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저녁 새 둥지 문화공간온에서 한겨레온 전국운영위원회가 열렸다. 필자는 지방에서 조금 일찍 상경하여 새 둥지를 확인한 후, 바로 뒤편에 있는 인사동 거리로 산책을 나섰다. 재담 좋은 허 위원은 공사다망하여 전화가 불통이고, 한겨레온의 기둥이요 지붕인 김 위원은 선약으로 올 수 없다하니, 홀로 거리 투어에 나선 것이다. 홀로인지라 평소 가보지 못한 골목골목을 여유롭게 다녔다. 숨겨진 곳도 많았다. 투어를 마치고 이제 막 회의장으로 향하려던 차였다.

필자는 눈을 높고 멀리 들어 휘적휘적 걷기에 가까운 곳은 거의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에 십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몸 옆에서 감이 범상치 않은 인기척이 났다. 무슨 일인고 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묘령의 두 여인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어라~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놀란 가슴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니, 소년 시절에 많이 읽었던 중원대륙 무협지에 나온 ‘소저’ 생각이 났다.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바로 쳐다보기에도 시린 블랙 싱글 옷차림이었고, 찬 겨울바람에 더욱 돋보이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남자의 심금을 저리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어깨 선까지 흘러내린 검은 머리는 눈을 현혹하였고, 또렷한 이목구비는 남심을 훔치고도 남을만했다. 어정쩡하고 멀뚱한 필자에게,

▲ 묘령의 여인 1. 사진을 촬영치 못했기에 인터넷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편집했다.

 

“안녕하세요?” 또렷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필자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 예~, 안녕하세요?”라고 어벙하게 답하니,

“잠깐 말씀 좀 나누실까요? 혹시 큰 아드님이신가요? 그리고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을 하셨나요?”라고 의외의 내용을 묻는다. 표정이 사뭇 진중하다. 필자는 우물쭈물 확답하지 못하고,

“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그녀는 얼굴을 바로 들고 필자를 쳐다보면서,

“고생이 많으셨지요? 인생을 살면서, 또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혹시 주역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그에 준해서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젊은 여인이 주역을?’ 필자는 심중에 의문이 생겼다. 그리하여 의혹의 눈으로 보면서 좀 뜸을 들인 후에,

“음~ 그러시군요? 그런데 주역은 어떻게 시작되지요?”라고 물었다. 그녀들은 다소 예상 밖의 질문인지 당혹해하면서,

“주역을 교재로 해서 공부한 것은 아니고요. 그런 바탕에서 말씀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예~ 그런데 저는 이제 석양입니다. 거의 다 살았지요.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지금으로 족합니다만...”라고 말한 후 그녀를 바라보니, 짠하고 안쓰러운 맘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스쳐가는 쓸쓸하고 황량한 기운을 보니 더욱 그랬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사슴처럼 초췌해 보였다. 무엇인지 모를 아픔과 비밀이 숨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잘 아시듯이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역에 나타난 것처럼 요. 시간 되시면 찻집에 가서 자세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말하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필자를 쳐다본다. 순간적으로 필자는 ‘안 돼, 이쯤에서 피해야 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빠지겠어.’라는 생각이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 그리하여

“알겠습니다만, 제가 곧 회의 참석을 해야 합니다.” 말하고 급하게 돌아서니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 묘령의 여인 2. 확실치는 아니하나 이런 모습도 보였다.

필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러면서 심중에 ‘호랑이도 아니고 폭력배도 아닌데... 쯧쯧’ 자조하면서 죄를 짓고 도망하는 느낌이었다. 생각하기를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어찌하여 필자에게 접근했을까? 필자가 처음은 아니었겠지? 그렇다면 필자가 어리바리하게 보였을까? 그녀들이 요리하기에? 의심스럽다.’ 하지만 다시 생각나는 것은 ‘그녀들을 외면하고 떠나온 것이 잘 한 것인가? 삶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필자 같은 사람을 붙들고 번화한 거리에서 대화를 시도했을까? 부끄럽고 자존감이 상하기도 했을 텐데. 차 한잔 마시는 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라고... 허겁지겁 도망치듯이 피했단 말인가? 그녀들이 60대 중후반인 필자를 어찌하겠는가?’

사내대장부는 고사하고 졸장부도 아깝다. 자신의 권익과 편리만 쫓는 쪼잔한 소인배로다. 어리고 여린 그 여인들이 뭐가 무섭다고, 참으로 한심하구나. 내 모습이 오히려 측은히 여겨졌다. 다음에 만나면 여유롭게 차 한 잔 나누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어야겠다. 또한 만약에 그녀들이 곤경에 처했다면 상황에 따라 다른 길로 안내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게 조금 더 살아온 자의 책임과 의무가 아니겠는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못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으며 마음이 찜찜하고 어두워졌다. 그렇게 인사동 문화의 거리는 필자를 요리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태평 편집위원  tpk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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