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사같은 누님(1990년대 초 부산 영도여고 교사 시절)

베품과 나눔이 몸에 밴 천사같은 누님은 필자가 전교조 해직과 동시에 발령을 받자 무척 미안해하셨다.그러나 전교조 교사인 동생 이상으로 학생들을 사랑했고 어린 영혼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출처 : 이혜승)

목포시 유달산 산자락 밑에 자리한 유달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다. 유달산은 가족과 봄나들이 갈 때면 자주 들르곤 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겨울날이면 유달산 기슭에서 유달 초등학교 후문까지 눈썰매를 타며 신나게 놀았다.

유달동 집에 세 들어 살던 시절, 주인 집 고등학생 형아는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큰 딱지도 만들어주고 집 앞마당에 있던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따다가 나를 주곤 했다. 그 시절 무화과 맛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신이 내려준 선물처럼!

2년 뒤 목포시 유달동에서 근처 경동으로 이사를 갔다. 경동의 추억 가운데엔 여름날 아이스케키가 단연 떠오른다.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하다 '아이스하드', '아이스케키'를 외치는 얼음 장수 목소리가 들리면 그날은 가슴이 설렜다. 아이스케키 장수가 오지 않는 날은 골목에 어스름이 밀려올 때까지 저녁 늦도록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다.

가끔씩 엿장수가 지나갈 땐 얼른 집으로 뛰어가서 물건을 갖다 주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가 찰칵거리는 엿가위로 흥얼거리면서 엿을 댕강 잘라 줬다. 입에 오물거리며 엿으로 바꿔 먹은 그 물건 가운데엔 누나가 쓰던 물건도 있었고 엄마가 창고에 넣어둔 물건도 있었다.

▲ 군산시 평화동에서 1961년경 천사와 같은 누님과 함께(출처 : 하성환)

어느 날 엿장수가 또 왔다. 여느 때처럼 엿과 바꿔먹을 물건을 찾는데 그날은 마땅한 게 없었다. 그래서 누나 저금통에 손을 댔다. 1원짜리 동전을 빼어내 엿을 사먹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누나 몰래 빼먹은 저금통 금액이 50원쯤 되었을 때다.

저금통이 가벼워졌다며 누나가 의아해했다. 저금통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가벼워진 탓이다. 아버지도 저금통을 들어 보이며 '참 이상한 일이네' 하시며 더 이상 말씀이 없었다. 나는 훔친 일이 들키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모른 체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언젠가 아버지 손을 잡고 누나와 함께 셋이서 길을 걸었다. 그 때 다시 누나가 저금통 이야기를 꺼냈다. "그 저금한 동전들이 어디로 갔을까?" 의아해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며 "저금통에 발이 달렸나 보다"며 웃으셨다. 나는 그 순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어린 나이에 훔친 사실을 들키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인 채 아버지와 누나 사이를 걸어갔다.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시간이 흘렀다.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아버지 따라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부산 이바구길 옆 초량 초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엔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서 함께 공을 찼다. 어둠이 내리는 어슴프레한 시간까지 공을 차며 놀았다.

맑고 밝은 날엔 부산고등학교 위쪽 선화여상 빈 운동장에 가서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야구하다가 잠시 쉴 때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둥실둥실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름다웠다.

부산으로 전학 와서 추억에 남은 게 또 있다. 집으로 가는 길 대도극장 앞 길가에 앉아 '뽑기'를 하던 추억이 새롭다. 낡은 종지에서 건네받은 뽑기 과자는 아주 얇아서 조심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바스라졌다. 정말 운이 좋게 별모양 뽑기에 성공했던 기억은 어린 시절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누나 셋이 또다시 길을 걸었다. 초량시장으로 가는 길 옆, 천주교회 앞을 지날 때 누나가 다시 저금통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일인 양 누나와 아버지 사이를 손을 잡고 걸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참으로 저금통에 발이 달린 모양이다"며 또 한 번 고개를 갸웃하며 웃으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그 일을 잊고 지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리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서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 누님의 하늘길에 앞서 입관 예배를 드리는 미국 가족들(2020. 3. 16)

(출처 : 이희승, 이정임)

사흘 전 천사 같던 누님이 투병 끝에 하늘로 돌아가셨다. 지난 해 추석 병환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여동생과 함께 병문안을 가려고 했다. 그러나 누님은 밥 한끼 차려줄 수 없는 몸이라며 어서 나아서 올 여름이나 늦어도 올 가을엔 한국에 다녀가시겠다고 했다. 온 가족이 부산 여동생 집에 모여 옛이야기 나누는 행복한 시간을 기다렸다.

사실 나는 누님이 17년 전 미국으로 떠난 이후 제대로 얼굴을 뵌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누님이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잠깐 얼굴을 뵈었다. 예나 그때나 누님은 온화했고 인자했다.

언젠가 온 가족이 다함께 모였을 때 '옛이야기'처럼 어린 시절 저금통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젠 그 이야기를 들어줄 누나가 떠나고 없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알았다. 저금통에서 돈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저금통이 가벼워질 때 누나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누나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어린 시절이든 어른이 되어서든 누님은 '누나'처럼 항상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늘 길로 떠나간 '누나'가 그립다. 며칠 동안 보도 위 길바닥을 내려다봐도 눈물이고 하늘을 쳐다봐도 눈물이었다.

오늘은 먼저 떠나가신 아버지를 하늘에서 만나 환하게 웃으며 동생의 못다 한 '옛이야기'를 들어주실 것만 같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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