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밀"과 '사회적 거리"두기

 

▲ 인구 1400만명이 사는 중국 광저우시 파저우 바오리광장(쇼핑몰) 주변에 있는 음식점과 상점 등이 설 연휴 이후 계속 휴업 상태다. 지난 7일 오후 오가는 사람이 없는 텅 빈 광장의 모습.(사진 출처 : 20220년 2월 15일 한겨레신문)

정세균 총리는 3월 21일 “사회적 거리두기”담화를 발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민들의 일상이 사라지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지만, 정부는 앞으로 보름 동안 더 ‘사회적 거리두기” 준수를 호소했다.

인류의 문명에서 질병은 도시의 형태를 규정지어 왔다. 런던 공공시설국 구성이나 19세기의 위생처리조직 같은 도시를 관리하는 기술의 발전은 콜레라 같은 공중위생을 위협하는 질병의 발생에 대처하면서 발전해 왔다. 지금 코로나19는 뉴욕과 멕시코에서 유행했던 1918년의 스페인 독감, 또는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유행한 에볼라 바이러스 질병 같은 팬데믹 감염병 리스트에 이름을 추가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인류의 도시 내 생활양식을 바꾸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지금 “과밀”을 두려워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모든 카페와 레스토랑은 문을 닫았으며, 뉴욕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박물관과 브로드웨이 극장이 문을 걸어 잠갔다. 여러 나라에 있는 회교사원이 문을 닫았고, 교회는 예배를 중단했으며, 교황은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

요즈음 사회의 화두는 ‘과밀을 낮추어 접촉을 줄여라’로 요약된다. 밀도와 ‘거리두기’간의 긴장은 공공공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다. 요즈음, 누가 승객이 꽉찬 콩나물 시루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려고 하는가? 누구나 좁은 공간이 아닌 탁 개방된 오피스에서 일을 하고자 한다.

물론, 이제 우리는 텔레컨퍼런스, 풍부한 소셜미디어, 원격 디지털 쌍방향 소통 수단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무선전화, 네플렉스, 가상 커뮤니티에 의존하는 생활비중을 늘려오면서, 일종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향해 표류해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명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자양분으로 발전 할 것인가? 아니면 “과밀”을 기반으로 흥미진진한 도시문명을 계속 구가할 것인가? 이는 코로나19이후 ‘뉴 노말’을 예측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경기후퇴’의 원인이다. 사회적 접촉 붕괴로 인해 피해를 입는 계층은 고립과 외로움에 다치기 쉬운 노약자나 장애인같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에 소셜미디어는 최소한도로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기회를 주고, 우리의 사회적 고립의 느낌을 줄여준다.

그러나 생활은 스마트폰의 액정화면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소셜미디어는 물리적 세계가 제공하는 따사로운 햇살, 미풍의 감미로움, 군중 속에서 느끼는 나만의 존재감,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되어 있는 ‘빈’ 같은 엄청나게 커다란 조형물을 만질 때 느끼는 흥분을 전달하지 못한다.

“과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중하는 컴팩트한 지역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걷거나, 자전거 타기, 혹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일터까지 이동해 간다. 또한 “과밀”은 젊은이들을 개방된 공원에 끌어모아 락 콘서트를 열며 도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21세기를 선도하는 네덜란드 건축가인 렘 쿨하스는 맨해탄의 초고밀도를 찬양하며, 그것을 “과밀의 문화”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물리적 근접성이 팬데믹 감염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도시밀도가 갖고 있는 미덕은 악이 되었다.

코로나19는 사회공동체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아이디어인 도시생활을 기초에서부터 잠식해 붕괴시키고 있다. 도시의 거리, 공유 주택, 공공공간에 대한 개념은 일종의 ‘집합적 생활의 선호’에서 진화해 왔는데, ‘집합적 생활의 선호’는 우리가 모두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팬데믹은 ‘집합적 생활의 선호’를 먹이로 끊임없이 번창한다. 코로나19는 반도시적이며, 군집하려는 우리의 충동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사회적 거리두기”는 상호교류를 원하는 우리의 열망과는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이며, 또한 도시, 광장, 지하철, 초고층 건물을 건설해온 인류의 도시문명 배치 방식에도 역행한다.

도시문명은 집합적으로 점유되었을 때 생기가 돌도록 디자인 되었다. 많은 도시시스템이 타당하게 작동하기 위한 적정밀도의 확보는 미덕이었지, 혐오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긴급성은 관광객으로 붐비던 경복궁 마당을 텅 비웠으며, 종교시설,체육시설,유흥시설에의 접근을 금지시켰고, 전국의 초.중.고. 대학의 캠퍼스가 문을 닫게했다.

그러나 “과밀”이냐 “사회적 거리두기”를 선택하느냐의 양자택일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언제나 “과밀”을 이겨왔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과밀”의 즐거움과 작별을 고해야 할 지 모른다. 도시의 활력은 우리 문명의 위대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밀”의 즐거움은 이 비극의 계절이 끝나면 되돌아 올 것이라고 우리 모두는 굳게 믿고 있다.

서울시립대 겸임교수/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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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조재성 주주통신원  globalcityrn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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