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다섯번째 주인공 정순임(86, 옥천읍 상계리)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상계리에 사는 정순임 씨(86)입니다. 정 씨와 그 자녀들은 자신과 어머니가 다수의 옥천 '1호'와 '최초' 기록의 보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막내아들은 어머니와 관련해 "최초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여성 1호, 옥천군 피아노 교습소 1호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신여성'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고 평가했습니다. 정 씨는 새댁 시절 화단 가꾸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화단의 맨 앞에는 채송화를 심었고, 맨 뒤에는 해바라기를 심었습니다. 작은 등나무 정원을 만들어 놓고, 그 그늘 아래서 아이들에게 오전에는 한글 쓰기를, 오후에는 피아노 치기를 가르쳤습니다. 피아노 교습소를 개업할 때는 상호를 '사랑'이라고 지었습니다. 교습소 안에 3개의 방을 만들고 각각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출입구에 붙였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

 

방앗간집 막내딸로 유복했던 유년시절

나는 1934년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현재는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아버지(정해명)와 어머니(이복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3남3녀 중 다섯째이자 막내딸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방앗간도 운영하셨다.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이나 '평화'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그런 가정 분위기였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부모님의 추억이 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나를 유난히 귀여워해주셨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에게 등을 내밀며 '어부바'를 외치셨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포대기에 꽁꽁 싸서 업어주셨다. 널찍한 아버지의 등은 든든하고 포근했다. 땀 냄새도 향기롭게 느껴졌다(나중에 내가 결혼해서 친정에 왔다가 시댁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는 '노시래 고개'까지 나오셔서 딸의 뒷모습을 마냥 쳐다보곤 하셨다).

여장부 스타일인 어머니는 마음도 크고 손도 컸다. 당시 집에서 닭을 키웠는데, 6남매에게 돌아가며 닭백숙을 해주셨다. 한 마리를 요리해 조금씩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1인당 한 마리를 통째로 먹이는 방식을 고집하셨다. "오늘은 네 차례다." 그래야 몸보신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도 않으셨다.

그런 분위기에서 옥산초등학교를 다녔다. 36회 졸업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공민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밟았고, 청주에 있는 성경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로 가서 보육대를 다녔다. 마침 큰언니가 경찰관 남편과 함께 효자동에 살고 있어서 여기서 학교를 다녔다.

 

굶주린 교인에게 먹을 것 대접한 아버지

나는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모태신앙인이다. 아버지는 교회의 장로였고 어머니는 권사였다. 부모님이 섬기던 덕촌장로교회는 내가 어린 시절 가장 마음 편하게 뛰어 놀던 놀이터였고 천국동산이었다. 여기서 찬송가를 불렀고 피아노를 배웠다. 교회가 아니었다면 내가 평생 피아노와 함께 살아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불렀다.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독창을 맡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다. 집에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창가를 자주 불렀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나는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동하며 풍금과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배울 때는 청주시까지 가서 선교사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아버지는 큰오빠와 함께 방앗간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곳에 비해 쌀과 보리 등 먹을 것이 조금 더 있는 편이었다. 주일이 되면 아버지는 교인들을 우리 집으로 불러서 식사를 제공했다. 쌀과 보리가 없으면 감자라도 내놓았다. 소수의 부자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지쳐가던 시절이었다.

내가 17세가 되던 해에 전쟁이 터졌다. 청주는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런데 얼마 후에 갑자기 인민군이 청주로 밀고 들어왔다. 인민군은 어린 학생들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같은 노래와 율동 등을 가르쳤는데, 나를 불러다 풍금을 치게 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로서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 옥천공고 음악강사 할 때 가장 큰 보람

2년제 보육대를 졸업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 유치원 교사와 주일학교 교사 등으로 일했다. 성가대 피아노 반주도 나의 몫이었다. 성탄절과 부활절 등 교회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과 함께 연극, 무용, 연설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1인 다역을 수행해야 했다.

그러다가 나는 옥천읍 상계리로 시집을 갔다. 동갑내기였던 신랑(선동훈)은 대전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다(나중에 남편은 수사과장까지 승진했다). 덕분에 시댁에서 신혼을 보낸 다음 대전으로 나가서 살았다. 그런데 첫아이 임신 기간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옥천 시댁으로 돌아와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집 식구를 모셔야만 했다.

이듬해 새들유치원 교사로 취직했다(나는 옥천 최초의 유치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첫 월급을 탔을 때의 그 뿌듯한 마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중앙약국 창고를 개조한 중앙유치원이 생기면서 교사로 초빙을 받았다. 요즘 말로 하면 '스카우트' 된 것이었다. 그 무렵 옥천 최초의 피아노 교습소를 열었고, 옥천공고 음악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내 인생 최고의 절정기이자 황금기였다.

이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동력이었다. 그래서 죽향초 운동장에서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쓰러지고 넘어지길 여러 차례 반복한 뒤에야 마침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릴 수 있게 됐다. 나중에는 오토바이도 배웠는데, 자전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했다.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개울에 빠져 왼발이 골절되는 큰 사고도 겪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동차 운전에도 도전했다. 실제로 60세를 훌쩍 넘기고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거쳐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동차를 사서 직접 운전하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장롱 면허증'이 되긴 했지만 그 열정적 도전은 아직도 나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정순임 씨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옥천읍 구읍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던 모습. 뒤쪽의 교각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도 나오는 "실개천"으로 추정된다.
 
▲ 유치원 소풍을 가서 자모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지금쯤 50대 중후반쯤 됐을 것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정순임 씨.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3남매. 맨 왼쪽의 막내아들 치영 씨가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 지금도 교회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남편 등에 업혀 가곡을 부르던 신혼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부가 직접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을 백안시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은 나를 데리고 죽향초 운동장을 산책했다. 사방이 어두워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 갑자기 나를 등에 업어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노래 한 곡 뽑아봐." 그러면 나는 용기를 내어 남편의 어깨를 두드려 가며 노래를 불렀다.

보람이 있었던 순간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였다. 특히 옥천공고 음악강사로 활동할 때 가장 보람이 컸던 것 같다. 소외된 농촌 지역에서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던 학생들은 그나마 음악시간에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서로 다투던 학생들도 내가 음악실에 들어서면 싸움을 멈추었고, "선생님 덕분에 신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라는 쪽지를 건네는 학생도 있었다.

나중에 40대가 넘어서 옥천문화원에서 주부들에게 가곡을 가르치는 강사가 된 것도 젊은 시절 가르침의 기쁨을 맛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쁨은 나중에 봉사의 기쁨으로 이어졌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기념관이 위치한 구읍(舊邑)의 봉사단체 '실개천지용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97년 회원들이 감사패를 증정하는 영광의 시간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중앙교회 현역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와 교대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옥천의 노인들로 구성된 합창단인 '향수합창단'의 알토 파트도 맡고 있다. 매주 수요일 노인복지관에 가서 4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연습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 정순임 씨는 아직도 교회 피아노 반주자로 봉사하고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피아노 교습소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습.

 

■ 후회 없는 인생 선물한 하나님께 감사

나는 남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장남 치봉(2남), 장녀 은미(2남), 막내 치영(1남2녀)이 모두 7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서로 우애를 나누며 부디 잘 살기를 바랄 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

나의 18번곡인 노사연의 '만남' 가사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후회 없는 인생을 선물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소녀 감성으로 살아온 울 엄니

 - 막내아들이 보내온 감사편지 -

1950년대 후반,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 살에 옥천으로 시집 온 울 엄니. 소도시 옥천에 '신여성'이 나타났습니다. 어머니는 성악 전공과 함께 그 당시에 드물었던 피아노, 기타는 물론이고 기타와 비슷하게 생긴 악기 만돌린 등 음악과 관련된 악기를 두루 다룰 줄 아는 '신여성'이었습니다. 당시 옥천실업고교 음악교사와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옥천군 어머니합창단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셨습니다.

엄니는 다수의 옥천 1호와 최초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최초로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여성 1호, 옥천군 피아노 교습소 1호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으며 '신여성'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늦은 나이에도 "자동차 운전은 하지 않겠지만 운전면허증은 따보고 싶다"면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준비해서 자동차 면허증을 취득한 후 즐거워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그랬던 울 엄니가 이제 86세라는 연륜으로 삶의 종착역을 향해 가시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오늘도 소녀 감성과 소녀 미소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울 엄니의 모습에서 평안함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50을 훌쩍 넘긴 막내아들이 항상 부러워하는 '울 엄니의 삶'이 지속되길 기원해 봅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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