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탁한 세상을 맑은 세상으로

한강변은 젊은 청춘들이 낭만을 즐기는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백성들이 휴식을 취하며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강을 정원으로 조성하여 백성에게 개방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왕으로서 이보다 더 뿌듯할 수는 없다.

게다가 왕 스스로 낭만적인 분위기까지 누릴 수 있다면 부러울 게 없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아리따운 여인과의 밀회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인과 나는 마치 오랜 지기라도 되는 듯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인류의 미래를 논하기도 하면서 달밤의 분위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초순진이라고 했다. 고구려의 후예들이 한강변에 거주하면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다양하게 성을 바꿨는데 여인의 선조들은 초씨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여인은 나에게서 한강왕위를 물려받으면 제일 먼저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고 북방과 만주벌판의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아! 이 여인에게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선유도의 밤은 깊어만 가고,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아래 순진과의 애틋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때 전임 한강왕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딸이 이렇게 소동을 피울 줄은 몰랐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 백일기도 후에 합방하기로 한 내용을 들었다며 흡족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소동으로 인해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군요. 백일기도 후에 합방하기로 하였다지요? 앞으로 더욱 왕실이 튼튼해질 겁니다."

이제 갓 왕위를 물려받아 아직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나로서는 왕의 딸과 혼인하므로써 왕위를 확고히 하고 한강왕의 정통성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저토록 예쁜 따님을 저에게 허락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전임 왕에게 감사를 표했다. 순진도 부끄러운 듯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마침 제례를 담당하는 예부에서 전임 한강왕의 호칭이 '호태종(淏兌宗)"으로 추서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위를 내려놓은 후에 왕의 치세와 성품을 담아 호칭이 정해지는 게 관례였다. 전임 왕인 78대 한강왕은 앞으로 호태종으로 불릴 것이다.

"감축 드립니다. 예부에서 이름을 아주 잘 지은 것 같습니다."

맑을 호(淏), 바꿀 태(兌)이니 '탁한 세상을 맑게 바꾸는 임금'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탁한 세상을 맑게 바꿨다는 평가는 왕으로서 듣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호태종(淏兌宗)이라!  흠! 마음에 드는구먼."

호태종은 매우 흡족해 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에 골몰한 듯 보인다. 멀리서 비밀경호단장이 호태종에게 다가와 뭔가 귓속말을 나누며 긴밀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호태종에게 따로 보고할 일이 있는가보다. 어찌된 영문인지 호태종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는 듯이 보인다.

밤이 늦어져 호태종 부녀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선유도의 정자로 행차를 했다. 그곳에서 밤하늘에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백일 후에 호태종의 딸 초순진과 혼례를 치르고 그녀를 왕비로 맞이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흥분되고 들떠 있었다.                              <계속>

 

편집 : 양성숙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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