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고

보통의 경우에 “야, 이 돼지야!” 그러면 웃고 넘긴다. 그런데, 비만인 사람에게 똑같이 말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진실을 얘기하면 화를 낸다. 그 진실이 숨기고 싶은 것이면 더 그렇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낀다.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심장을 쑤시는 것 같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살아온 내 추억의 조각들 때문이다. 그러한 감정은 고스란히 전태일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떠오른다. 그의 의심할 수 없는 인간애와 정의감과 용기!

▲ 전태일 동상(사진출처 2017-11-10 한겨레신문)

그런 전태일 평전을 30여 년 만에 다시 펴들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최근 회갑을 넘기며 세상과 타협하며 대충 살아가는 것 같아 ‘나이 먹으니 이렇게 지혜도 항심(恒心)도 무디어가는가’ 싶어 내 자신에 대해 조금씩 회의감이 들던 차라, 나를 성찰하고 추스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부담스럽지만 책을 펼쳤다.

또 새로웠다. 여전히 눈물을 자주 흘렸다. 가끔가끔 마음을 후비는 것도 여전하다. 더 정의롭게 살아오지 못한,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가끔은 세상 욕심을 쫓는 것들에 대한 채찍이 되었다. 정말이지 끝까지 읽으면서 여러 번 아픔을 참아야했다.

그런 내부적 아픔뿐만이 아니었다. 노동의 현실은 또 어떤가? 2018년 산업재해 사고로 인한 사망자수는 971명이다. 아침에 나가서 산업재해 사고로 저녁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하루에 3명꼴이다.(며칠 전 보도에 올해는 하루 1.4명꼴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산업재해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수까지 합하면 2018년 1년간 2,142명이다. 2,142명이 한 해동안 목숨을 잃은 것이다. 평균소득 3만불이 넘는 이 시대에 말이다. 전태일이 보았던 평화시장의 모습이 지금도 산업고 실습생에게, 알바 노동자에게, 화력발전소 비정규직에게, 지하철 비정규직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전태일이 보았던 작업장!

노동시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다. 일거리가 밀릴 때에는 물론 야간작업을 하는 일도 허다하며, 심한 경우는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다. 업주들이 어린 시다들에게 잠 안 오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는 것도 이런 때이다.(전태일 평전, 조영래, 1991, 104쪽)

전태일은 그러한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어린 노동자들의 처절한 고통을 보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전태일이 잠을 밖에서 자고 축 늘어진 모습으로 새벽녘에야 집에 들어오는 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이다. 사흘째 되는 날 어머니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어머니가 차비 30원 주잖아요. 시다들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자서 낮이면 꾸벅꾸벅 졸고, 일을 해야 하는데 점심까지 쫄쫄 굶길래 보다 못해 그 돈으로 풀빵 30개를 사서 여섯 사람한테 나눠줬더니 한 시간 반쯤은 견디고 일해요. 그래서 집에 올 때 걸어왔더니 오다가 시간이 늦어서 파출소에 붙잡혔어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천상 전태일은 남의 아픔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건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내가 먹고 남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몫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나보다 11년 빨리 태어난 사람, 내가 어렸을 적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 그러나, 교과서에 나온 누구보다도 고개 숙이고 싶은 사람, 전태일! 그의 그런 사랑, 그의 아픔을 우리는 얼마나 계승하고 있는가? 그는 돈이 없어 초등학교는 중퇴하고 겨우 중학교 맛만 본 사람이다. 요즈음 80%가 대학을 졸업한다. 대학 졸업했다고 그에게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을까? 대학 나온 법조인들이, 대학 나온 기자들이 그때까지 그 처절한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지식인의 책무가 더 클 것인데 말이다.

전태일은 고통스런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그것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근본원인이 무엇이며,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처음에는 깊이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두드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고 했던가.

그는 그냥 억울하다고 느끼고 분노하고 끝나지 않았다. 그 억울함을 없애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목숨을 건 도전을 하였다. 재단사가 사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미싱사와 시다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고 재단사가 되기 위해 재단 보조 일부터 다시 시작하여 1967년 바라던 재단사가 되었다.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다들에게 온정을 베풀다 재단사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전태일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그 일을 조영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생활을 하게 되는가?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가끔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중략 -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인 것이다. (위의 책, 133쪽)

전태일은 개인적인 온정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단사 친구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며 ‘바보회’를 조직한다. 박애주의자에서 노동운동가로의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로 가는 독재정권 시절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물건처럼 부려먹고 버리는 기업주, 약자인 노동자를 외면하고 기업주 편을 드는 시청,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기만하고 억압하는 노동청, 피해자인 노동자를 감시하고 조롱하며 범죄를 옹호하는 경찰들!

그는 ‘근로기준법’이 있으면서도 안 지켜지는 것에 더 분노했고, 국민의 혈세를 받으며 노동자들의 피땀을 밟고 그 위에 선 정부에 더 분노했다. 그가 깨달은 결론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은 스스로의 불굴의 투쟁에 의해서만 쟁취되고 지켜진다는 진리’였을 것이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절규하며 전태일은 마지막 선택을 한다.

“어머니, 시장 일이 아무래도 크게 한판 벌여야 하게 생겼어요.” 그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날도 여전히 경비원들과 경찰들과 공무원들은 집회를 막고 현수막을 빼앗았다. 전태일은 친구들을 먼저 내보냈다. 미리 준비해둔 석유를 한 되 가량 끼얹은 그의 몸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뛰어나갔다. 그리고 소리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쓰러지고 나서 또 한 마디를 남겼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

어머니가 병원으로 도착했을 때,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 나를 원망하지 않지요?”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그러겠다고 대답한 어머니에게 아들 전태일은 다시

“어머니, 정말 할 수 있습니까?”라고 세 차례나 되물어서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받고서 “약속합니다!”하고 소리쳤다.

그는 또 친구들을 불러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고 얘기한 다음 친구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으니, “왜 답하지 않는가!”라고 외친 후에 친구들이 “네 말대로 꼭 하겠다” “맹세한다!”라고 외치니 그제야 눈을 감고 잠잠해졌다. (위의 책, 286~288쪽 요약)

지난해에 비로소 우리나라는 주 52시간 노동을 법제화하였지만 이에 대한 자본가들의 불만이 드세서 시행시기를 늦추거나 다소 변질시키고 있다.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국회는 자본의 뜻에 따라 기준을 완화시키려 한다. 여전히 다수의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일한다. 특히 비정규직은 그렇다.

▲ 비정규직 김용균씨를 기리며 ‘노동자가 연대하고 협력하는 조직’을 만들려는 ‘김용균재단’이 전태일 열사 49주기인 11월13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출처(2019. 11.15 한겨레21)

며칠 전인 2020년 2월 3일 필자가 살고 있는 여수의 산단에서 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전태일을 불러 올 수밖에 없다.

전태일이 산화하고 반세기가 흘렀건만 아직도 매년 산업재해 사망자수가 1년에 2천여 명이 넘는다. 믿기지 않은 수치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공무원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노동자 스스로의 힘뿐이라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책의 말미에 장기표(당시 민중당 정책위원장)의 글이 발문으로 실려 있다. 요즈음 장기표의 행보를 보고 있는 것이 또한 나를 슬프게 한다.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이현종 주주통신원  hhjj55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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