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양달섭 선생님 지키기와 전교조 참교육 지지 투쟁 6

자주적인 구로고 학생회의 '참교육 지지 투쟁'은 해를 넘긴 1990년에도 여전히 빛을 발했다. 4월 혁명이 다가오자 구로고 7기 학생회에서는 학교신문 창간호 『구로학생회보』를 1990년 3월 15일 발간했다.

그리고 이어서 4월 혁명 30돌을 맞아 4・19혁명 기념식을 학교당국에 요구하여 방송으로 거행했다. 제7기 학생회장 전원근 군의 사회로 학생들 전체 묵념과 4월 혁명 기념탑 비문 낭독이 진행되었다. 각 교실에는 하얀 국화가 한 송이씩 꽂혀 있어서 추모의 분위기를 더했다.

그런데 방송으로 훈화하던 학교장의 발언이 문제를 일으켰다. 학교장의 훈화내용인즉 이승만 박사를 찬양하는 것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겸손한 분이며 훌륭한 일을 하셨다"라고 찬양하며 "4월 혁명 당시 물러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마음이 좋아서 물러나 주어 4월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극찬하여 내내 방송을 듣던 학생들은 하나같이 분노했고 허탈해했다.

직선제 학생회와 별도로 동아리 활동을 주도했던 선진적인 학생 김용우, 이광민 학생그룹은 4・19혁명 전날 학생회와 별개로 4월 혁명을 기념하는 유인물 1,500매와 대자보를 준비했다. 그들 3명의 학생들은 4/14일 학생 3명이 초안을 작성해서 4/15일에 초안을 완성했다. 4/16일 유인물을 인쇄했고 4/17일 배포방법과 대자보 부착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검차 4/18일 저녁 구로동 도로공원에 모여 논의하던 중 저녁 8시 10분 경 구로경찰서 강력계 형사에게 적발되어 구로경찰서로 연행당한 뒤 조사를 받았다. 이광민 외 두 명의 학생들은 4/19일 새벽 2시에 훈방 조치돼 경찰서 문을 나섰다.

4・19 유인물 관련 구로고 학생들 경찰서 연행 건은 4/19일 아침 CBS 뉴스와 동아일보 석간으로 보도되었다. 학생들이 만든 유인물은 4・19혁명 전개과정을 서술한 것이 분량의 3/4을 차지했고 1/4은 학교교육의 모순과 학생회 활동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었다.

8절지 1면 크기 분량으로 제목은 '4・19혁명 30돌을 맞이하여'로 시작했다. 유인물을 만든 주체는 '구로고 민주혁명 구국결사대'란 명칭으로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 3명이 배포할 예정이었다.

관련 학생들 3명은 4/20일 학생부로 불려가 아침부터 수업도 받지 못한 채 조사를 받았다. 학생부 교사 가운데 오00 교사(교련, 학생주임)는 "학생들 얘기는 다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고 비난했다. 김00 교사(체육)는 "자아도취"라고 표현했고 이00 교사(국어)는 "학교에서 청소하는 학생들이 너희들 그런 행동보다 더 훌륭한 일"이라며 관련학생들을 책망했다.

관련 학생들은 4/21(토) 수업이 끝난 뒤에 학생부실로 호출을 받았으나 가지 않았다. 4/23(월) 학교당국은 학생들이 만든 유인물 가운데 학교교육을 비판한 내용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심지어 조사과정에서 학생부 교사는 대장-조직원 칸을 만들어 조직구성원을 댈 것을 강요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짓을 기도하기도 했다.

문제는 중간고사를 앞두고 90년 5/4일 관련학생 전원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결정했다. 징계 사유와 징계대상 학생의 명단도 없이 공고가 나붙었다. 더구나 징계 사실이 집으로 통보되지도 않았다. 그러자 관련학생들은 징계를 거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중간고사가 끝난 5/15일 항의농성에 돌입했다.

7기 학생회에서도 징계가 부당함을 알리며 성명서를 발표한 뒤 학교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학생대표의 면담 요구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학생회에서는 5/15일 스승의 날 기념식을 마친 뒤, 학생총회를 개최해 학교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려 했으나 마이크 고장과 학교 측 저지로 항의집회가 무산되었다.

문제는 학교당국이 말썽을 일으키며 화를 자초했다. 이승만 찬양 훈화도 훈화지만 5/15일 항의집회를 주도한 학생회장단을 자격정지 처분을 단행하고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것이다. 전원근 군(학생회장, 3년)과 이기현 군(부학생회장, 3년)은 진술서 쓰기를 완강히 거부했고 오히려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면 삭발, 단식 등 투쟁의 강도를 높여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를 표명했다.

나아가 학교장이 시국이 불명확하다며 거부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총학생회가 주관해 시청각실에서 기습적으로 행사를 강행했다. 동아리 학생들도 학교당국의 횡포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10여 차례 뿌리면서 학교의 반교육적인 탄압에 지속적으로 항거했다.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5/17일과 5/21일 교문 앞 연좌농성에 참여하면서 학교당국의 반교육자적인 처사와 횡포를 널리 알리고자 애썼다. 5/17일 연좌농성에는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며 학교의 부당징계를 규탄했다. 특히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은 학생들 앞에서 소신을 발표한 뒤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5/21일 연좌농성에는 1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교문 밖에서는 해직교사와 학부모, 동문 30여 명이 합세하여 OMR 성적 카드 적립금 관련해 학교당국의 공금 횡령 등 학내비리를 규탄하며 강고하게 연대했다.

▲ 1990년 5월 구로고 학생 징계저지 투쟁과정에서 <해직교사-학생-학부모> 연대투쟁 활동 기록지(출처 : 하성환)

학생-해직교사-학부모 연대회의는 비대위를 구성하여 여러 차례 탄압에 대응하는 회의를 열었다. 5/16일 학부모들은 각서를 요구하는 학교당국의 요구에 협상 결렬을 선언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해직교사들은 '참교육'지를 배포하고 구로고 동문 대책위 건설 준비위를 발족시키며 5/17~5/25 기간 동안 2차 투쟁계획을 논의했다.

5/17일 아침 등교시간에 해직교사들은 '참교육'지를 나눠주었으며 점심시간을 이용해 학부모회 소속 27명과 함께 학교를 항의방문한 후 교문 앞에서 피켓시위를 전개했다. 이 날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이 항의 차 도움을 주셨고 특히 86년 4월 신림사거리에서 이재호 군(서울대 정치학과 4년)과 함께 전방 입소 군사교육 반대를 외치며 분신 자결한 김세진 군(서울대 미생물학과 4년) 어머님이 직접 오셔서 항의방문에 힘을 보태주셨다.

결국 5/25일로 예정된 징계위원회가 서너 차례 연기되었다가 무산되었다. 학생회장과 부학생회장에 대한 징계 협박을 학생-해직교사-학부모의 연대로 끝내 무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4・19 혁명 관련 구로경찰서에 연행된 고등학생운동 그룹 학생들 징계 건도 교장 직권으로 무기정학이 해제되면서 반성문과 각서를 쓴 1명에게는 유기정학 1일을, 그리고 끝까지 각서를 쓰지 않은 2명에게는 징계의 구체적인 기록 없이 사고결 2일로 종결시켰다.

불안하고 부분적인 승리였지만 그래도 학생과 해직교사, 그리고 학부모의 연대 투쟁 끝에 이룩한 소중한 승리였다. 1990년 당시 서울지역 어느 학교에서도 4월 혁명 기념식이나 5・18 광주항쟁 기념식을 거행한 학생회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4월 혁명 기념식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5・18 기념행사는 학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학생회에서 기습적으로 치러냈다는 사실은 90년 당시 구로고등학교 학생들의 자치역량이 얼마나 높은 수준으로 형성돼 있었는가를 가늠하게 하는 소중한 지표였다.

실제로 구로고 학생들과 졸업생들 가운데엔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에 헌신적으로 뛰어든 인재들이 많았다. 89년 해직 이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을 우연히 전교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구로고 졸업생이었다.

그런가하면 89년 당시 중앙대와 한국외대 단과대 학생회장 역시 자랑스럽게도 구로고 졸업생들이었다. 그들 구로고 졸업생들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었다. 모두 80년대 중후반 변화된 정치 환경 속에서 구로고 학생들 스스로 학생자치역량을 축적한 결실이었다.

▲ 87년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킨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오늘날 민주인권기념관) 전경(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칙칙한 쥐색 건물 5층이 유독 창문이 작다. 고문실로 쓰인 공간이었다. 한국 건축 1세대 김수근이 1970년대 중반 설계한 건물이다.

구로고 학생들은 80년대 중반 학내 비공개 동아리 활동과 84년-85년 정치적 유화국면을 배경으로 86년 직선제 학생회칙 개정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87년 6월 항쟁을 시대 배경으로 직선제 학생회칙 개정을 이뤄냈다. 이어서 87년 12월 구로구청 항쟁과 88년 4월 총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구로고 학생들은 다수가 직접 참여하거나 적잖은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학교당국의 방해 공작을 이겨내고 20% 성적제한 규정을 한시적으로 유보시킨 채, 직선제 학생회장을 당당히 세웠다. 모두 학생대중의 자주의식의 발로이자 자치역량의 승리였다. 서초동 꽃동네 공부방 봉사활동과 합법적인 상록독서회 연합서클 활동 그리고 대림제일교회 지역사회운동에서도 구로고 학생들은 선구적으로 열성을 다해 참여하고 고등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학생들의 성숙한 자치역량은 89년 6-7월 '전교조 사수 투쟁'과 '참교육 지지 투쟁'과정에서 놀라운 투쟁 역량으로 발휘되었다. 89년 6-7월 구로고 학생들의 '참교육 지지 투쟁'은 이후 서울지역 전체 학교로 전파되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학교에서 학생회 직선제 쟁취를 학교당국에 촉구하면서 학생들의 자주성이 고양되는 역사적 경험을 나누었다.

▲ 89년 6/12일 <양달섭 선생님 직위해제 철회>를 촉구하는 구로고 학생들의 항의 집회 장면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 아카이브)

나아가 구로고 학생들의 참교육 지지 투쟁은 연일 뉴스거리가 되어 언론을 타면서 전국적인 중고교생 학생투쟁의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요컨대 80년대 후반 구로고 학생들의 자치역량과 참교육지지 투쟁은 향후 고등학생 운동을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90년 6월 3일 전교조 구로고 분회 해직교사와 현장조합원들은 전교조 분회 창립 1주년을 맞아 '민족의 교사'로서 불의에 저항하며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했다. 여기에 성명서 전문을 전재한다.

 

 지금은 서로에게 고통뿐이지만

- 전국교직원노조 구로고 분회 첫돌을 맞으며

오늘도 아이들을 올바로 키우기 위해 부러지는 백묵에 또다시 온 힘을 주는 선생님들께 한없는 애정과 존경을 보냅니다. 아무리 짓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들불처럼 참교육 실현을 향한 견결한 의지와 열정은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꺾을 수 없음을 지난 1년간의 투쟁 속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간을 정직하게 사랑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그 영혼을 보살피기에 진이 다하도록 애쓰시는 선생님들, 진정 이 땅의 교사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속에서도 아이들 사랑하기에 여념이 없는 선생님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민족의 교사로 당당히 서 있기를 고집하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해직교사들은 지난 1년 간 이 땅에 교육의 민주화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하여 한 치의 타협도 없이 투쟁해 왔습니다.

때로는 백골단의 쇠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기도 했고 닭장차에 쳐박히기도 수없이 당했습니다. 온 몸을 집단 구타당하여 몇 달을 후유증으로 고생하며 통원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장의 고발로 8명이 불구속 형사 입건되고 1명이 구속되었으며 2명이 불구속 기소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편, 저희들을 탄압, 음해하는 데 음으로 양으로 앞장 선 자들이 주임이 되고 교감이 되며 교장이 되었다는 소식도 접했습니다. 참으로 생각하기조차 고통스러운 고난과 환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세 값이 폭등해 인천으로, 전세방으로 전전하신 분이 있으며 생계의 위협으로 직접 생활 전선에 뛰어든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통과 고난은 주변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단을 참혹하게 빼앗긴 그날 이후 우리 해직교사들은 현장에 남아계신 많은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오직 학교의 민주화와 교육의 민주화, 나아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신명을 바치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매달 보내주시는 수십 만(전국적으로 수억대)의 후원금에 힘입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또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연구와 실천, 그리고 투쟁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비굴하게 복직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빼앗긴 교단을 40만 교사의 단결된 힘으로 다시 빼앗을 때까지는 결코 복직을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힘없이 부러지는 백묵에 다시 힘을 주며 가느다란 목소리 더욱 높이는 선생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드리면서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분투하길 빌겠습니다. 저희들 역시 뜻을 굽히지 않고 거짓과 불의에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참교육 실천 2년 6월 3일 해직교사 7인 일동

 

마찬가지로 전교조 구로고 해직교사들은 거리의 교사가 된 지 1년이 되었을 때 구로고 제자들에게 '교직이 싫어서 학교를 떠난 게 아님'을 고백했다. 나아가 교육모리배들의 선전처럼 '학교를 투쟁의 장으로 만든 악질교사'가 아니고 더더욱 '조용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드는 교사가 아님'을 천명했다.

오직 이 땅의 교육민주화를 위해 결연히 싸워나갔고 언젠가 반드시 교단으로 돌아갈 것임을 약속하는 편지글을 1주년을 맞아 띄워 보냈다.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해 올린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의 제자들에게

- 전국교직원노조 구로고 분회 첫돌을 맞으며

이 글을 쓰는 선생님은 여러분을 잘 모릅니다. 그것은 작년,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불의한 정치권력에 의해 강제해직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시간도 여러분들과 같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사랑하는 지식인지 의미 있게 공부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들의 이름도, 얼굴조차도 모르는 해직교사, 바로 거리의 교사들입니다.

간혹 우리를 험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전교조 교사는 교직이 싫어서 학교를 떠난 사람들"이라고 또는 "학교를 투쟁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악질교사" 내지 "조용한 학교를 시끄럽게 하는 교사"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알 것입니다. 해직 선생님들을 나쁘게 말하여도 여러분들은 우리 해직교사들이 어떠한 선생이었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미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꾸짖을 때 거기에 애정이 담겨있는지 아닌지를 여러분들은 누구보다도 앞서 알 수 있는 것과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애정이 없는 교육, 그러한 가르침은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학생을 사랑하지 못하는 교육, 그리하여 학생 대하기를 마치 종이나 머슴 다루듯이 하는 그런 비인격적 교육을 여러분들은 싫어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삶을 고민하며 결정해 나가는 자주적인 학생이기보다는 학교 또는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생활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조국과 겨레의 앞날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고 아침마다 기다려지며 선생님이 정말로 좋아져 고교시절의 젊은 날들이 의미 있고 가치로운 것들로 소담스럽게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듬직한 인격이 나날이 성장하는 생활 속에서 조국과 겨레의 앞날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빼앗긴 교단이지만 우리 해직교사들은 구로고등학교를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얼굴과 이름도 모르지만 구로고 학생들을 멀리서 관심 있게 지켜보며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입시 공부만을 강조하는 메마른 학교풍토 속에서 마냥 주눅 들지 않으며 항상 젊은이다운 강직한 성품과 의로운 기개를 간직함에 힘써 옛 만주벌판의 독립지사들이 지녔던 원대한 포부와 순결한 마음으로 나라사랑, 학교사랑에 매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교육을 위해 싸우는 선생님들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바른 학문을 닦는 데 열심히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해직 선생님들은 참교육의 교단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이 땅의 교육민주화를 위해 결연히 싸워나갈 것입니다.

정직한 자만이 진실할 수 있고 용기 있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거짓과 싸우고 불의한 자들과 싸우며 이기적인 삶과 싸우면서 혀끝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반드시 교단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참교육 실천 2년 6월 3일

구로고등학교와 학생들을 사랑하는

해직교사 김승만 이인곤, 양달섭, 송인석, 이서복, 윤석룡, 하성환 씀

 

Ⅴ 맺는 말

전교조 구로고 분회 결성은 공립중고교 가운데 전국 최초이자 서울지역 초중고교 가운데 최초로 일궈낸 장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교조 서울지부(6/15), 강서남부지회(6/16)가 결성대회를 치르기 10여 일도 전인 6/3일 난관을 뚫고 창립하였다.

그런 만큼 전교조 사수투쟁 초기 국면에서 공안당국-문교부-시교위-학교당국-경찰의 전 방위적 탄압이 구로고등학교 한 곳에 집중되었고 교사-학생들의 희생 또한 컸다. 양달섭 선생님이 구속되고 이인곤, 하성환 두 교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형사처벌을 받았다.

89년 6/3일 36명으로 시작한 전교조 구로고 분회는 두 달 뒤 8/7일엔 10명으로 줄어들었고 9월엔 8명이 탈퇴각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제 해직되었다.

▲ 89년 8월 출근투쟁하던 양달섭 선생님이 중앙현관에서 제지당하는 모습(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직교사들은 거리의 교사가 되어 8월 개학과 동시에 출근투쟁을 하였고 학생들은 쫓겨난 선생님들을 보고자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굳게 잠긴 교문 앞으로 나와 서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 89년 8월 오류여중 출근투쟁 당시 해직교사와 학생들이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점심을 먹고 있는 모습(출처 : 교육희망)

출근투쟁 어느 날 김승만, 이인곤, 양달섭, 김주영 선생님은 굳게 잠긴 교문을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짜장면을 시켜서 먹기도 하였다. 매일 진행되던 출근 투쟁 와중에 일부 학부모들은 전교조 교사들과 언쟁을 벌이거나 감금 폭행하였으며 경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 1989년 8월 구로고 출근투쟁 당시 교문 앞에 연좌 시위 중인 김주영(학부모들에 의해 끌려 나오는 분), 이인곤(왼쪽 앉아 있는 분), 양달섭(오른쪽) 세 선생님들 모습(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출근투쟁 와중에 경찰차에 실려 경찰서로 연행된 경우도 발생했다. 늦게 출근투쟁에 합류한 해직교사들이 경찰서 유치장으로 면회를 오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되었다.

단 한 번도 역사청산이 없었던 한국사회 교육모순을 떠안은 채, 89년 전교조 교사들은 교원노동조합 건설로 교육모순에 저항했고 예상치 못한 권력의 가혹한 탄압에 맞서 싸웠다.

구로고 학생들 역시 자주적인 학생회 활동과 축적된 학생자치역량을 기반으로 전교조 교사들을 지켜내고 참교육을 요구하며 결연히 투쟁의 대열에 동참했다. 불의한 현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는 역사의 한 순간을 관통하며 89년 6월을 전후한 시기! 구로고 교사-학생 모두 치열하게 그 시대를 살아갔다.

89년 6월~7월 독재정권의 탄압을 뚫고 교원노조 사수 투쟁과 참교육 요구 투쟁이 당대 교육민주화 투쟁이었음은 역사가 기억한다. 또한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에서 전교조 교사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국가가 인정하였다.

생각하건대 89년 6-7월 투쟁은 교원노조 건설과 참교육 운동을 매개로 교육민주화를 열망하는 교사-학생의 연대 투쟁이었다. 나아가 지배세력의 견고한 교육모순에 균열을 가하며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이었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hsh7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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