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4

89년 6월, 공안당국과 관제언론은 학생 투신 사건을 의도적으로 악용했다. 선의의 '위로 편지'를 악의적으로 편집해 전교조 교사들에게 정신적 테러를 가했다. 나아가 전교조 교사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난하여 일반 국민과 분리시킴으로써 전교조를 고립시키려고 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집요할 정도로 공격적이었고 잔인할 정도로 전교조 교사들을 물어뜯으며 흠집 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은 학교장이 형사 고소하여 구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고 이튿날 풀려나면 아침에 곧장 학교로 출근하여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6-7월을 힘겹게 싸웠다.

어느 날은 비이성적인 언동을 일삼는 학부모들로부터 심한 폭언과 난폭한 행동 앞에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교문 앞에서 경찰차에 연행돼 간 적도 있었고 난동을 부린 학부모들이 폭력으로 고소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유치장 칠판엔 전교조 교사들 이름 옆에 '폭력' 혐의자로 적혀 있었다.

전교조 교사들이 불특정 학부모들에게 심한 폭언과 함께 할퀴고 얻어맞았음에도 거꾸로 조합원 교사들은 '폭력' 혐의자가 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엔 낯이 익은 KBS기자가 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와 취재해 간 적도 있었다.

교원노조에 대해선 당시 국민들 사이에 반대 여론이 있을 수 있고 적지 않았을 거라고 보았다. 관제언론의 이념 공세가 아니더라도 보수적인 교사들 사이에서조차 교원노조를 건설한 전교조 교사들을 대놓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교조 교사들이 내세운 '참교육'을 두고 "그러면 이제까지 우리들은 거짓교육을 했단 말이냐"고 흥분하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구로고 교사들 중에서 있었고 전교조 교사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그런 말을 들으라는 듯이 우리들 앞에서 내뱉기도 했다. 결국은 역사정의의 문제였다. 식민지 교육과 봉건교육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역사의 나쁜 유산이었다.

그러나 1988년 조사에서는 전국적으로 74%에 이르는 절대 다수 교사들이 교원노조 건설의 필요성에 찬성했다. 전교조 결성 이듬해인 1990년 한국교육연구소 설문조사에서는 전체 교사 96%가 '전교조를 인정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전교조에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게 당시 여론지형이었다.

실제로 공안당국의 무자비한 탄압 와중에도 전교조에 기대와 희망을 거는 국민들도 많았다. 극심한 탄압을 뚫고 교원노조를 건설해 낸 전교조가 출범 당시 내건 이념이 '참교육'이었다.

그리고 '참교육'을 지향하는 전교조가 내건 교육개혁 슬로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교현장에서 '촌지문화'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촌지문화' 근절을 표방한 전교조에 대해선 국민 여론이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만큼 학교문화 가운데 '촌지문화'가 오랜 관행처럼 깊숙이 뿌리를 내렸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치맛바람과 촌지, 바로 교사에게 돈 봉투 건네주는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왔던 수십 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사들이 거절했음에도 막무가내로 건네거나 아니면 선물에 봉투를 슬쩍 끼워 넣어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전교조 교사들은 일일이 편지를 써서 돌려보냈다. 그것이 당시 20-30대 젊은 전교조 교사들이 보여준 교육자로서 삶의 자세였다.

부교재인 참고서 채택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관행이었지만 전교조 교사들은 업자로부터 채택료 받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비록 내부에선 교사들 간 갈등이 있었음에도 학교현장에서 깨끗하게 씻어냈다.

오늘날 눈을 씻고 봐도 촌지는 물론이고 부교재 채택료를 받는 교사들은 없다. 2016년 김영란법이 적용되던 시절 훨씬 이전부터 교직사회는 상당히 정화돼 있었다. 적어도 공립학교에서는 그러했다.

나아가 '교장의 명'에 따라 아이들을 지도하는 게 아니라 '법'에 따라 지도하도록 교육법 개정을 이끌었다. 교원인사위원회 설치를 비롯해 학교민주화를 주도했던 것도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교조 교사들의 등장은 교직원회의의 풍경을 일신시켰다. 지시와 전달, 협조란 이름으로 그냥 교무수첩에 받아 적던 시절에서 벗어나 교육문제에 대해 토론문화를 일구어냈다. 비록 '벌떡 교사'란 소리를 들었지만 '침묵의 문화'가 지배하던 교직원회의를 토론이 있는 진정한 회의로 바로 세우기 위해 끝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교사문화를 수평적인 학교문화로 정착시키는 데도 전교조 교사들의 노력이 컸다. 왜냐하면 교육은 동등한 인격적 관계에서 맺어지는 자율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굳이 페스탈로치를 언급하지 않아도 교육이 무엇인지 교육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사색하고 학교현장에서 번민한 교사라면 충분히 수긍할 내용들이었다. 더구나 페스탈로치가 '스위스 교원노조의 아버지'였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학시절 흔히 듣고 외우던 존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사조나 아동중심주의 교육사상 역시 모두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론에 맞닿아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 각국으로부터 심지어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교육자와 교육학자들이 참관한 페스탈로치 교육은 근본적으로 루소의 교육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고 이 또한 대학 시절 배우는 내용들이었다. '아이들은 망원경을 거꾸로 놓고 본 어른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그 시절 교사라면 누구나 학습했던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학교현장에선 학생들에 대해 체벌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 머리통을 쥐어박거나 뺨을 때리는 체벌이 묵인되었다. 엎드려뻗쳐나 단체 얼차려 등 체벌을 행사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았고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다수의 교사들은 방관했다.

모두 봉건적 성격의 학교문화가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민지 교육과 군사문화가 학교 교육 전반에 깊이 스며든 결과였다. 어떻게 그런 모습을 두고 순수함과 열정이 넘친 20-30대 청년교사들이 모순된 현실 앞에서 번민하지 않았겠는가!

아이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가혹했다. 일상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학교문화 속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살아야 했다. 나아가 학벌주의로 강고한 한국사회 현실에서 '공부=입시교육'이었다. 매년 100명에 이르는 꽃다운 어린 목숨들이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교육현실을 '정상'이라고 이야기할 순 없었다.

특히 86년 초 서울사대부속여자중학교 3학년 O양의 편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끝내 유서가 되었지만 수많은 이 땅의 교사들의 양심을 뒤흔들었다. 80년대 교육운동을 하던 교사들에게 O양(당시 15세)의 편지는 1970년 절망적인 노동현실의 높은 벽에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죽음으로 항거한 전태일의 분신에 버금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 한국의 페스탈로치 이오덕

이오덕은 절망의 시대! 죽음의 교육이 지배하던 시대, 아이들의 눈으로 <병든 교육>, <거짓교육>을 증언했다. 실천적 교육운동가로서 이오덕은 <오늘의 시대, 교사란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시대의 스승이다.

(사진출처 : 한겨레 신문사)

한국의 페스탈로치 이오덕 선생님도 O양의 편지를 접하고 너무나 가슴을 아파했다. 교육 운동하던 교사들조차 참회하는 성명서를 낼 정도로 이 땅의 교사들은 자신들을 자책했다.

1986년 전두환 5공 정권 아래에서 처음 등장한 '교육민주화 선언'(1986)은 그런 자책과 성찰의 결실이었다. 비록 불의한 군사정권으로부터 징계의 칼날을 피하진 못했지만 이 땅의 교사들이 시대의 교사로서 교사의 길을 스스로 깨우친 장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 전두환 5공 정권 시절인 1986년 5. 10 <교육민주화 선언>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로서 부끄러움을 사회적으로 고백한 최초의 선언이자 이 땅의 교육자로서 집단적 자기성찰이었다. 5공 정권은 서명한 교사들을 징계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러한 시대 모순 속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파면, 해임이라는 징계의 위협과 구속 등 형사 처벌이라는 탄압의 칼날 앞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투경찰이 쏘아대는 페퍼포그 차량 다연발탄이 난무한 거리 시위에서도 고개를 들고 군부정권과 맞섰다.

최루탄과 함께 쏜살같이 달려드는 백골단이 휘두르는 쇠파이프 앞에서도 교사들은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부르며 의연했다. 끌려가면서도 외쳤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 비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시 교원노조 건설! 바로 '전교조 사수 투쟁'은 시대의 소명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학생 투신사건 직후 휘몰아친 거친 탄압 국면에서도 구로고 전교조 교사들은 살얼음을 걷듯 매일매일 긴장하며 교사로서 최선을 다해 분투했다.

'교사가 성직이자 전문직이지 어떻게 노동자일 수 있냐'며 연일 문교당국과 수구언론의 악선전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틈만 나면 말로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고 떠들었지만 눈앞의 현실에서는 정반대였다.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을 '악질교사'라고 멱살을 잡고 할퀴며 때렸다. 예로부터 스승은 군주나 부모와 같다며 군사부일체를 부르짖던 그들 주류집단은 전교조 교사를 향해 '이 새끼, 저 새끼' 욕설을 퍼붓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더구나 교원노조 건설이 그들 반민주세력의 선전처럼 교사들 봉급을 올리며 집단 이기심을 채우려고 만든 게 아님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1989년 6월 26일자 학부모에게 보낸 전교조 구로고 성명서에는 권력과 학교당국의 "음모에 흔들리지 말고 교직원 노조 교사들의 양심의 외침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사랑과 정의와 진실의 부름에 함께 해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실제로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 학부모들에게 보낸 6/26일자 성명서에는 이런 내용들이 담겨있다.

"학교를 입신출세의 사다리쯤으로 여기는 천박한 교육관, 진실된 관심보다는 몇 푼의 촌지로 자식교육을 끝내려는 일부 학부모들, 성적을 비관하여 꽃다운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학생들, 입시경쟁교육 속에서 좌절하며 온갖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들,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인간적인 콩나물 교실, 문교당국과 교육 관료들은 아직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양심적인 교사들을 교직에서 내어 쫓는 데 앞장서고 있는 병든 현실 속에서 누가 무어라 해도 이제는 아이들을 가장 가까이 대하고 가장 사랑하며 걱정하는 교사들이 이 땅의 교육을 온 몸으로 지키며 가꾸어 가야 한다는 뜻에 학부모님의 깊은 이해와 관심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늪처럼 고여 썩어가는 이 땅의 교육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 아파하면서도 학생들이 참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참교육에 대한 불타는 의지를 다졌던 89년 전교조 구로고 교사들의 호소문은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망나니처럼 칼을 휘둘러대는 문교당국과 학교의 징계남용으로 양달섭 선생님은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을 주도했다 하여 6/23일자로 파면 당했다. 그러자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는 계속되는 조합원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저지시키기 위한 투쟁과 함께 조직의 결속을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89년 6월 들어서 전교조 본부 지도부 교사들에 대해 구속과 파면으로 강도 높게 탄압이 들어오기 시작한 탓이다. 구로고 현장에서도 양달섭 선생님에 대한 파면 조치로 탄압이 가시화되자 탈퇴 각서를 쓰는 등 조직에서 이탈하는 교사들이 연일 증가하였다. 부득이하게 동료교사 파면과 학교장의 교사 고발, 그리고 경찰서 연행 등 탄압에 맞서 교사들은 고민했다.

▲ <전교조 구로고 분회 탄압 분쇄와 양달섭 선생님에 대한 징계 철회>를 촉구하며 6/27 단식농성에 들어간 이재선, 하성환 두 교사가 낸 성명서, 이틀 후 윤석룡, 김주영 선생님이 단식농성에 합류했다.(출처 : 하성환)

전교조 분회 차원에서 단식을 시작하기엔 결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리하여 먼저 개인 자격으로 6/27일 이재선, 하성환 두 교사가 탄압에 맞서 단식을 시작했다. 그러자 이틀 뒤 6/29일 김주영 선생님, 윤석룡 선생님이 '전교조 구로고 교사 18명 중징계 결정' 보도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6/27일자 개인 자격으로 항의단식을 시작한 이재선, 하성환 두 교사가 천명한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중략)...현정권과 문교부, 대한교련 등 교육모리배들은 교원노조의 참뜻과 순결한 의지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왜곡하며 짓밟아 오고 있다. 이는 역사의 정당한 진로를 막으려는 광란의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구로고 분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하여 동료교사가 파면당하고 학교장이 교사들을 고발하여 연행이 되고 일부 극소수 학부모들이 동원되어 교내에서 공공연한 교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으며 시교위의 지시에 의해 전교조 발기인 교사들에게 징계와 전교조 탈퇴의 양자택일이 강요되고 있는 현 상황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이하 생략) - '단식 농성에 들어가며' 6/27일자 성명서

부득불 전교조 구로고 분회에서는 학교 인근 갈릴리 교회에서 1박 합숙을 하면서 내부 결속을 다졌다. 구로고 분회 전교조 교사 가운데 김주영 선생님과 윤석룡 선생님 두 분은 명동성당 단식 농성단 투쟁에도 합류했다. 군부정권의 탄압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자행되자 전국의 전교조 교사들이 항의 차원에서 서울로 집결하여 명동성당 집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명동성당은 87년 6월 항쟁 시절에도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 학생들을 보호해 주었던 공간이었다. 전교조 역시 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의 모습을 기억하고 집결했던 것이다.

▲ 독재권력의 탄압에 맞서 1989년 7/26 ~ 8/5일까지 11일 동안 전국의 전교조 교사 6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여

단식 투쟁을 전개했다(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명동성당 단식 농성 투쟁은 89년 7/26일부터 8/5일까지 11일 동안 전개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600명이 넘는 전교조교사들이 공안당국의 탄압에 항거하며 치열하게 싸웠다. 무려 250명이 넘는 교사들이 탈진했고 15명은 병원으로 실려 갈 정도로 뜨겁게 싸웠다.

필자는 당시 첫 아이 산달을 코앞에 둔 때라 농성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다만 단식 농성 중인 동지들을 응원하고자 가끔씩 원천봉쇄를 뚫고 성당 경내로 잠입하였다. 한 번은 양달섭 선생님과 2층에 있는 중국 음식점 식자재 창고 속으로 들어가 좁은 창문을 넘어 명동성당으로 무사히 기어들어간 적도 있었다.

단식 농성 투쟁 중인 교사들은 더운 여름날 천막동에 쓰러져 있거나 그나마 몸이 괜찮은 교사들은 제자의 안부 편지에 답장을 써주곤 하던 모습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독재 권력의 탄압에 맞서 그 해 여름 뜨거웠던 7-8월 명동성당 단식 농성 투쟁에도 불구하고 징계의 칼날은 교활했고 또한 잔인했다. 문교당국은 장학사를 동원하여 회유하거나 중풍으로 병중에 계신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탈퇴를 집요하게 강요했다.

심지어 말기 암 투병 중인 노부모를 생각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탈퇴 각서를 쓴 전교조 교사에게 마지막 남은 교육자의 자존감을 짓뭉개는 확인사살도 저질렀다. 학무국장이 직접 전화하여 탈퇴 사실을 확인하는 만행을 천연덕스럽게 자행한 것이다. 학교장 구00는 자신의 서울대 지리과 후배인 이서복 선생님(전교조 해직교사)을 불러 마치 후배를 아끼는 듯이 탈퇴를 회유하기도 했다.

학교당국은 행정실 직원을 시켜 매일 징계의결 요구서를 끊임없이 작성해 시교육위에 올렸다. 그리고 시교위는 발 빠르게 탄압의 강도를 높여 8/1일자로 구로고 전교조 교사 10명을 한꺼번에 직위해제를 단행하기도 했다. 또는 2차 징계위에 출두한 교사에게 탈퇴를 강요하며 끊임없이 조직의 분열을 시도했다.

심지어 결혼식 주례를 섰던 주임교사를 동원하여 탈퇴를 종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신영준, 김승수, 김을식 세 선생님은 학교당국의 간교한 술책으로 탈퇴했다가 신영준, 김을식 선생님은 재가입을 선언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결과 8/7일 현재 탈퇴하지 않은 조합원은 10명만 남았다. 무려 26명이 탄압과 징계 위협 그리고 갖은 회유와 술책으로 눈물을 머금고 조직에서 형식적으로 이탈했다. 그만큼 교원 노조 건설 과정은 탄압이 극에 달했고 방해 공작 또한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 '북침설 교사'로 조작돼 고난을 겪은 강성호 선생님이 30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는 기자회견 장면(2020. 1/31) 전교조 결성을 나흘 앞둔 1989년 5월 24일 충북 제원고 강성호 선생님(일본어)은 교장실로 불려가 제천경찰서 대공과 소속 형사들에게 강제 연행된 뒤 구속됐다. (출처 : 전교조 충북지부, 교육희망 기사)

전교조 교사를 '빨갱이 교사'로 모는 것은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다. 실제로 불의한 권력은 전교조 결성 직전 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공작으로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전교조 결성 6일 전인 5/22일 조태훈 선생님(서울 인덕고) 5/24일 강성호 선생님(충북 제원고), 5/26일 이수찬 선생님(경북 영주 동산여중)을 북한 찬양, '북침설' 수업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학생들은 교사와 달리 징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학교당국에 맞섰다. 6/3일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 당시 운동장에서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전교조 구로고 분회 창립'을 지지하는 농성을 전개했다.

▲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을 주도했던 양달섭 선생님에 대한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며 구로고 학생들이 89년 6/12일 운동장에서 항의집회를 하는 장면(출처 :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리고 6/10일엔 학생 비상총회를 개최하여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결의했다. 6/12일엔 '직위해제 철회와 의식화 매도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구로고 학생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항의 차원에서 운동장 집회를 개최했다.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을 돌려주세요'라고 쓴 문구를 보면서 집회 광경을 지켜보던 교사들은 마음 속으로 울었다.

6/13일 H.R시간엔 학생회 주관으로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2,000여명 서명운동을 마쳤다. 그리고 운동장에선 분노한 2, 3학년 동아리 학생들이 학생회를 배제시킨 채, 2,000명이 넘는 항의집회를 주도했다. 6/13일 운동장 집회는 학생회는 물론 학교당국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리고 급기야 학생회장과 총무부장이 투신하는 극한투쟁이 발생했다.

또다시 6/14일엔 구로고 학생 2,000여 명이 운동장에 모여 학생 투신에 대한 학교장의 사과와 해명을 촉구했다. 더불어 학교당국의 일방적인 휴교령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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