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 공적 증거 자료를 찾아서 (6) - 선무공신추모록(宣武功臣追慕錄)

▲ 선무공신  추모록

위 서적은 단기 4314년(서기1981년) 5월 성균관장 이재서(李載瑞)님의 서(序)를 시작으로 책명의 부재로 호좌수영이충무공관하진충제공추모록(湖左水營李忠武公管下諸公追慕錄)이라 칭하고 112명의 명단과 함께 공적이 기록되어있다. 서두에 이순신(李舜臣), 이억기(李億祺), 안홍국(安弘國) 여수 충민사에 배향되신 세분이 기록되었고 27번째로 전방삭(全方朔)이 기록되었다.

전방삭 장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선무공신 추모록 (전방삭 장군 기록 내용)

위 내용을 해석하면
전방삭 자는 일진이요 호는 규암이며 천안 전 씨이다.  백제 환성군 전섭이 위 시조요, 고려  천안 전 씨 부원군 전락과 평장사 전충우와 천성군 전세주와 국조 광주 목사 전구생과 상주 목사 전자명은 같은 조상이다. 판관 전수완과 선전 전대복과 진사 전청과 장흥부사 전윤부는 고조 증조 조부 선고이다.

명종때 출생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돈독하고 무예가 보통에 뛰어났으며 선조 을해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별천으로 훈련원 부정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 막하에서 군사의 일을 도와 적군을 무수히 베어 죽이었다.

정유년에 왜적이 또 쳐들어와 날뛰매 공이 혈서를 써서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기로 뜻을 굳히었는데 왜장 희입을 보성 죽전 들판에서 교봉하여 적을 무수히 죽이고 격퇴 시켰다. 얼마 후 흥양 망저포 첨산등으로 진을 옮겨 송대립과 최대성으로 싸움을 돋우며 기이한 전략을 내어 거의 도적의 괴수를 잡을뻔 하였는데 날아오는 총탄에 맞았으나 의기가 죽을 때 까지 꺾이지  않았다. 보성 도촌방 학봉 뒤 효죽봉 아래 청방산 유좌의 언덕은 만년의 묘소이다.

아들 전홍례는 훈련원 판관으로 병자호란에 왕을 호종하다 강도에서 순절하였으며 손자 전이빈은 선무원종에 기록된 바와 같이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공의 한 가문에 쌍충이 낳음을 우산 안방준 선생이 칭찬하며 기록하였다. 

이러한 공적에 감복하여 후세 향리의 문인들이 남긴 전방삭 장군 추모운을  소개한다.

▲ 전방삭 장군 추모운 (송재열 근서)

              ⋇송재열 : 대한민국 한시 백일장 심사위원 역임
             

              역문
              선생의 높은 절개가 우리 동방에 드러나니
              당당한 의기 더불어 같이 할 사람 없네
              나라를 근심한 속마음은 해와 달로 다투고
              왜놈을 죽이는 담력과 지략은 서릿발 보다 엄하다네
              꽃다운 어진 이름은 천년 뒤에까지도 썩지 않고
              성한 공적은 사해 가운데 길이 전하네
              천상에 계신 영혼은 능히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한이 다 함이 없네

▲ 전방삭 장군 추모운 (박문호 근서)

                ⋇박문호 : 낙안향교 전교, 벌교읍지 편찬 고문역임
               

                역문
                장군의 위대한 업적 우리 동방에 드러나니
                높은 절개 곧은 충성 뉘 더불어 같이 할꼬
                의기는 당당하여 해와 달을 꿸만하고
                위엄과 거동 늠름하여 고풍을 울어 보네
                어진 이름 역사 속에 빛이 나고
                아름다운 사적은 책 속에 전해오네
                임란 당년의 일을 어찌 차마 말 하리오
                지난 일을 곰곰이 생각하니 감회가 한이 없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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