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나무

문향관음(聞香觀音)이라. 향은 듣고 소리는 보라 했다. 아니 그래야 문인이요 선경에서 노니는 선인이라 여겼다. 사정이 그러하니 우리 같은 서민이, 귀는 코가 되고 눈이 귀가 되는 진귀한 경지를 알기나 하겠는가? 하물며 그윽한 매화의 향기, 암향(暗香)을 어찌 만질 수 있겠는가? 매화는 예로부터 함부로 벗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매화’를 검색하면 대개 관기(官妓)나 여종의 이름이 뜨고 ‘매실’을 검색하면 각종 약재(藥材), 공물(貢物), 조미료, 식재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1400년(정종 2년)에 일본 사신이 매화 한 분을 바친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임금이 종묘에 관제(祼祭 : 희생제물 위에 술을 붓는 제사)를 지내는데 백관을 거느리고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서 문안하고, 매화 1분(盆)을 올리고 태상왕에게 헌수(獻壽)한다. 또 1917년(순종 10년)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總督)이 알현한 후 팔삭매화(八朔梅畵) 1폭을 진헌(進獻)하였다. 이와 같이 매화는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접하기는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김홍도는 그림값으로 받은 3천 냥 가운데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여러 말의 술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을까?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1844)에 나오는 김홍도의 매화음(梅花飮)에 관한 행적이다(김허경은, 2020).

 

열매인가 꽃인가

 

“유기농 자연산 매실맛 보세요.”

“몸속 독소 제거에 특효약 매실!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면역 강화에도 큰 보탬을 줄 매실, 지금 주문하십시오.”

“올해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로 작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총 100 박스만 주문을 받습니다.”

“풀이 가득한 과수원, 초성재배 방식으로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매실이 주문도 하기 전에 군침을 돌게 합니다.”

인연치고는 검질기다고 할까.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이들이다. 용케도 번호를 알고 문자를 보낸다. “항상 저희 매실을 구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는 인사를 시작으로 호소문에 가까운 장문의 편지를 두 번이나 보내온 사람도 있다.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도대체 기억에 없다.

바야흐로 매실의 계절이다. 매실은 수확 시기와 가공법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양하다. 우선 수학 시기에 따라서 열매가 익기 전에 수확하는 청매와 완전히 익은 황매로 나뉜다. 청매는 껍질이 연한 녹색이고 과육이 단단하며 신맛이 강하다. 반면에 황매는 향이 좋고 과육에 독성이 없고 빛깔이 노랗다. 한편 가공법에 따라 청매를 증기로 찐 뒤에 말린 금매, 청매의 껍질과 씨를 없애고 한지로 싼 뒤에 짚불 연기에 훈증하고 말린 오매, 황매를 묽은 소금물에 절여서 건져서 말리고 다시 담그기를 5~10회 반복해서 햇볕에 말린 염매 등이 있다. 염매는 소금에 절인 다음 말린 것이라 겉에 소금기가 남아 희끗희끗하게 보이기 때문에 백매라고도 한다. 모두 효능이 다른 약재로 사용한다.

▲ 왼쪽 위로부터 시계바늘 방향으로 청매(靑梅), 황매(黃梅), 백매(白梅), 오매(烏梅), 금매(金梅)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매실뿐만 아니라 씨는 매인(梅仁), 잎은 매엽(梅葉), 가지는 매지(梅枝), 뿌리는 매근(梅根)이라 하여 나무 전체를 약용으로 이용했다. 향과 꽃을 관상하는 미적인 의미보다는 약효를 우선했다. 물론 매실나무를 두고 매화나무라고 부르는 까닭은 꽃을 강조한 표현이다. 관점의 차이다. 아무튼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서는 매실나무라 하고 매화나무는 '비추천명'으로 간주한다.

 

매우절과 매우틀

매우(梅雨)는 매실이 익어서 떨어질 때에 지는 장마라는 뜻으로 대략 6월 중순부터 7월 상순까지 지는 장마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즉 매실이 익을 무렵의 장마라는 뜻으로 매림(梅霖), 매림(梅林), 미우(黴雨), 매자우(梅子雨) 등 여러 가지 말로 통용한다. 그래서 매우절(梅雨節)은 매실이 누렇게 익을 무렵에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린다는 데서 나온 말로 초여름 무렵을 가리킨다. 올해도 매실은 어김없이 장마를 몰고 왔다. 지난 6월 12일 17시에 기상청 날씨예보는 아래와 같다.

“이번 주말에는 전국에 비 소식이 있습니다. 특히 남부지방과 충청남부는 굉장히 많은 비와 강한 비가 예상이 되고 있어서 (중략) 주로 전남과 경남 그리고 제주도가 시간당 30~50mm로 매우 강한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고요….”

▲ 기상청의 날씨해설(2020.6.12.)

그런데 조선왕이 대변을 보는 휴대용 변기를 매우틀이라고 한다. 이는 침전과 편전 그리고 정사를 보는 곳에 있던 이동식 화장실이다. 매우(梅雨)의 매(梅)는 '큰 것'을, 우(雨)는 '작은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매우틀은 매화(梅花)틀로 더 알려져 있다. 왕이 일을 보는 동안 내시나 지밀상궁이 곁에 지키고 있다가 명주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드렸다. 이렇듯이 임금의 변을 ‘매화’라고 해서 그것까지도 향기로움과 은은함을 강조했다. 하기야 옛날 어의는 임금의 대변을 관찰하고 맛보기를 서슴지 않았으니 오늘날 정상들의 그것까지도 극비로 여기는 풍조의 효시로 볼 수 있다.

▲ 매우틀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 사기나 놋그릇을 넣어 서랍처럼 넣고 뺄 수 있도록 했다. 매우틀은 가로 56.0cm, 세로 63.5cm이다. 앞은 터진 형태로 뒤는 막혔으며 등받이가 부착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위쪽에 긴 네모꼴 구멍을 마련해 놓았다. 겉에는 우단을 씌워 감촉이 좋도록 하였다.(서준, 2011년)

 

흉물스런 공원의 매실나무

흔해서 그랬을까? 우리는 눈을 의심했다. 5월이면 매실이 한창 익어가는 계절이다. 더구나 이곳의 매실은 토종이다. 요즘 시중에서 판매하는 매실은 거의 개량종으로 알이 잔 토종과 살구를 교잡해서 만든 것이다. 자잘한 알의 크기 말고도 씻었을 때 토종매실은 솜털이 남아 있지만 개량종은 매끈하다. 가장 큰 차이는 토종매실은 겉면이 홍매처럼 붉은색을 띤다. 시러베자식한테 쓸모없는 맹지를 간벌하라 일러도 저렇게 모닥스럽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명색이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이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어떤 가지인지조차 구별하지 않고 베어버렸으니 통풍이니 광합성이니 하는 말은 안중에도 없으렷다. 붉게 물들어가던 매실만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 가지치기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녹슨 낫으로 원줄기에서 뻗은 원가지까지 마구잡이로 잘라버렸다. 길가에 있던 10여 그루가 죄다 흉물스럽다. 하필이면 매실이 한창 영글어가는 때에 주지인지 부지인지, 1년생인지 2년생인지 전혀 구분하지 않고 … 참으로 분별력 없는 자들의 소행이다.

가지치기는 목적이 분명하다. 바람이 잘 통하고 햇빛을 고루 받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다. 특히 가운데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광합성을 풍부하게 잘하고 열매가 튼실해진다. 이를 위해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주고 원가지인 주지(主枝)는 되도록 옆으로 향하도록 유인해 준다. 열매도 맺지 못하는 도장지는 물론 위로 뻗은 가지와 썩은 가지, 그리고 통풍을 방해하는 잔가지는 없애는 것이 좋다.

가지치기는 일반적으로 휴면기를 이용한다. 옮겨 심을 목적이 아니라면 낙엽수는 원칙적으로 잎이 떨어진 뒤에 가지를 자르는 것이 좋다. 생육 중에 가지를 자르면 오히려 양분이 부족해서 수세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매실나무는 수확 후에 주지나 부주지에 많은 도장지가 생긴다. 그러면 통풍에 문제가 발생하고 햇빛을 고루 받을 수가 없다. 결과지가 마르고 꽃눈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빈약해진다. 따라서 도장지는 수확 직후부터 꽃눈이 분화하기 전, 7월 하순까지 하는 것이 좋다.

 

매짓골 아이들과 ‘서시’ 앞에 서다

지난해 이맘때쯤 서울매동초교 학생, 학부모, 교사 함께 인왕산을 오른 적이 있다. 담임교사가 인솔하고 급당 2명의 숲해설가가 동행했다. 내가 담당한 아이들은 3학년이다. 매동초 입구에서 윤동주 시비까지 걸어서 편도 1시간쯤 걸리니 오르면서 무얼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오감으로 느끼도록 하면 그만이다. 중간에 황학정(黃鶴亭 : 갑오경장 이후 끊어진 국궁의 맥을 부활시킨 근대 국궁의 종가)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르다가 손에 잡히는 아까시잎으로 풀피리를 불어본다. 잎으로 분장하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잎떼기놀이를 하다가 잎줄기로 파마놀이를 즐긴다.

드디어 윤동주 시비 앞에 이르렀다. ‘서시’가 새겨져 있다. 윤동주의 일생을 간략하고 함께 낭송했다.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시다. 저마다 자못 의연한 표정들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스치운다.’

▲ 시비 앞면에 ‘서시’, 뒷면에 ‘슬픈 족속’이 새겨져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흰 고무신이 거츤 발에 걸리우다 /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에서 흰 수건,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 흰 띠는 곧 슬픈 족속, 한민족을 상징한다.

 

매동초는 1895년 관립장동소학교를 개교하고 관립매동소학교로 개칭했다. 경복궁 영추문 밖에 있던 마을을 ‘매짓골’이라 하고 한자명으로 매동(梅洞)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매짓골은 곧 매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매화는 학교명을 비롯해서 교훈과 교표에 도드라진 최고의 상징이다. 의도적인가? 시비 근처에 마침 매실나무 두 그루가 있다.

매화는 예로부터 고결함을 상징으로 하는 문인화의 대표적 소재요,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ㆍ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소재였다. 이를 ‘송죽매’라고 한다. 매화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점 때문에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 붉은 매화를 홍매, 흰 매화를 백매, 달 밝은 밤에 보면 월매, 옥같이 곱다고 해서 옥매, 향기를 강조하면 매향이 된다. 일찍 핀다고 하여 조매(早梅), 추운 겨울에 핀다고 하여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하여 설중매(雪中梅), 봄소식을 전한다 하여 춘매(春梅)라고 부른다.

이 모든 것이 매화의 품종을 말하는 건 아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매실나무를 검색하면 재배식물로서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나온다. 매실나무를 비롯하여 흰매실나무, 매실나무 ‘뉴 포트’ 등 모두 10종이 등록되어 있다. 매실나무의 학명은 ‘Prunus mume’이다. 여기에서 속명 Prunus는 자두라는 라틴의 고어이며, 종소명 mume는 매화라는 일본 고어에서 따왔다. 원산지는 중국 중부지방이다. 영명은 Japanese apricot, Japanese flowering apricot, Chinese plum이다. 살구, 자두, 매화를 한 집안으로 본 것이다.

▲ 매화는 꽃의 색깔에 따라 크게 백매(白梅), 홍매(紅梅), 청매(靑梅) 등 세 가지로 분류한다. 백매는 꽃잎이 하얗고 꽃받침이 붉고, 홍매는 꽃잎과 꽃받침이 모두 붉은색이다. 청매는 푸른 기운이 도는 흰꽃으로 꽃받침이 녹색이다.

천 원권 지폐를 내보이며, 퇴계 이황은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일러 주었다.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원칙을 지키고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의 수필집 ‘야언(野言)’에 나오는 구절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dodream3000의 ‘야언 - 상촌 신흠’에서 인용함)

동천년로항장곡(桐千年老恒臧曲)하고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
월도천휴여본질(月到千虧餘本質)하고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라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항상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자기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 그대로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백 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는 뜻이다.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매화에 견주어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청빈하고 지조 있는 선비상을 잃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등교마저 자유롭지 못할 그 아이들! 머잖아 시인의 언덕에 올라 서시와 슬픈 족속을 다시 한 번 음미하기를, 그리고 겨우내 된바람 속에서도 맑고 밝고 향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깨끗한 동심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빌어본다.

(계속)

편집 : 박효삼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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