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학의 '쉬운 역학(易學)' 104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우주 세계를 포용할 만한 단어는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하지요. 새삼 거룩하고도 따뜻하고도 웅장한 말 같네요. 서양에서 사랑의 개념에 대한 분석은 논리적이고 분법적이네요. 모든 학문 철학 영역이 다 그러하네요. 여기에서는 한자(愛), 우리말 한자어(思量), 영어(love)를 통해 단상(斷想)을 소개해 보려 하지요.

먼저 한자권에서 사랑은 애(愛)로 표현했네요. 친(親)이라는 글자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1. 사랑 애愛

1) 갑골문에서는 회의자로 기旡 + 심心, ‘旡는 머리를 돌리어 보는 사람’을 본 뜬 상형자로 돌아다보는 마음의 모양에서 ‘어여삐 여기다’의 뜻이고, 쇠夊는 발의 상형자로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향해 가서 미치다’의 뜻을 나타낸다지요.

2) 속설에서는 흔히 자식을 감싸 안은 사랑으로 ‘손톱爫(조)으로는 덮어冖(멱) 감싸고 마음心(심) 속에서 서서히攵(치) 일어나는 사랑’으로 해석을 하기도 하지요. 또한 마음(심心)을 주고받는(수受) 사랑이라고도 하네요.

▲ 사진출처(2020년 1월 7일자 한겨레신문)

2. 어버이 친親, 친할 친親

1) 갑골문 어원에서 본래 의미를 살펴보면 왼쪽의 立과 木(未) 곧 ‘진’은 나아갈 진進과 통하여 ‘나아가 이르다’의 뜻으로 ‘나아가 돌보다見, 가까이 하다’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지요.

2) 3강5륜(三綱五倫)의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에서도 사랑이라는 의미를 새겨 볼 수 있지요.

3) 속설에서는 나무木 위에 올라서서立 자식이 날이 저문데 왜 오지 않나를 보고 있는見 간절한 어버이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연재물 39회)

두 번째로는 우리말 한자어 사량(思量)>사랑이지요. ‘한없이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넓고도 넓은 말이네요.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아미타(무량수. 무량광)를 연상(聯想)하게 하네요.

세 번째로는 영어 love이지요. ‘live생명, object대상, verity진실, excitement흥분 감동’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 보았지요. 그리고 사랑의 종류를 1)에로스 - 남녀 간의 사랑, 2)필리아. 필레오 - 우정. 형제애. 동성끼리의 사랑, 3)스톨게 - 부모와 자식의 사랑. 본능적인 조건 없는 사랑, 4)아가페 - 초월한 무한한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 할 수 있는 초월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분석하네요.(네이버 자료)

 

<사랑을 지켜가는 아름다운 간격>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한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는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말라

시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사랑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상대를, 생명체 무생명체를, 인류를, 세계를, 우주를 사랑하는 말이네요. 이것은 단계별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처럼 어느 정도 때가 되면 동시에 작동시키는 고귀한 마음의 성정(性情)이네요. 너무 몰랐네요. 너무 억울(抑鬱)하네요. 통곡(痛哭)이라도 하고 싶네요. 자기만을, 남녀 간의 사랑만을 쫓는다는 것은 이기주의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네요.

그 동안 자신이나마 얼마나 사랑했을까? 스스로를 우월하게 또는 열등하게 생각하며 얼마나 학대를 해 왔던가? 얼마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고달프고 병들게 만들었을까? 얼마나 자신을 버림받게 하고, 치욕 되게, 환멸을 느끼게, 죄가 크다고 느끼게, 외롭게, 눈물 많게 만들었을까? 결국은 자신을 증오(憎惡)한 것이었네요. 그러고도 타인을 사랑한다고 떠벌여 왔네요.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살게 해 주는 것이라지요.(愛之欲其生. 論語). 공자의 사상 철학을 인(仁)이라 하지요. 공자님께서 <역경易經>이라는 점서(占書)를 위편삼절(韋編三絶) 하시고 ‘태극원리’를 도통(道通)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정치에서부터 인간, 생활 윤리까지 말씀을 풀어 놓으신 것이 <논어>라는 책이지요. <역경>은 단순히 점치는 책이 아니고, 우주원리를 꿰뚫은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이 ‘태극 원리’는 음양의 원리이지요. 남녀, 사랑, 상하, 노사, 선후배, 인간의 원리이지요. 상생, 자연, 관계, 우주의 원리이지요,(연재물 2회). 우주의 고동 소리지요. 불교 철학에서는 모든 선행을 하더라도 ‘바라거나, 구하거나, 기대하지 말라(금반야바라밀경)’ 하지요. 바이블(성경)에서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태복음 5장 33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장 44절).’하네요.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네요. 물론 진리의 입장에서(본체면) 하는 말이기는 하지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걸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 전서 13장-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과 세계와 우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네요. 감사할 줄 알면, 기도하게 되고, 사랑할 줄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모든 무생명과 관념 속의 대상까지도 사랑하고 경배하는 사람들의 심성(心性)은 어떨까요? 그들의 영혼의 세계는 어디를 드나들고 있을까요? 그들의 사유의 깊이는 얼마나 심원(深遠)하고 원대(遠大)하고 유현(幽玄)할까요? 신을 모르는 우리 민족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오, 사랑! 바라거나, 구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참고자료> 사랑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원수도 없다. (공부에 관한 글에서) 어둑거리는 인생의 변두리를 하염없이 거니는 그 여윈 마음의 조바심. 사람의 속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거리의 사람들의 의젓한 걸음걸이는 눈물겨운 희극이다.

연애에도 천재가 필요한가? 연애를 양심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양심을 가지고 연애를 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아니, 가장 성숙한 사람이다. 지옥을 통과해야 천국에 이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전유(專有)하려는 욕구를 가졌지만 동시에 행복까지도 남에게 나눠주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졌다. 여자를 여자로, 꿈으로 창조하는 것은 남성의 정욕이다. 견성(見性)이란 ‘낡은 진리를 독창적으로 달득(達得)함’이 아닐까….”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공부가 끝난 사람 아라한(阿羅漢)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촌락에 있어서나, 숲 속에 있어서나, 평야에 있어서나, 고원(高原)에 있어서나, 저 ‘아라한’이 지나가는 곳, 누가 그 은혜를 받지 않으리(在聚在野, 平野高岸, 應眞所過, 莫不蒙祐)”

이어지는 김달진의 단상, “내 몸을 완전히 기댈 만한 든든한 벽을 가지고 싶다. 참마음으로 나를 안아주는 크고 안전한 가슴을 가지고 싶다. 나를 속이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싶다”

사랑의 뜻은 광활하지 않다. 사랑은 말하고 싶음, 말할 수 있음이다.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말할 수 있음과 없음의 기준은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적’을 위해 나를 위해 감출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해자를 보호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괴로움이 있다. 이런 고통은 낫지 않는다.

최근 내 주변에 이런 사건이 여럿 있었다. 당사자도 아닌데 내가 더 망가졌다. 외양은 시국 사건이지만 내 생각엔 원인도 사랑이요, 해결책도 사랑이다. 지혈되지 않는 응급하면서도 오래갈 상처에는 아라한의 사랑보다 당장의 사랑이 필요하다. 하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공부가 끝난 사람을 뜻하는 “아라한의 은혜”도 아무에게나 비추겠는가.

나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벽, 나도 믿기 어려운 경험을 당연한 듯 믿어주는 사람, 내 안의 고통을 비워줄 수 있는 사람. ‘진정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이 사랑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 첫째다. 상대방의 경험에 대한 수용력, 호기심을 갖지 않는 예의, 취약한 상대방을 조종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사랑. 깊고 신중한 배려 속에 나를 넣어주는 사랑이다.

갈증과 망상 속을 헤매다가 옛 동아시아 현자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발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주십시오” 간청했다. 그가 말하길 “스스로 지도자가 되십시오”. 맞다. 사랑을 구하는 것보다 행하는 길이 빠르다.<법구경에서>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편집자 주] 한겨레 주주인 김상학 선생님은 현재 대학 교육원에서 주역, 노자, 장자, 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고, 한민족의 3대경서를 연구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김상학 주주통신원  sara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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