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경회 이사장의 신년사를 읽고-

범산, 보내주신 당신의 '경자년 새해 인사' 잘 읽었소.

5년 전 한솔의 그 휘호(揮毫)보고 그걸 귀원(貴院)의 금년 표어, 아니 강령(綱領)으로 정하겠다고 했구려. 정말 범산 이사장의 밝은 혜안(慧眼)에 높이 경의(敬意)를 표하오.

한편, 이사장으로서 연구원 구성원들에게 '공정한 평가와 보상(분배)' , '건전한 근무환경 개선' , 그리고 '교양교육을 통한 능력개발' , '사회적 네트워크 강화를 통한 인간관계 증진'을 신년 새해 목표로 제시한 데 대해 성원을 보내며 꼭 이루어지길 비오.

범산, 전에도 말했지만 이 '道法自然' 네 글자는 노자 <도덕경> 제25장 끝 부분에 나오는 글귀요. 여기 전문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쉽게 풀이하겠소.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전문이오. 풀이하면 이렇소.

"뒤섞여서 이루어진 한 물건이 있는데, (이는) 하늘과 땅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어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홀로 우뚝 서서 바뀔 줄 모르고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으니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나는 그 이름을 모르거니와 문자로 말하면 '도'(道)라 하고,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크다고 하겠다.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이오,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은 멀리멀리 나가는 것이오, 멀리 멀리 간다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도 크니 이 세상에 네 가지 큰 것이 있어 왕 또한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거니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범산, 여기서 '有物混成'이란 뒤섞여 뒤범벅이 된 한 물건이 있다는 것이오.

곧 '혼돈의 상태'요.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은 근원(undifferentiated)이오.

거기서 제일 먼저 하늘(天)과 땅(地)이 생겨났소. 그럼 그건 어떤 상태일까? 고요(寂)하고 쓸쓸(寥)하다 했소. '寂'은 소리가 없는 것, '寥'는 형체가 없다는 뜻이오.

그런데 이것은 홀로 우뚝 서서 바꾸지를 않고(獨立而不改), 두루두루 행하여 위태롭지 않다(周行而不殆)했소. 여기서 '獨立'은 홀로 선다는 것, '不改'는 영구불변한 것으로 '獨立而不改'는 도의 절대성을 설명한 것이고, '周行而不殆'는 도의 보편성을 설명한 것이오.

그래서 노자 늙은이는 그걸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했소. 그러면서 늙은이는 "나는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 '물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吾不知其名)" 했구려.

범산, 그걸 문자로 표현하자면 도(字之曰道)라 하는데, 그것을 굳이 이름을 지어 부른다면 크다(强爲之名曰大)고나 할까?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大曰逝)이고, 또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은 멀리멀리 나가는 것(逝曰遠)이고, 멀리멀리 나가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遠曰反)이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절대적이고, 전일적이고, 아무리 뻗어나가도 무소부재하므로 결국 그 자체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오. 즉 우주의 확대(Evolution)와 축소(Involution)의 순환 과정을 말한 것이오. 아무튼 늙은이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도의 정적 존재성(static being)이 아니라 역동적 생성(dynamic becoming)이오.

범산, <신심명(信心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소.

極小同大하여 忘絶境界하고

極大同小하여 不見邊表니라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모든 경계가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들어내지 않는다는 말이오. 작아도 아주 작으면 큰 것과 같고, 커도 아주 크면 작은 것과 같으오. 극대니 극소니 할 때 그것이 그냥 우리 감각으로 크다 작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아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도록 무한하게 작은 것은 결국 큰 것과 같고, 아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도록 무한하게 큰 것은 결국 작은 것과 같소. 쉽게 말해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오.

그런데 그게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소.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이오. 그렇지만 감각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을 수도 없소. 색(色)을 떠나서는 공(空)도 없으니까 말이오.

범산,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보면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하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자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来)"란 말이 있소. 부처를 감각의 대상에서 찾지 말라는 뜻이오.

그런데 <오가해>(五家解)를 엮은 함허당(涵虛堂)이 여기에 설의(說議)를 붙여, "부처는 색(色)과 성(聲)에 있지 않고 또한 색과 성을 떠나 있지도 않으니 색과 성으로써 부처를 구해도 볼 수 없거니와 색과 성을 떠나서 부처를 구해도 또한 볼 수 없다." (佛不在色聲, 亦不離色聲, 卽色聲求佛, 亦不得見, 離色聲求佛, 亦不得見) 하였소.

그러므로 도(道)도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 또한 크니, 이 세상에 이 네 가지 큰 것이 있어서 왕도 그 하나를 차지하거니와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했구려.

여기서 '王'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오. 그러나 그 사람은 세상에서 패권을 잡은 왕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도와 같이 하고(同於道), 덕하고도 같이하고(同於德), 잃은 것 하고 같이 하는(同於失) 아상(我相)이 없는 그런 사람을 말하오.

또 '크다'(大)고 한 것은 크다 작다하는 감각적 분별지(分別智)가 아니오. 거기에는 '逝'라던가, '遠'이라던가, '反'이라던가 하는 모든 개념이 융합해 있는 것이오.

범산, 세상에 도(道)와 천(天)과 지(地)와 왕(王)이라는 네 가지 큰 것(大)이 있는데, 이 네 가지가 따로 있어서 절대성을 가지고 패권을 다투거나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도에, 도는 자연에 일치하고 있으니까 그걸 굳이 말로 표현하다면 '크다'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러니까 우리가 감각으로는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또 생각으로는 도도 있고 왕도 있소. 그러나 이것은 감각과 생각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서 그 모두가 하나가 되오. 바로 그것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오. 결국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는 말이오.

범산, 여기서 말하는 '自然'이린 누누이 말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천초목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문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이오. 영어로 'self-so' 또는 'spontaneity'로 번역되기도 하오. 따라서 '자연을 본받는다' 함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이라고도 볼 수 있소. 道法自然!!!

범산, 글이 너무 길었소. 끝까지 읽어주어 고맙소! 또한 한솔의 휘호를 통해 노자의 무위적(無爲的) 자연사상(自然思想)이 귀원의 표어가 되고 강령이 된 데 대해 거듭 감사드리며 경하하오. 귀원의 무궁한 발전을 빌며 글을 마치오. 늘 배려에 감사하오.

2020. 1. 3. 김포 하늘빛마을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드림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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