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삭 장군 공적 증거 자료를 찾아서 (8) - 공공기관의 고증(考證)

우리나라의 장서각이나 백과사전 중 전방삭 장군의 공적이 기록된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忠武李公舜臣同殉諸公事實

全方朔字日進天安人判官壽完玄孫進士淸孫孝友有武藝以別薦除訓鍊院正壬辰從李忠武公與崔大晟宋大立等贊劃戎務連捷於倭橋尖山等戰斬獲無數中丸而死錄宣武原從勳[주:子判官弘禮丙子殉節江都安牛山竝立傳樂安]

▲ 호남절의록 원본(전방삭).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제공

위의 내용은 전해진지 오래 되었으나 원본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어서 더 귀하게 여겨진다.
⋇상기문건은 임진왜란 후 정조 23년(1799년) 에 작성된 내용이다.

위의 내용을 해석하면,

충무 이공 순신 동순 제공 사실
전방삭 자는 일진이요 천안인 판관 수완 현손이며, 진사 청의 손자이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텁고, 무예에 특출하여 훈련원정이 되었으며 임진란 시 이충무공 막하에서 최대성, 송대립등과 함께 군무를 돕고 왜교, 첨산 전투에서 왜적을 무수히 베었으나 총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이에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 되었다. 아들 훈련원 판관 홍례는 임금을 강도로 모시다 순절하니 우산 안방준이 부자를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

NAVER지식백과

두산백과
전방삭
[ 全方朔 ]
요약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활동을 도왔으며, 보성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본관 : 천안
자   : 일진(日進)
본명 : 전방삭(全方朔)
국적 : 한국
활동분야 : 무관. 의병장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
주요업적 :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재건 활동을 도우고의병장으로 활동
시대     : 조선 중기

본관은 천안(天安). 자(字)는 일진(日進). 휘(諱)는 방삭(方朔). 아호(雅號)는 규암(葵庵)이다.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조선 명종 때 장흥도호부사를 지낸 전윤부(潤富)의 아들이다. 1545년 인종 1년에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태어났다. 1575년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훈련원 부정(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막하에 적진포 해전 등 크고 작은 해전에서 활약, 조선 수군 재건 활동을 도왔으며, 왕실 광해군 세자를 호종(護從)하였다. 이후 고향인 보성에서 의병 300여명을 모아, 1597년 정유재란 발발 당시 보성, 고흥, 승주, 순천 등지에서 왜적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여 활약하였다. 이후 1598년 보성군 득량면 죽전벌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605년 선조는 전방삭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급으로 등재, 훈련원정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추증하였으며 녹권(錄券)을 하사하였다.

카테고리
• 지역 >아시아 >한국 >전라남도
• 인물 >역사와 지리 >역사 >한국역사

출처
제공처 정보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전방삭 [全方朔] (두산백과)

참여백과
전방삭[全方朔,1545~1598]
작성자 : 전만오
등록일 : 2018.06.27
추천   : 4
조회수 : 1257

조선 중기의 무관이자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관하에서 군무를 돕고 수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1575년(선조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에 근무 중 부정(副正)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실이 피신할 때 명을 받아 광해군 세자를 호종 하였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몸소 왜적을 물리치고자 이순신 관하에서 군무를 돕는 중 수차에 걸쳐 왜적을 섬멸하고 뜻한 바 있어 자기 재산을 털어 군량미를 확보하고 의병 300여 명을 모집 훈련한 뒤 고향인 보성과 인근 고흥, 승주, 순천에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그 사례를 들어보면
1597년 5월 2일  : 해룡면 신성리 전투
1597년 5월 10일 : 고흥 첨산 전투
1597년 6월 16일 : 고흥 망저포(현 망주) 전투
1598년 3월 일   : 보성 예진(현 예당) 전투
1598년 6월 6일  : 고흥, 보성, 낙안 전투
1598년 6월 8일  : 보성 안치산 전투
1598년 7월 12일 : 보성 득량 죽전벌 전투
이와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1605년 선조임금께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급으로 등재하고 록권을 하사하였으며 훈련원정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참조항목

어모장군
조선시대 서반(西班) 정3품 당하관(堂下官)의 관계(官階).

• 출처 : 호남절의록, 선무공신추모록, 최대성, 송대립 장수들의 실록과 창절록, 선무원종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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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삭[원본 편집]
전방삭(全方朔), 1545 ~ 1598)은 조선 중기의 무장이며 의병장이다.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자(字)는 일진(日進), 호(號)는 규암(葵庵)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택촌에서 부사를 지낸 전윤부(全潤富)의 외아들로 태어나 무예를 익히고 있을 때 동갑인 이순신이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딸 방태평과 결혼 후 장인에게 무예를 익히고자 줄곧 11년간 처가에 머무를 때 전방삭과 이순신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목차

1.생애 2.사후 3.가족관계 4.같이보기
생애 : 전방삭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를 좋아했으며 광해군 세자의 사부인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선생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예를 익히는 청년시절 전방삭과 동갑인 이순신이 21세 되던 해에 보성군수 방진(方震)의 딸 방태평과 결혼하고 장인으로부터 무술을 11년간 익히고 있을 때 같은 활터와 경마장을 이용하였기에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전방삭은 31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에서 근무하게 되고 실력을 인정받아 48세에 훈련원 부정(副正) 건공장군(建功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뜻하지 않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왕실이 위태로워 피신할 때 광해군 세자를 호종(扈從)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세자의 윤허를 받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막하로 백의종군하여 2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누명으로 이순신이 하옥되자 관군은 와해되고 전방삭은 고향의 연해안을 지키고자 미리 보아둔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연등포에 진지를 마련하고 의병 300명을 모집 정예병으로 훈련한 뒤 고향뿐만 아니라 인근 고흥, 낙안, 순천 등지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동료장수인 송대립, 김덕방, 최대성, 황원복등과 함께 수차에 걸쳐 왜적을 물리쳤다.

사후 : 선조임금께서는 전방삭의 공적을 인정하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등재하고 록권을 하사 했으며 훈련원정(訓鍊院正)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추증 하였다.

▲ 전방삭 장군께 하사한 증거

 
  ▆ 한국학중안연구원 

    

▲ 전방삭 장군 영정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전종실 주주통신원  jjs62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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