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어모장군(禦侮將軍) 전방삭(全方朔) (11)

작성 전종실 주주통신원 | 승인 2020.02.17  11:05:13

공유
default_news_ad1

- 정유재란 당시 동료 장수와 함께 지역을 사수한 전방삭 장군 의병 활동 고찰(考察)

전방삭 장군은 1597년 3월 중순경에 여러 가지 당면한 애로를 극복하고 자원  입대자 300명을 모집 보성군 벌교읍 영등에 진지를 마련하여 훈련을 시작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바닷가 야산이기에 적막감은 들었지만 의병의 우렁찬 기합소리는 이를 깨뜨리고 있었다.

의병의 훈련은 병기 사용 요령뿐만 아니라 진지의 인근지역인 벌교포, 영등포, 장암포, 대포 흥양(고흥)의 망저포(망주), 동강면 일대를 순찰하는 훈련까지 했다.

다음에 전방삭 장군의 의병대 전투 일지를 소개한다. 이 근거는 200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연구회⌟가 주관하고 ⌜kbs 한국방송공사⌟와 ⌜충절사⌟가 후원하여 ⌜임진왜란사의 새로운 과제⌟라는 제목으로 “임진왜란사 연구 100년 기념 학술 논문 발표회”를 순천대학교 70주년 기념관 대 회의실에서 가졌다.

▲ 논문 발표 자료집

논문 발표를 하신 분은,  전 성균관대교수 이장희(李章熙), 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장학근(張學根),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정구복(鄭求福), 순천대 교수 조원래(趙湲來)였다. 논문 내용중 조원래 교수의 “명량 해전 후 일본군의 공세와 연해지역 의병 항전”의 주제 발표내용 중 에서 전방삭 장군의 전투 기록 내용만을 발췌하여 적어본다.

1) 1598년 3월 예진 전투에서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등이 적을 물리쳤다.
2) 1598년 4월 8일 흥양 망저포, 첨산 전투에서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등이 함께   싸웠고, 첨산 전투에서 송대립이 전사하였다.
3) 1598년 6월 6일 흥양, 보성, 낙안지역의 전투에서 전방삭, 최대성, 황원복, 정회등이 참전 했으며 이 기록은 ⌜선조실록⌟31년 7월 6일 기축에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필자는 다음에서 선조실록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4) 죽전벌 전투(날짜와 전투한 장수의 이름이 없음)
5) 1598년 6월 8일 안치산 전투에서 전방삭, 정회, 황원복, 언립, 두리동, 후립등이 참전하였다. (최대성 전사)
"위의 사실로 보아 흥양, 보성, 낙안의 지역을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김덕방, 황원복, 정회등의 장수들이 향리를 지키기 위해 합동작전을 펼친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기술하고 있고, ⌜보성군 의병장 전방삭⌟ 저자 전남대학교 교수 노기욱 박사 역시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위에서 말한 선조실록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겨보고 필자의 의견을 제시해본다.

∎선조실록 102권, 선조 31년 7월 6일 기축 1번째기사 1598년 명 만력(萬曆) 26년
전라 병사 이광악이 왜적의 침입 때 방어를 못한 흥양 관리들의 처벌을 치계하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이광악(李光岳)이 치계하였다.
"흥양(興陽) 지방에 적선이 들이닥쳐 5월 25일에 육지에 내려와 노략질하였고, 6월 6일에는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였습니다. 그러나 8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식을 알려와 장수들이 미처 토벌할 수 없게 만들었고, 3백여 명의 사람과 가축이 잡혀 갔는데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현감 최희량(崔希亮)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보성 군수(寶城郡守) 전백옥(全伯玉)은 8일의 전투에서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원하지 않았으니, 비록 적을 벤 작은 공이 있기는 하나 그 실책을 속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은 비록 정탐을 게을리하여 적의 출현을 알리지 못한 잘못은 있으나, 중국 장수 이천총(李千總)과 합세해서 적을 토벌하여 그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하였으니, 앞의 두 수령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참작하여 처치하소서.“

위의 내용으로 보면 관리들의 잘 못한 점을 들어 치계 코자 한 내용이다.
“6월 6일 깊숙한 곳 까지 침투하여” 했는데 이 지역 지명을 기록하지 아니했다. 이곳이 바로 흥양, 보성, 낙안이다.
“3백여 명의 사람과 가축이 잡혀 갔는데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했는데 이 전투지역이 보성 안치산 전투이다. 후세의 기록에 의하면 보성 안치산 전투에서 3백여 명이 피랍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위의 장계내용에서 지명과,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

필자가 여러 경로로 선인들이 기록한 내용과 최대성, 송대립, 황원복등의 기록물을 분석하여 조사한 내용을 밝혀보고 다음 기회에 증거 자료를 제시하겠다. 

1597년 5월  2일 왜교전투(해룡면 신성리) -  참가장수 : 전방삭
1597년 6월 10일 고흥 첨산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황원복, 김덕방
1597년 6월 16일 망저포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황원복, 김덕방
1598년 3월  ?일 보성 예진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1598년 4월 8일 고흥 첨산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김덕방 (송대립 전사)
1598년 4월 ?일 벌교,영등,장암,대포전투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황원복, 정회
1598년 6월 8일 보성 안치산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최대성, 황원복, 정회 (최대성 전사)
1598년 7월 12일 보성 죽전벌 전투       - 참가장수 : 전방삭, 정회 (전방삭, 정회 전사)

위의 사실로 보아 당시 왜적의 침입이 고흥, 보성, 낙안지역에 유난히도 많았고,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믿어진다. 다행스럽게도 용맹스런 장수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받쳐 싸워 막아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전쟁터에서 순절한 전방삭, 최대성, 송대립, 왕원복, 정회 장수와 일본으로 끌려간 김덕방 장수들에게 다시 한 번 깊게 머리 숙여 추앙(推仰)하고 영원토록 잊지 않고 선양(宣揚)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이렇듯 당시 각 지역에서 향리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친 장수들이 수 없이 많을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애국충정으로 산화한 인물들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지역에 국한된 역사 인물로만 남아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전종실 주주통신원의 다른기사 보기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