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동진의 항일무장투쟁과 정의부 활동

오동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은 1920년 대한광복군 총영장 시절로 시작한다. 대한광복군 총영장으로 추대된 오동진 장군은 100명이 넘는 미국 상하 의원단 일행이 동양을 시찰하면서 조선에 들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하여 7월 대한광복군 총영 소속 대원들을 신의주, 평양, 서울 등 3개 지역 결사대로 나누어 조선에 침투할 거사를 계획했다. 3·1혁명이 잔혹하게 진압되었음에도 일제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고 조선 민중은 여전히 불같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는 애초에 권총과 전단지 4만장, 그리고 폭탄을 휴대하고 7월 15일 총영을 출발했다. 안경신 의사가 속한 총영 결사대는 압록강을 건너 무사히 국내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평안북도를 지나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평안남도 안주에서 불시 검문 중인 일경과 맞닥뜨렸다. 신분이 노출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제국 경찰 경부 궁동종삼랑(宮東宗三郞) 1명을 사살하고 위기를 벗어났다.

▲ 오동진 장군이 세운 대한광복군 총영 소속 결사대원으로 그리고 임신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무력으로 응징했던 여장부 안경신 의사 (출처 : 국가보훈처)

안경신은 평양 지역 결사대로 평양경찰서 폭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폭탄 심지가 비에 젖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다. 황해도 해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 지점 폭파도 헌병대 경계가 삼엄하여 실패하였다.

대신 신의주 지역 결사대는 신의주역 철도호텔을 폭파했고 선천경찰서와 선천 군청을 폭파했다.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한 서울 지역 결사대는 사전에 발각돼 피검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모두 대한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이 계획한 거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동진 장군과 여장부 안경신은 대한청년단연합회 활동 당시 이미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안경신은 일찍이 가정적으로 감리교 신자로서 독실한 기독교 정신과 신앙생활을 해온 집안에서 생활했다. 3·1혁명 이후 안경신은 감리교가 주축인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에 가입하여 군자금 업무 등 재무부 일을 도맡았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드러나면서 안경신은 일경에 쫓기듯이 만주로 망명을 단행했다. 망명 이후 안경신은 오동진 장군의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했고 '대한광복군 총영' 제2대로 편입하였다. 이후 거사에서 평양 지역 결사대로 자원하였다.

따라서 안경신이 1920년 8월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하고 일제경찰 2명을 폭살시킨 투탄 사건도 대한광복군 총영 오동진 장군과 관련이 매우 깊다. 대한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이 보낸 결사대원 중 한 사람이 여장부 안경신이었기 때문이다.

안경신은 임신한 몸으로 치마에 폭탄을 숨긴 채 국내로 잠입해 평양에 도착한 날이 1920년 8월 1일이었다. 그리고 8월 3일 밤 9시 50분경,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옆 경찰서 건물을 동시에 파괴하여 일경 2명을 처단함으로써 평양 시내를 일순간 충격에 빠트렸다.

이 사건으로 안경신 등 결사대원 대부분이 피검돼 재판을 받았는데 오동진 장군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오동진 장군은 식민지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을 이끌고 국경지역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친일 밀정을 처단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펼쳐나갔다. 일제 밀정이자 뤼순조선인회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 처단 지시나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친일매국노인 배정자 처단 지시 역시 오동진 장군이 내렸다.

당시 대한광복군 총영이 일제와 치른 전투 상황을 보면 그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1921년 6월 26일 광복군 총영 오동진 장군 일행은 관전현(寬甸縣) 누하(漏河) 산중에서 일경과 교전했다. 그런가하면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오동진 장군의 광복군 총영은 벽동경찰서 삼서주재소, 삭주군 순사주재소, 학회주재소, 후창군 동흥주재소, 무산군 장삼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삭주군 관회면사무소, 소귀면사무소, 초산군 영림창 사무소를 파괴했고 친일관리인 후창군수와 자성군수를 처단했으며 문학빈, 공주선, 이능학을 평안북도 벽동군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오동진 장군은 양기탁, 김동삼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된 '대한 통군부'를 결성하였고 두 달 후 통의부로 확대, 발전시켰다. 오동진 장군은 군정부(軍政府) 성격인 통의부에서 교통부장, 재무부장, 민사부장을 담당했다.

▲ 대한제국기 영국인 베델과 함께 항일언론지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한 양기탁은 <독립협회>,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망명 후 대한 통의부-정의부-고려혁명당-국민부-임시정부 국무령 활동을 통해 68세로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순국 직전까지 항일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은 열혈독립투사였다. 그의 외아들 양효손은 금광왕 최창학의 사위이다. (출처 : 독립기념관)

1924년에는 통의부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남만주에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을 보호하고 민족반역자들이 세운 일본민회, 보민회, 일진회를 파괴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통의부는 내부 분열과 갈등이 심했다. 명색이 통일기구로서 면모를 지닌 통의부였지만 지향하는 이념과 조직 인선과정에서 이견과 갈등이 첨예하였다. 통군부 시절에는 복벽주의 성향이 강한 채상덕, 이웅해, 전덕원 등이 조직 운영에서 주도권을 발휘했지만 통의부로 개칭되면서 공화주의 성향을 지닌 양기탁, 김동삼, 오동진, 현정경 등이 지도부로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통의부 중앙지도부는 공화주의적 성향을 표방한 반면 통의부 무력기반인 의용군 중대병력은 복벽주의 성향이 강렬했다. 태생적으로 통의부 조직 자체가 이원적 형태를 띤 조직체계로 분열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통의부 복벽주의자들이 이탈하여 의군부(1923. 2)를 결성하고 통의부와 의군부 간 대결과 내전이 격화되는 속에서 중립을 지켜오던 의용군 중대병력이 통의부를 이탈해 참의부(1923. 6)를 결성했다.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 중앙지도부로서 여타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정의부(1924. 11)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24년 11월 정의부 창설 당시 오동진 장군은 정의부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생계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1925년에는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다. 즉 정의부 사령관 오동진 장군은 압록강 국경을 넘나들며 평안북도 의주경찰서와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국경지방 일제 식민통치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대표적인 국내진공작전으로 평안북도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와 외연주재소를 습격한 사건과 벽동경찰서의 여해주재소와 차련관주재소를 공격한 전투를 들 수 있다. 특히 1925년 3월 19일 초산경찰서 습격 사건은 한 달 전 고마령 전투 당시 일경에 의해 독립군 간부들이 피살된 사건에 대한 복수전이었다.

정의부 제8중대장 김석하는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제6중대 3소대장 김정호는 외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제6중대장 정이형은 압록강을 건너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를 습격해 경찰 3명을 사살하고 경찰주재소를 전소시켰다.

▲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 선생은 평안북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항일무장투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18년에 이르는 최장기수로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이규창이 정이형 선생의 맏사위로 이회영과는 사돈 간이다.

(출처 : 국가보훈처)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었는데 오동진 장군이 군사위원장이고 정이형, 문학빈, 양세봉 등 주로 평안도 출신들이 소대장과 중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과 친일주구와 친일부호 처단, 그리고 독립운동 선전공작활동, 일본인 관리 사살과 적 기관 방화공작이 주된 임무였다.

오동진 장군의 국내진공작전은 국경 일대 일제 식민당국을 한순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식민통치의 첨병 일제 경찰을 사살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관공서를 파괴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친일 주구배와 밀정들을 처단했다.

그것은 정의부 활동 가운데 일상적인 임무였다. 1920년대 오동진 장군은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일경과 수백 차례 교전을 벌였고 관공서 143개소를 불태우거나 파괴했으며 일경과 관공리, 밀정, 친일부호 따위 914명을 처단했다.

오동진 장군이 1920년대 대한광복군 총영과 통의부-정의부 시절 보여준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역사였다. 이는 거꾸로 일제수뇌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투쟁으로 일제 총독부 고위관료들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다. 따라서 일제 식민당국은 10만 원(오늘날 화폐가치 13억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오동진 장군을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1926년 4월 오동진 장군은 정의부 양기탁, 현정경, 고활신, 정이형과 함께 정의부를 주축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고려혁명당을 창건했다. 천도교 혁신파 김봉국, 이동락과 형평사 운동의 이동구, 송헌,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온 공산주의자 주진수, 최소수, 이규풍과 함께 1500명 당원을 거느린 고려혁명당을 결성했다.

오동진 장군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이자 고려혁명당 군사위원장으로 맹활약을 하였으나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 위원 이동락이 체포되면서 고려혁명당 관련자 명단이 노출되었다.

이후 고려혁명당 핵심 간부들 20여 명이 일제에 차례차례 피검되었고 오동진 장군 역시 1927년 12월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들어 체포되었다. 오동진 장군이 일경에 피검되면서 고려혁명당은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해체 수순을 밟았다. 정의부 역시 세력이 약화되면서 3부 통합운동으로 위기를 돌파하려고 노력하였다.

오동진 장군이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든 것은 남만주 한인사회 내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개선 그리고 민정활동과 관련이 깊다. 정의부는 성립 초기 하얼빈 이남 길림성과 봉천성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17,000여 가구, 87,000여 명에 이르는 이주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였다.

오동진 장군을 비롯한 정의부 지도부는 무장투쟁과 함께 한인사회 경제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주력했다. 이주 한인들이 생활하는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류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과 길림성 화전현에 화성의숙을, 그리고 흥경현 왕청문에 화흥중학, 삼성중학을 세워 혁명인재 양성과 함께 독립군 무관을 배양했다. 그리고 정의부 군 장교들 가운데 일부와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해 광동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 무관학교에 파견 형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정의부는 야학과 강습소를 운영하고 1926년에 『대동민보(大同民報)』와 『전우(戰友)』를 발간하여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독립전쟁이 지구전의 성격을 띠고 장기적인 전망을 요구받자 정의부는 남만주 한인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 항일 독립운동역량을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정의부는 안창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농민호조사' 사업을 실천했다.

오동진, 양기탁, 김동삼 등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이 '농민호조사' 사업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한인사회 농민생활을 향상시키고 생활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근대 농법의 도입과 근대 교육의 실현, 그리고 산업을 장려하여 한인사회에 새로운 농촌 모델을 뿌리내리고자 하였다.

농업과 상업 활동을 발전시켜 이주 한인의 생활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것은 장기전에 대비하는 것이자 항일독립운동 단체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하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농업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 군벌당국과 교섭을 벌여 황무지와 정전을 공동으로 사들여 신안촌(新安村)농장, 삼일(三一)농장을 경영했다.

나아가 농민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조직하고 농기구 대여와 공농금(公農金) 대여를 시행했다. 또한 합자(合資)에 기초한 공동사업으로 흥업실사(興業實社)를 설립하는 등 식산흥업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활안정자금과 독립군 군자금은 항상 부족했다. 그런 시점에서 오동진 장군은 평안북도 금광개발로 친일부호가 된 최창학을 통해 독립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김종원은 "삼성금광업주 최창학이 독립자금과 관련하여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 제안을 흘린 것이다.

물론 일제의 음흉한 계략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동진 장군은 자신이 한때 거느렸던 부하이자 항일독립운동 동지였던 김종원을 신임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미 김종원은 일제의 첩자로 변절한 시점이었다.

오동진 장군은 주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일주구배 김종원을 만나기 위해 1927년 12월 16일 약속 장소인 장춘역 부근 신음하(新蔭河)로 향했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약속 장소인 신음하(新蔭河)로 향하던 오동진 장군은 계략에 말려든 걸 눈치 채고 장춘시 길림-장춘선(吉長線) 흥도진역(興陶鎭驛)에서 내렸다. 그러나 오동진 장군을 기다린 것은 밀정 김종원이 아니라 악질 친일 경찰 김덕기와 신의주 형사대였다.

김덕기는 악질 친일경찰 최연, 김태석, 노덕술, 하판락 이상으로 항일독립지사들을 총으로 사살하거나 고문으로 죽였던 희대의 인물이었다. 김덕기는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뒤늦게 39살에 경찰에 투신한 '고문의 황제'였다.

김덕기는 23년 경찰 생활 가운데 무려 16년 동안을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주임과 고등과장을 역임했다. 그가 체포한 항일지사들은 오동진 장군을 비롯해 조봉암, 안창호, 박헌영, 홍증식 등 1,000명이 넘었다. 김덕기가 체포한 항일독립지사들 가운데 10%는 사형을 언도받고 순국했다. 그리고 10%는 오동진 장군처럼 무기징역을, 10%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런 공로로 고등계 형사 김덕기는 일제 강점기 경찰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경찰공로기장을 받았으며 일제 말기 평안북도 산업부장까지 지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풀려났다.

오동진 장군은 신의주 형무소에서 재판을 거부하며 1929년 11월 11일 33일간 지속된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그런가하면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후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 2차 단식투쟁을 또다시 감행했다.

경성형무소 수감 도중 1944년 정신병자로 분류돼 공주형무소로 강제 이감되었다. 당시 공주형무소는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한 감옥으로 오동진 장군은 공주형무소에서 1944년 5월 20일 광복을 1년여 앞두고 순국했다. 33일, 48일 등 두 차례에 걸친 옥중 단식투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 것이다.

특히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일인 판사가 무기징역을 선고할 때 오동진 장군은 판사들을 향해 "이놈 감히 어른 함자를 함부로 부르느냐!"고 호통을 친 뒤 "너희들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어서 "이놈들! 심판을 받아야 할 네 놈들이 나를 심판해? 이놈들 이리 내려 와서 내 심판을 받아봐라!"며 준열히 호통을 쳤다. 그리고 비호처럼 재판장으로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후 오동진 장군은 일체 심문을 거부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옥중 법정투쟁에서도 오동진 장군은 견결하게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당시 일인재판장은 오동진 장군 변론을 맡은 항일변호사 가인 김병로와 애산 이인을 불러 어떻게 해서라도 공판을 해야겠으니 부탁조로 사정을 했다고 한다.

7년간의 수형 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몸으로 1934년 2차 단식 투쟁에 돌입한 오동진 장군의 정신력은 수형 생활 중인 수인들로부터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특히 옥중 항일투쟁이 거세지자 일제는 오동진 선생을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토굴 속에 100일 동안 가두었다. 주먹밥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난 징벌방인데 100일이 지난 뒤에 미치지 않고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왜놈 간수장조차 '가미사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가미사마'는 신(神)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일인 간수들 사이에 오동진 장군은 신(神)으로 불리며 특별대접을 받았다. 특히 일인 형무소장조차 오동진 장군이 나타나면 그 앞에서 예를 갖출 정도였다.

오동진 장군이 일제에 피검된 지 4달이 지나가는 1928년 4월, 정의부 소속 김여연과 최봉복 등 제10중대 대원들은 오동진 장군을 구출하러 국내에 잠입했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넓은 도량과 인품,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 앞에 정의부 중대장 정이형을 비롯해 수많은 피 끓는 청년들이 오동진 장군을 흠모하며 그분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분이 걸어갔던 항일무장투쟁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실제로 오동진 장군은 일제와 맞설 때는 호랑이 같이 성난 포효로 달려들었지만 인자한 성품은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훌륭한 인품을 간직했다고 한다. 정중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맞는 오동진 장군의 인품에 압도되어 애산 이인은 이렇게 감회를 술회한 적이 있다.

"내가 목격한 대로 과연 대륙의 천지를 진동케 했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우리 독립군의 영웅이로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독립군들은 배달민족의 자부심이 담긴 천부경을 수첩에 필사하고 외면서 무장투쟁에 임했다고 했다. 홍범도, 여운형 선생처럼 오동진 장군 역시 천부경 구절을 암송했다. "하늘과 땅의 바른 기운이 배달을 만들었고 천부(天符)를 주니 장수들을 이끌어 주인 되었다. (중략) 인간의 몸을 가탁하여 교화하신 덕은 홍익인간이 되어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한 때문이다."

광복군 총영과 서로군정서 시절 동지이자 절친인 운초 계연수 선생이 1911년 『환단고기』를 최초로 출판할 때 홍범도 장군과 함께 오동진 장군은 선뜻 성금을 건넸다. 일제의 한국사 말살과 왜곡에 맞서 한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지키고 독립을 전취하려는 취지였다.

『환단고기』 30부는 출간되자마자 일제 헌병대가 수거령을 내렸다. 그리고 『환단고기』 저자 운초 계연수 선생을 헌병대로 연행해 고문 끝에 사지를 절단해 죽인 후 압록강에 던져버렸다.

오동진 장군은 1944년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국했다.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 주차장 근처에 오동진 장군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외로이 서 있을 뿐, 해방된 지 75년이 되는 지금까지 장군의 유해를 찾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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