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두번째 주인공 민준식(87, 안내면 동대리)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내면 동대리에 사는 민준식 씨(87)입니다. 민 씨의 장남인 민병관 서울시동작관악교육지원청 교육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육공무원입니다. 안내초, 안내중, 대전고를 거쳐 1979년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한 그는 경기고 교감을 거쳐 청량고, 양재고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이 기간에 한국국공립고등학교교장회 회장과 한국초중고등학교교장총연합회 이사장으로도 봉사했습니다. 교육부의 동북아역사문제대책팀장과 교과서선진화팀장으로 국가의 교육정책에도 관여했습니다. 현재는 전국교육장협의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그런 민 교육장에게 어린 시절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과 공간은 아버지 민준식 씨와 마을 뒷산인 덕대산입니다. 민준식 씨는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인 삭망(朔望)이 되면 동생과 교대로 형님댁에 살고 있던 아버지를 모셔다가 식사를 대접한 효행의 귀감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음 심(心) 자가 새겨져 있다는 덕대산과 함께 민준식 씨는 아들 민병관 교육장의 '큰 바위 얼굴'이 되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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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보수로 기술 배우던 이발소 옆 중학교

나는 1933년 옥천군 안내면 동대리에서 태어났다.

아버님(민영소)은 어머님(이계보)과의 사이에서 5남매를 얻었는데, 나는 셋째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80세가 넘는 조부님, 30세의 아버님, 31세의 어머님, 10세의 누님(달순), 6세의 형님(우식) 등 3대(代)가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3세와 7세가 되던 해에 남동생(만식)과 여동생(시자)이 태어났다.

아버님은 가난한 선비이자 학자였다. 가사는 뒷전이고 한문 서적만 읽었다. 집안일은 온전히 어머님과 누님의 몫이었다. 나는 아버님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1939년 안내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한글과 일본어를 함께 가르쳤지만 2학년이 되자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만 가르쳤다.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18세의 누님이 출가했고, 3학년이 되던 해에 15세의 형님이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철도국에 취직했다. 가사를 전담하던 어머니를 뒷바라지하는 일은 나의 몫이 되었다. 해방이 되어 한글을 배울 수 있게 됐지만 정작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너와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당시 졸업과 함께 중학교에 진학한 동창생은 5명에 불과했다.

낮에는 가사를 돌보고 저녁에는 아버님에게 한문을 배웠다. 당시는 식수도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우물에서 물지게로 퍼 날라야 했다. 가장 힘든 일은 겨울에 산에 가서 땔감 나무를 해오는 일이었다. 무거운 지게를 지고 내려오다가 산비탈에서 넘어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생들이 학교에 입학해 잔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게 될 무렵 나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옥천역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큰아버님이 영등포에서, 큰이모님이 북아현동에서 살고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감행한 상경이었다. 물어물어 이모부와 이종사촌형이 한약방을 운영하는 북아현동으로 찾아갔다.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둘째 이종사촌형이 이발 기술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소개해준 천연동의 한 이발소에서 5~6개월 동안 숙식만 제공받으며 무보수로 이발 기술을 배웠다.

이발소 옆에는 천연중학교가 있었다. 날마다 교복과 모자를 착용하고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나도 중학생이 되고 싶다.' 이발소 견습생 1년을 채우고 첫째 이종사촌형의 영수당 한약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처방전을 보고 한약 짓는 방법, 환자 진찰 방법 등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고향에서 배운 한문 실력에 날마다 관련 서적 보기라는 노력을 더하자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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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전방 사지(死地)에서 만난 옥천 사람들

서울 생활 3년이 지났을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남침 소식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그대로 있다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인민군에 끌려갈 판이었다. 자전거포를 운영하던 셋째 이종사촌형을 비롯한 일행 3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충남 아산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남행길은 위험천만했다. 미군 전투기가 피난민 속에 숨어든 인민군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에게까지 기총 사격을 해오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넘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서울 수복 소문을 듣고 귀경했다. 하지만 서울은 이미 참혹한 폐허로 변해 있었다. 18세가 되던 그해 12월 제2국민병 징집영장이 나오는 바람에 입대했다. 모질게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날, 부산행 후송열차 화물칸에 올라탔다. 그런데 열차가 연착되면서 하루 동안 옥천역에 머물게 되었다.

"부모님과 동생들 얼굴을 잠시만 보고 올 수 없을까요?"

옥천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친척을 찾아가 간청했다. 하지만 그는 "안부는 내가 전해주겠다"면서 '도피'와 '탈영'이라는 단어까지 거론하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부산진초등학교에서 고작 일주일 사격 훈련만 받고 곧바로 대구 보충대로 이송됐다. 거기에서 군복, 소총, 배낭 등을 지급받았다. 우리는 경북 문경으로 밀려 내려와 재편 중이던 2사단에 배속되었다. 32연대 1대대 3중대 화기소대로 편입된 나는 3분대장으로 선출됐다. 선출된 분대장들은 하사관 교육대로 보내져 별도로 3주간 강도 높은 특수훈련을 받았다.

우리 부대는 의성, 영천, 안동으로 북상하며 공비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충북 제천에서 잠시 쉬다가 경기 양주를 거쳐 마침내 최전선인 철의 삼각지대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이미 치열한 고지전(高地戰)이 펼쳐지고 있었다. 휴전 협상 동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와중에 젊은 병사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어느 날 전사자 대신에 보충된 신병들이 막사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익숙한 충청도 사투리였다. 너무나 반가워 밖으로 뛰어나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충북에서 왔습니다."

"옥천에서 온 사람도 있나?"

"있습니다."

"안내면에서 온 사람도 있나?"

그렇게 해서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정방리의 이해준을 시작으로 동대리의 조권승, 서대리의 전용림, 오덕리의 김용현 등 고향 선배들을 사지(死地)에서 만났다. 얼마 후에 '전용림 전사, 조권승 부상, 김용현 부상'이라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도 금성지구 전투에 투입됐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951년 12월 눈이 엄청 많이 내리던 날, 최전방 전초 소대까지 나가서 관측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임무 수행 중 전초병이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외쳤다.

"중공군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 구사일생, 시행착오, 전화위복, 인생역전

우리는 벙커에 갇힌 채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한 마디로 '독 안에 든 쥐'였다. 바로 그때 중부전선에 배치돼 있던 아군의 포병부대가 일제히 발포를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중공군은 우리를 버려두고 고지를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이 우리 옆에서도 사정없이 터졌다. 그때는 적군보다 아군의 포탄이 더 무서웠다.

여명이 동터 오르는 새벽 시간이 되자 중공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던 우리는 중공군을 피해가며 아군 진영으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포탄에 녹은 눈과 흙, 사람의 피와 살이 범벅이 된 골짜기는 두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돌아온 아군 진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대장이 겨눈 권총 총구였다. 중대장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관측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결처분 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소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책임은 명령을 하달한 저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중대장이 총구를 거두었다. 나중에 우리 중대 지휘관과 병사 전원은 방어선을 철저히 사수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침내 저승사자와 같았던 고지전도 끝났다. 그 사이에 나는 상사로 진급했고, 중대 인사계와 연대 인사계 등에서 행정 업무도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군대에 문맹자가 많았다. 그들을 위해 병영 안에 초등교육 과정을 설치하는 김에 중등교육 과정도 개설했다. 덕분에 나도 서울에 있는 동북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1956년 6월 나는 5년 6개월 만에 제대하고 군문(軍門)을 나섰다.

제대 이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나는 많은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듭했다. 기성복을 팔러 다니는 장돌뱅이(옥천), 영군부대(인천)와 미군부대(부평) 물건 떼어다 팔기는 물론이고 뻥튀기장사(김포)와 세탁소(대전)까지 해보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인수했지만 기계가 자주 고장 나는 바람에 잔뜩 빚만 지게 되었다.

실패만 거듭하던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고맙게도 동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갚으라며 채무를 청산해주었고, 서대리 방앗간 정찬수 씨의 보증으로 구입한 16마력 발동기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해 비가 많이 와서 보리가 썩은 데다 가뭄까지 들어 위기가 닥쳤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보리의 겉만 썩고 속은 썩지 않은 데다 보리가 가뭄으로 바짝 말라 오히려 도정의 효율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해에 채무의 절반을 갚을 수 있었다.

몇 년 후에는 채권자로 인생역전(人生逆轉)이 되면서 방앗간 옆에 번듯하게 새 집도 지었다. 그렇게 17년 동안 나름대로 부(富)를 일굴 수 있었다. 이후 지역사회의 다양한 부름을 받아 봉사하는 축복을 누렸다. 안내면 예비군 중대장, 안내농협 조합장(관선 연임, 민선 단임), 안내면유림회 회장, 안내면노인회 회장, 상록회 회장, 안내초총동창회 부회장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국 단위의 단체인 전국포도동우회 회장으로도 봉사했다. 200회 이상 지역 주민의 자녀를 위해 결혼식 주례를 선 것도 나에게는 큰 보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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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끝까지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나는 세 살 어린 이원면 지정리 출신 이범창과 사전에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하고 1956년 혼례를 치렀다. 이후 나와 함께 63년 동안 해로했던 아내가 2019년 3월3일 새벽 2시13분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아내를 선화원 납골당에 임시 봉안했다. 지난 4월20일 49재를 지내고 자식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장남은 하룻밤을 더 자고 이튿날 점심을 먹고 서울로 돌아갔다. 나만 홀로 남은 집이 참으로 허전했다. 초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남이 두고 간 글을 읽었다. '어머니와 함께한 우리 가족들의 마지막 762일 이야기'라는 제목의, 꽤 긴 글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읽는데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끝까지 읽었다. 자식들의 효심(孝心)이 이렇게 지극할 줄이야. 내가 4남매의 아버지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런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내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갈 때까지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나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4남매를 얻었다. 그리고 장남 병관(2녀), 차남 병필(1남1녀), 장녀 병례(1남1녀), 삼남 병석(2녀)이 6명의 손주(은솔, 은기, 소연, 영기, 가영, 유신)와 외손주(박성희, 박성준)를 낳아주었다. 나는 후손들에게 '근면, 성실, 화목'이라는 가훈(家訓)을 남겨주었다.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황민호 기자

 

희망, 도전, 성실, 온화를 배웠습니다.

■ 장남이 보내온 감사편지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님. 한동안 선선했던 날씨가 하순에 접어들며 많이 더워지고 있어 걱정입니다. 식사는 거르지 않으시는지, 잠은 편히 주무시는지, 무릎은 어떤지 걱정하면서도 생업을 이유로 고향집에 홀로 계시게 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가족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아버님의 일생을 감히 바로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선비집안에서 태어나, 적수공권으로 출발하시어, 한국전쟁의 수훈 유공자로, 농촌의 지도자로, 문중과 고향의 어른으로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신산했던 가난과,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가능성에 대한 용기 있는 도전을 해오셨고, 성실하고 진지한 삶의 자세로 이웃의 신망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의 여유와 품격, 멋을 지니셨고 따뜻한 인정과 온화한 덕성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저희 자식들은 그러한 아버님이 항상 자랑스러웠고, 자식으로 태어난 인연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사진첩으로 만들어 나누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다가오는 여름 더위 조심하시고, 식사 규칙적으로 잡수시고, 즐겁게 생활하십시오. 그리고 자식들에게 남겨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그때그때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맏이 병관 올림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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