑스. 일본 등 외세에 시달린 점도 그렇다.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은 현대사 또한 우리와 비슷하다.

베트남 역사에서 중국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한나라와 오대십국의 하나인 남한(南漢, 당나라 멸망후 중국 남부를 다스림)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중국에 지배를 받거나 황제국으로 대접하며 조공을 받쳤다.

베트남의 원래 국명은 '비엣남'(Viet Nam, 越南)으로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베트남'은 일본식 발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비엣남은 지금의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에 있었던 고대국가 '남비엣'[南越]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면 왜 '남비엣'(南越)이 '비엣남'(越南)으로 바뀌었을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자 베트남을 통일한 최초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阮王朝,1802-1945, 1884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왕조는 1945년까지 프랑스의 보호 아래 유지되었다)가 고대국가 남비엣 땅을 차지한 중국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중남부를 지배하던 참파왕국(192-1832, 말레이계)을 물리치고, 국토 전체를 베트남족의 땅으로 만들었다. 응우옌 왕조는 새나라 이름을 옛 고대국가에서 따와 '남비엣'(南越)이라 짓고, 당시 조공을 바치던 청나라에 수락 요청을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어깃장을 놓더니 뒤늦게 글자 앞뒤를 바꾸어 '남비엣'[南越]을 '비엣남'[越南]으로 내려 보냈다. '갑'의 횡포였다.

청나라에 시달리고 프랑스 식민지가 된 것도 모자라 세계대전 땐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다행히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1945년 베트남은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중심이 되어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가 지배권을 주장하며 독립에 반대하자 이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1945-1954),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에 맞서 긴 전쟁(베트남 전쟁,1955-1975)을 치른 끝에 1976년 베트남은 응우옌 왕조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 지도

베트남과 한국의 공통점과 차이점

일찍이 중국의 문화권에 있었다는 공통점과 제2차대전이 끝날 때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베트남과 한국은 1976년 베트남이 통일될 때까지 남북 분단국가로 DMZ가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북쪽이 사회주의, 남쪽이 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을 돕기 위해 파병을 했고, 북한 역시 북베트남을 돕기위해 파병을 했다. 그러고 보면 베트남전(월남전)에서 남한과 북한이 동족 간에 전쟁을 한 곳으로 이는 한국전쟁(6.25동란)의 연속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럼, 왜? 한국(남한)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1964년 5월9일 미국 존슨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국에 보낸 남베트남 지원요청 서한(書翰)을 접수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미국이 왜 한국에 파병 요청을 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군대 유지비가 싸다는 것이며, 셋째는 전투력이 뛰어나다는 데 있었다. 그럼, 당시 한국(박정희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주한미군 감축에 따른 안보 우려, 둘째,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보답, 셋째, 한미동맹, 마지막으로 청년 실업률 감소와 외화벌이, 수출 증대 및 기업의 베트남 진출 등이다.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한국 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하였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신이 한국(남한)에 내린 선물이다."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베트남 DMZ 역사평화 기행

지난 10월 한겨레 통일문화재단에서는 <한겨레신문>을 통해 베트남 DMZ 역사평화 기행(2019.12.2~6일, 3박5일) 참가자를 모집했다.

그동안 한겨레문화재단에서는 시베리아 바이칼 -북방, 오래된 미래로의 여행- , 백두산 등정, 철원 DMZ 역사평화 기행 등 통일에 대비한 많은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한 바 있다. 나는 2017년 8월 그 중 시베리아 바이칼 여행에 친구(탄월, 김원택)와 함께 참여해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취지를 조금은 알고 있다.

특별히 이번 베트남 DMZ 역사평화 기행에 관심을 갖고 참가한 것은 'DMZ'에 있었다. 첫째는 나의 고향이 연천 민통선 지역으로서, 현재 김포 한강하류 운양동에 살고 있고, 친구 탄월 역시 연천 전곡에 살고 있어 비무장 지대의 실태를 잘 알고 있어 한국의 DMZ 실태와 베트남의 DMZ 실태를 비교해 보고 싶었고, 또 생태계 보호에 관심을 갖고, 먼저 통일을 한 베트남에서는 이 DMZ생태계를 어떻게 보호하고 활용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한의학자로 1997년 <중외의학문화교류사>(中外醫學文化交流史, 전파과학사, 1997)를 번역하였다. 그때 베트남의학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현지에서 확인해 보고 싶은 조그만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12월6일, 밤 11시05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TW127은 새벽 2시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현지 가이드(박준석)의 안내를 받아 숙소 무엉탄그랜드 다낭 호텔로 이동했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10분 거리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생각 보다 그렇게 덥지 않다. "무연탄이 아니라 무엉탄입니다." 가이드의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각자 배정된 객실로 들어가 여장을 풀고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 5시, 모닝콜 소리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 봤다. 멀리 다낭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고층 건물은 거의 없고 간간히 비치는 불빛 사이로 강물이 보인다. 한강이라 한다. 서울의 한강과 이름이 같다. 호텔 조식 후 체크아웃을 하고, 7시 30분 호텔을 출발 오늘의 목적지 DMZ를 향해 달렸다.

베트남 DMZ는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베트남으로 분단된 후 1975년 4월 30일 통일되기까지 존재했다. 베트남의 DMZ는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각각 5km이며 동서 길이가 약 50km로 우리나라 DMZ에 견줘 길이는 1/5 규모이다.

베트남은 한때 우리나라처럼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분단돼 날카롭게 대립했다. 한겨레평화연구소 권혁철 소장은 출발에 앞서 인사말에서 "이번 기행에서는 베트남 중부 중심지 꽝찌성 동하시를 중심으로 DMZ 유적지를 돌아봅니다. 우리나라는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베트남 DMZ 유적지 방문이 우리의 이런 노력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버스는 한강을 우측으로 끼고 동북쪽으로 하이반 터널을 통해 월남전 중 베트남공화국의 최북단도시 동하에 도착 했다. 정오 12시, 무엉탄 동하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12시45분 호텔을 출발 오후 1시50분 목적지 빈목터널에 도착 했다. 비가 주적주적 여전히 내린다.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먼저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삶과 죽음'이란 명제의 조각 작품이 걸렸다. 공중에서 폭격을 가하는 비행기와 그 밑에서 폭격을 피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양민들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명문장이다.

▲ 죽느냐 사느냐(당시 그곳 사람들의 전쟁 속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1966년 미국은 북부베트남에 엄청난 규모의 공중폭격을 했다. DMZ 바로 북쪽에 있는 빈목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폭격을 피해 땅굴을 파고 숨어들어야 했다. 1965년부터 18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거대한 베트콩 기지가 건설됐고, 주민들은 이 지하 동굴에서 1972년까지 생활했다. 빈목터널은 이 일대 주민 600여명이 살았던 공간으로 이곳에서 새 생명 총 17명이 태어나 현재 성인이 되어 살고 있다 한다.

이 터널을 보면서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방공호를 떠올렸다. 38선이 가까운 나의 고향 한탄강 북쪽 연천지역은 당시 미국의 비행기 폭격으로 전 시가지가 초토화 됐고, 단지 당시의 건물로 현재 역전 물탱크만 남아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17명의 생명이 태어났다니... 생명의 강인함을 다시 느꼈다.

해변과 내륙

쪽으로 통하는 문을 번호를 매겨 짝수는 내륙, , 홀수는 해변으로 통하게 했다 한다. 주위가 대나무 숲으로 잘 가꾸어져 마치 죽림원(竹林園)에 들어온 듯 한 느낌이다. 제5호 터널로 들어갔다. 겨우 사람 한사람 통과 할 좁은 통로인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니 초입에 보초소가 있고 안으로 더들어가니 좌우로 생활 살림 공간이 있다.

▲ 빈목터널 입구

 

▲ 터널 내부

나는 이 땅굴(터널)을 보면서 우리나라 땅굴을 떠올렸다. 제1, 제2, 제3 땅굴 말이다. 베트남의 땅굴이 비행기 폭격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라면 우리나라 땅굴은 게릴라전을 위한 북한군의 급습용 지하 군로(軍路)다. 게릴라전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비목터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양민들이 전쟁을 피해 동굴 속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살았다는 무릉도원(武陵桃園)을 노래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올리며 빈목마을 나왔다.

다음 찾은 곳은 벤하이강을 가로 질러 놓은 히엔르엉교이다. 1954년 7월에 북위 17선을 휴전 이행을 위한 잠정적 군사경계선으로 정하여, 2년 이내에 평화적으로 재통일하기 위한 자유로운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협정을 맺고, 벤하이강의 남북 각각 5km 너비의 비무장지대를 정하였다. 북위 17도선은 벤하이강의 하구 부근을 지나며 하구 이서(以西)의 흐름은 엄밀하게는 북위 17도 선보다 약간 남쪽으로 휘어져 있으나, 대체로 북위 17도선과 합치하기 때문에 강을 잠정경계선으로 하였다. 그 후 고딘디엠의 베트남공화국이 성립하므로 벤하이강은 남북베트남의 국경이 된 채 베트남공화국의 패망 때까지 이르렀다.

이 다리는 과거 프랑스 군이 물자보급을 위해 벤허강 위에 세운 다리로 남북이 갈리면서 분단을 상징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21년을 보냈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프랑스군이 철수하던 1954년부터 베트남 전쟁이 끝난 1975년까지 다리 중앙에 경계선이 그어져 남북이 서로 대치했다. 다리는 공중 폭격으로 붕괴되었다가 전후에 복구했다. 다리 중간의 분단 경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파란색으로 칠해 확연히 구분했다.

▲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이 다리를 보면서 나는 철원의 승일교를 떠올렸다. 승일교는 1948년 8월부터 공산당 치하에서 철원 및 김화지역 주민들이 노력공작대라는 명목 하에 총동원되어 다리를 시공해 오다가 6.25 동란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며 그 후 1958년 우리정부에 의해 완공되었다. 아치의 크기 등 교각의 구조체가 외관상으로 구별될 정도로 다리의 중심부에서 남북으로 각각 다르게 시공되었으며 , 남북분단과 전쟁의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조형미가 돋보이는 교량이다. 이름을 승일교라 한 것은 남쪽의 이승만(李承晩)의 '承'자와 북쪽의 김일성(金日成)의 '日'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히엔르엉교를 뒤로 하고 다시 차는 평화기념관으로 달렸다. 넓은 평원의 전적지에 조성된 평화기념관은 마치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 전적지를 연상케 했다. 앞에 분향대가 있고 돔 안쪽에 종과 북을 매달았다. 북과 종을 울려 널리 평화를 알리려는듯했다. 백마고지 전적지의 평화의 종, 그대로다.

다시 돔을 나와 층계로 올라가니 충혼탑이 있다. 전몰 용사들의 충혼을 비는 현충탑이다. 잠시 묵념을 하고 내려 왔다.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없기를 바라며 한때 이곳 베트남 사람과 대치해 싸웠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베트남 해설사의 말이 자꾸만 귀전을 울린다. 멀지 않아 그들은 아시아의 용으로 승천할 것이다.

베트남 DMZ 지역을 돌아보고

한국과 베트남은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과거 분단국가로 두 나라가 모두 비무장지대인 DMZ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갈려 있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분단 상태에서 대치국면에 있다.

한국도 그동안 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동안 통일은 남북 사람들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남북의 서로 상반된 이데올로기에 묶여 답보 상태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의 설립 취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한겨레평화연구소는 '평화통일'이란 대전제하에서 통일 방안을 연구 제시해야 한다. 이번 베트남 여행이 단순한 관광여행이 아닌 'DMZ역사평화 기행'이라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대안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권혁철 소장은 "베트남 DMZ 유적지 방문이 우리나라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노력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 이번 여행에서 연구소는 얼마만 한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을까? 이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전적지를 돌아본 뒤늦게 서주석 전국방부 차관의 베트남 관련 발표가 있어 베트남 역사, 지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서차관님의 노고에 감사한다. 사실 이번 여행을 통해 개인적으로 젊은이들의 통일관을 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허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기행은 전반적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앞으로는 여행사가 주체가 아닌 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주도면밀한 기획 하에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동안 3박5일 함께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을 보살피느라 애써주신 권혁철 소장님, 그리고 박준석, 박성연 두 분 가이드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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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9. 김포 하늘빛마을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적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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