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 공적 증거 자료를 찾아서 (7) - 잔라남도지(전남새뜸)

전라남도에서는 매월 2회 ⌜전남새뜸⌟이란 도지를 발행하고 있다. 2019년 5월부터 8회에 걸쳐 ⌜호남 의병사⌟라는 제목으로 전남대학교 문화유산 연구소 연구원  노기욱 박사가 연재를 했다. 그 내용 중 전방삭 장군에 대한 내용을 옮겨 본다. 

▆ 전남새뜸 2019년 5월 20일 (제537호) 10면 기사 내용

▲ 전남새뜸(연해지역 방어 해상의병으로 나서다 )

“연해지방 해상의병으로 나서다.”라는 제목으로 전방삭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훈련원에서 부정으로 활동 하던 벌교의 전방삭 장군이 있다. 그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보성 연해지역을 방어하는 해상의병장이 됐다.  송대립, 최대성, 김덕방, 황원복등과 연합작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협공했다. 예진, 벌교포, 영등포, 장암포, 대포에 상륙하는 적을 차례로 격퇴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전남새뜸 2019년 6월 5일 (제538호) 11면 기사 내용

▲ 전남새뜸 (죽전벌 전투는 정유재란 종식의 교두보였다)

위의 제목인 “죽전벌 전투는 정유재란 종식의 교두보였다”라는 주제속의 “죽전벌 전투는 바로 보성군 득량면 죽전벌로 전방삭 장군의 최후 전투지였다.”는 사실을 다시 밝혀둔다. 그리고 전쟁 종식의 역사적 의미가 너무나 큰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강조어로 “전방삭 장군의 의병 활동은 결과적으로 정유재란의 종식을 위한 교두보가 됐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전남 역사학자로써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의 확고한 증거로 기록되었기에 전방삭 장군의 전투 공적 고증자료로 다시 한 번 재시하고자 한다. 

기록 내용 중 전방삭 장군에 대한 내용을 옮겨 본다.
∎“보성의 해상 의병장 전방삭은 송대립 · 최대성 · 김덕방 · 황원복 등과 보성, 벌교, 낙안, 고흥일대 해안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조선 수군은 고금도에 해상기지를 안전하게 건설 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해상기지 건설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598년 3월 이후 북서풍을 타고 올라온 일본군은 고흥, 벌교, 보성을 집중 침범했다. 적선 10척이 보성 예진(曳津)에 쳐들어 왔다. 최대성 · 송대립 · 전방삭 등 벌교와 고흥, 보성 해상의병들이 연합했다. 예진은 현 득량면 예당리에 있던 포구로 ‘예진’, ‘왜진’, ‘왜진포’등으로 불렸다.”

∎“1598년 4월 8일 흥양 망저포로 들어온 일본군이 벌교로 향하면서 1차 첨산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첨산 아래 벌교로 향하는 고갯길 전투에서 창의별장 송대립, 모의장 최대성, 김덕방, 전방삭 장군 등이 연합으로 방어전선을 펼쳤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송대립이 전사했다. 피아간 전투가 치열해 전열을 정비해야 했다.”

∎“1598년 6월 5일 낙안·흥양·보성 일대에 방어전을 펴고 있던 해상의병은 연해 수복작전에 나섰다. 6월 7일 전방삭 장군은 해상으로 들어오는 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이때, 본진의 수장 정회 장군으로 부터 ‘왜선 10여척이 예진에 쳐들어 왔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전방삭 장군은 의병들과 연합해 주리재를 넘어 초암산 아래에 도착했다. 적정을 살핀 다음 기러기재 산정에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군은 이미 안치들에 들어와 주둔했고 세력이 매우 강력했다. 모의장 최대성 장군은 사노 두리동에게 출진을 명령해 적을 유인케 했다.”

∎“1598년 6월 8일 안치전투가 발발하자 전방삭 장군과 해상의병은 적진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안치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매복 작전으로 저항했다. 정회 장군과 황원복 장군은 적을 앞뒤에서 공격했다. 최대성의 장자 최언립은 사노 두리동을 이끌고 좌우를 공격했다. 전방삭과 최대성의 차자 최후립은 적이 상륙한 뱃길을 차단했다.
전방삭 장군과 의병들이 추격하자 적들이 오돈치 일대의 매복 세력과 합세해 공격했다.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면서 최대성·두리동·갑술 등이 전사했다.”

∎“1598년 7월 12일 우끼다 희데이를 수장으로 한 일본군은 죽전벌에서 대규모 농성을 시도했다. 이날 〈선조실록〉은 서생포에 머물던 적장 미노베 기하치로(美濃部喜八郞)도 참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부장 미노베 기하치로는 가등청정이 총애하는 인물이다.

죽전벌 전투는 치열한 살육전이었다. 보성군 득량면 죽전벌은 허허벌판으로 의병들에게 불리한 지형이었다. 당시 전방삭 장군은 미노베 기하치로를 집중 공격했다. 하루 종일 7번이나 펼쳐진 전투에서 진퇴를 거듭하다가 전방삭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전방삭 장군에게는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 조정에서 내려졌다.

보성 의병장 전방삭 장군의 의병활동은 결과적으로 정유재란의 종식을 위한 교두보가 됐다. 역사적 의미가 크다. 하여,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순신 호국관광벨트 거점의 하나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 라고 전방삭 장군의 공적사실을 밝혀 널리 알려 주신 점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전남새뜸 2019년 6월 20일 (제539호) 11면 기사 내용

▲ 전남새뜸(의병장 후손들 대를 이어 의병으로)

여기에서 밝힌 “보성군 장암리 대룡마을 오충각(五忠)은 임란 충신 박천붕과 그의 네 아들 박원겸, 박인겸, 박예겸, 박의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라고 소개한 뒤
전방삭 장군의 쌍충각(雙忠閣)에 대한 기록을 옮겨 본다.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영등마을 쌍충각은 임란 공신 어모장군 전방삭과 그의 아들 전홍례(1575~1637)의 쌍충을 기린 곳이다. 전홍례는 부친 전방삭 장군이 죽전벌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절치부심하며 학문과 무예를 닦았다. 본관은 천안이며 자는 ‘대진(大進)’이다. 호는 ‘후암(後庵)’으로 보성읍 우산리 택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1606년 (선조39) 31살 때 무과에 올라 훈련원 판관을 지냈다. 그는 부친의 충절과 가르침을 사모했다. 1607년(선조40) 그의 부친이 설진한 해상의병 근거지인 벌교읍 영등으로 이거해 마을을 설촌 하였다. 그때 그늘에서 활을 쏘기 위해 심은 느티나무가 지금까지 무성히 자라고 있다.

〈호남절의록〉에 ‘판관 전홍레가 1636년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과 종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강화도로 호종했다. 강화도 입도를 가로막은 오랑케와 접전 중 흉탄에 순절했다.’고 적혀있다.
전방삭과 아들 전홍례의 충절을 기렸던 쌍충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사들에 의해 사라졌지만 시대정신은 온전히 살아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전남새뜸 2019년 7월 5일 (제540호) 11면 기사 내용

▲ 전남새뜸(한말 호남의병 투쟁은 극렬했다)

위의 기사 내용으로 한말의 보성의병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전방삭 장군의 해상의병 활동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정리해본다.

“보성에서는 덕망있는 의병장 전방삭·송대립·최대성·황워복·김덕방 등과 연합해 해상의병 활동에 나섰다. 이들의 해상의병 연합작전은 첨산, 안치, 죽전 등에서 적을 격파했다. 이종범 전 조선대 교수는 “보성사람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구하겠는가”라면서 명랑해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이순신의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음을, 보성의 활동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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