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 남만주 정세와 독립운동 정치 지형

송암 오동진 장군이 활동했던 1920년대 남만주 정치정세를 규정한 내외적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통합임시정부인 상해 임정이 갈등 끝에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국민대표회의를 전후한 임정의 갈등과 분열은 고스란히 남만주 독립운동의 분열과 연동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하나는 외적 규정력으로 미쓰야 협정(1925)을 들 수 있다. 미쓰야 협정은 남만주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외부 요인으로 1920년대 남만주 정치정세를 강력하게 규정하였다.

먼저 국민대표회의(1923)를 전후한 상해 임정의 분열과 갈등이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자.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기호파와 안창호의 서북파 간 대립과 갈등이 상존했다. 거기다 외교독립론 대 무장투쟁에 기초한 독립전쟁론의 대립과 갈등도 극심했다. 1919-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는 미국에 대해 독립을 청원한 이승만을 두고 '대가리가 썩은 놈'이라고 비판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 윤자영, 이동휘를 비롯해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여운형과 안창호의 서북파. 그리고 남만주 통의부 중앙간부 김동삼, 여준, 이탁, 이진산은 이승만 퇴진을 전제로 임시정부를 새롭게 개조하려고 노력했다. 김동삼은 국민대표회의 당시 의장을 맡아 이승만 불신임을 전제로 행동했던 개조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강대국에 대해 독립을 구걸, 청원하는 것도 모자라 이승만은 명예욕에 사로잡혀 자신을 호칭할 때 'president'를 고집했다. 왕자병에 걸린 이승만의 독선적 행태는 분명 상해 임정의 분열과 갈등에 심각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거기다 복벽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으로 독립운동 이념 상 분열과 함께 사회주의 계열 내에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 갈등은 자유시 참변뿐만 아니라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919년 3・1혁명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탄압과 학살로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3・1혁명의 뜨거운 열기와 참담한 희생을 딛고 들어선 통합 임시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였다.

그러나 상해 임정은 전 민족적 염원인 민족해방에 대한 비전과 항일독립운동의 통일된 전략을 보여주질 못한 채 분열과 갈등을 드러냈다. 항일독립운동 전선에서 통일된 방략을 제시하고 여타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 역량을 전혀 보여주질 못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1919년 11월-1920년 9월 이동휘 국무총리 내각에서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하며 국제정세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김립이 1922년 2월 상해 거리에서 피살된다. 경무국장 김구가 보낸 상해 임정 경무국 소속 비밀 경호원 노종균, 오면직에 의해 머리와 가슴에 무려 12발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한다.

이동휘의 심복, 김립은 1차 세계 대전 직후 조성된 파리강화회의가 미, 영, 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이권 다툼이라는 본질을 꿰뚫었던 전략가로 국제정세에 탁월한 이론가이자 전략통이었다.

따라서 김립은 파리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허구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식민지 약소민족 해방운동을 약속한 레닌의 소비에트 혁명 정부와 외교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혁명 정부로부터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받고 독립운동자금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받도록 만든 인물이 바로 김립이다.

▲ 백범 김구에게 '파렴치범'으로 피살된 항일독립투사 김립(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 인물).
그는 차관급인 국무원 비서장으로서 외무차장, 내무차장, 법무차장, 재무차장, 군무차장 등 각부 차장(차관)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이자 상해임정의 실질적 업무인 인사와 재무를 통괄했던 인물이었고 국제정세에 매우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걸출한 혁명가였다.
(출처 : 독립기념관)

그러나 김립은 1922년 2월 백범 김구에 의해 '독립운동자금을 유용한 파렴치범'으로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다. ‘김립’ 피살 직후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일제 외무대신 앞으로 「공산당 수령 김립 살해에 관한 건」이라는 기밀문서를 타전했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는 김립을 '공산당 수령'으로 그리고 배일흥한(排日興韓)의 요주의 거물로 ‘김립 피살 사건’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1922년 2월 김립 피살 이후 항일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상해 임시정부 조직과 진로를 놓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대한 요구가 들끓었다. 여운형, 안창호 역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촉구하는 연설을 주도했다.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국민대표회의는 70여 회 넘게 개최되었다. 조선, 만주, 중국, 러시아 연해주, 북미주 등 전 세계를 통틀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단체 대표자들 4백 명이 각 지역과 단체의 대표성을 띠고 상해로 집결했다.

따라서 국민대표회의는 향후 항일 독립운동 역량을 임시정부로 총집결시킬 수 있는 절체절명의 중대회의였다. 그 결과에 따라 상해 임정의 위상 또한 3・1혁명 당시 조선 민중이 흘린 핏값에 상응하는 위대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3년 상반기 내내 상해 임정 조직 개편을 두고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된 채, 논쟁과 갈등으로 세월을 허송했다. 조선 민족 전체의 독립운동 단체를 대표하는 가장 규모가 큰 최초의 회의이자 마지막 회의였지만 분열과 갈등만 낳은 채 무산되었다.

당시 수백 명이나 되는 항일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이 6개월 동안 묵었던 숙식비는 모두 김립이 주도해 러시아 혁명정부로부터 들여온 독립운동 자금으로 충당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각기 임정을 고쳐서 다시 쓰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허물어뜨리고 새로이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창조파로 양분된 채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백범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정 고수파는 그 틈을 비집고 주도권에 도전한다.

쇠락해져 가는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된 모습만큼 1920년대 초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 역시 이념적으로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간 갈등이 존재했다.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는 1911년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이 건설한 준정부적 자치기구 ‘경학사’와 독립무관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으로부터 시작한다.

1911년 류하현 삼원보 신한촌에 건설된 독립군기지 자치행정기구인 ‘경학사’는 1년 만에 해체되고 ‘부민단’으로 계승된다. ‘부민단’은 1919년 4월 ‘한족회’로 이어지고 ‘한족회’는 1919년 11월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됐다. 김동삼이 주도한 '백서농장'은 신흥중학교 1-4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1919년 5월 ‘한족회’와 함께 ‘서로군정서’로 개칭된다. ‘서로군정서’는 차츰 무장투쟁 우선주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서로군정서’는 1920년대 초 대한독립단(전덕원, 채상덕), 한족회(김동삼), 보합단, 광한단 등 기존 항일조직을 해체하고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1922년 6월 환인현에서 대동단결을 표방한 통합운동단체 ‘대한통군부’를 창설했다.

‘통군부’는 1922년 8월 23일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대한정의군영, 평안북도독판부, 대한광복군영 등 8개 단체 71명이 참가해 열린 '남만한족 통일회의'를 개최했다. 수일에 걸친 회의를 통해 김승만을 회장으로 하는 ‘통의부’로 조직을 확대하고 명칭을 바꿨다. ‘통의부’는 무력투쟁과 자치행정을 겸하는 남만주 지역 군정부(軍政府) 성격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통의부’ 역시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간 이념 갈등과 조직 인선에 불만을 품은 복벽주의자들이 이탈하면서 항일독립운동 전선에서 단일한 통일 대오를 형성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1920년대 초 통의부-참의부-정의부 분열에는 당시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속에서 분열과 통합이 진행된 탓도 있다.

먼저 복벽주의 항일독립지사들이 ‘통의부’를 이탈하는 과정에서 양기탁으로 대표되는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전덕원으로 대표되는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 간 불화와 갈등이 폭발했다. 비극이 발생한 시기는 1922년 10월 14일 야심한 밤이었다. 분열과 갈등의 주요 요인은 이념 갈등과 조직 인선에서 소외된 전덕원, 채상덕 등 복벽주의자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 항일독립지사들은 대한독립단 단원 20여 명을 이끌고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살해하고 양기탁, 현정경 등 통의부 선배 간부들을 구타, 감금한 사건이 발생했다.

복벽주의자 전덕원(의군부 군사부장)을 위시하여 박장호(의군부 총재), 채상덕(의군부 부총재), 오석영(사령장), 김유성(정무부장), 박일초(대대장), 김평식 등은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에서 통의부를 이탈하여 새롭게 ‘의군부’를 조직했다. ‘의군부’의 주력은 통의부 제4중대 병력으로 전덕원이 장악한 의용군 부대였다.

전덕원은 유림의병장 유인석의 문하생으로 대한제국의 황실에 충성하려는 인물로 항상 상투를 틀고 의병대원증을 소지하고 다녔던 인물이다. ‘통의부’에서 이탈한 전덕원의 ‘의군부’는 공화정체 '민국'을 부정하고 황제 연호인 '융희' 연호를 사용했다. 복벽주의 전통을 계승한 탓이다.

김동삼 등 통의부 지도부는 분열 초기에 통의부에서 이탈한 복벽주의자 전덕원의 '의군부'를 대상으로 다시 통합을 추구했다. '의군부' 전덕원과 화해하고 재통합을 추진하기 위하여 전덕원과 제일 친한 이천민(통의부 군사부장)을 내세워 화해를 시도했다. 그러나 통합 노력에 대한 성과가 없자 통의부 지도부는 3일간 열린 통의부 지방대표자 회의 결정에 따랐다.

지방대표자들은 전덕원 등 '의군부' 이탈 세력이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살해하고 통의부 지도부 선배 항일지사들을 구타, 감금한 사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행위'라고 보았다. 이후 통의부 지도부는 전덕원 등 '의군부'이탈 세력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적극적인 토벌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1922년 10월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 살해사건 이후, 공화주의 계열 통의부 지도부는 전덕원을 제거하기 위해 12월 의군부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그러자 통의부 지도부는 1923년 1월 군사부장 이천민 지휘 하에 120명 무장병력을 내세워 복수전을 시도하며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전덕원의 의군부 병력은 3000명을 넘어서며 그 세력이 더욱 커져 오히려 통의부 본부 소재지인 마권자(馬圈子)까지 위협했다. 심지어 의군부는 유격활동을 통한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해 평안북도 의주군 청성진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부장 우치다(內田能孝)를 사살하고 면사무소와 세관을 깡그리 불태우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의군부 유격대(대장 이경일)는 이후 전화선을 자른 뒤 군중을 동원해 밤새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의군부의 항일유격대 투쟁은 빛나는 전과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국내진공작전을 마치고 의군부 본대로 귀대하던 도중 통의부 무장 병력과 맞닥뜨리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통의부 김석하 부대의 공격으로 의군부 유격대장 이경일은 살해되고 군자금과 노획한 무기를 탈취당한 것이다. 동족 간 그것도 항일독립군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적인 유혈상잔이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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