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연(88, 옥천읍 원각리)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원각리에 사는 이종연 씨(88)입니다. 소나무 벽화가 그려진 좁은 골목을 몇 차례 꺾어 들어간 끝자락에 큰 대문과 넓은 마당을 안고 있는 양옥 한 채가 서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양옥 전면에 걸려 있는 수많은 서예, 동양화, 수채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창고 안팎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공구였습니다. 황혼에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서예와 그림 공부는 그의 집을 예술작품 전시장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전문가 수준을 넘보는 각종 공구는 황혼의 열정을 불태운 집수리 봉사의 도구들이었을 터입니다. 이 씨가 정한 가훈은 '화기만당(和氣滿堂)'입니다. '화목한 기운이 온 집안에 넘친다'는 뜻을 가진 이 가훈의 휘호는 서예가이자 문인화가인 외동딸이 썼습니다. 공부와 봉사는 평범한 노년을 특별한 황혼으로, 평범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드는 비밀의 열쇠였을 것입니다.

■ 장찬리에 저수지 들어서며 원각리로 이주

나는 1932년 옥천군 이원면 장찬리에서 태어났다.

장찬리는 현재 옥천에서 가장 큰 저수지가 있는 마을이다. 하지만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골짜기 깊숙이 숨어 있던 산속 마을이었다. 내 나이 30대 후반에 저수지 공사가 시작되면서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나는 종친이 많이 살고 있던 옥천읍 원각리로 이주했다. 50호 정도가 모여 살던 고향 마을은 지금 저수지 물밑에 잠겨 있다.

아버지(이모남)와 어머니(김귀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셋째이자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농사 짓는 선비'였다. 외모도, 성격도 깔끔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어머니는 아흔 살까지 장수하셨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우리 가족은 참 어렵게 살았다. 특히 장남인 나는 어려서부터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녀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나는 이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들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어머니는 나보다 세 살 많은 둘째 누나도 같이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마을에서 둘째 누나 또래 중에서 학교에 다닌 여자 아이는 누나와 가장 부잣집 딸 단 둘밖에 없었다. 학교는 걸어서 약 40분이 소요되는 거리에 있었다.

동급생 중 여럿이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다. 장가를 간 학생도 있었고, 심지어 아이가 있는 '아버지 학생'도 있었다. 그들에게 치여서인지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해방이 되던 해에 졸업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 노인대학을 졸업하며 학사모를 썼다.

 

▲ 그가 받은 상장과 수료증은 매우 많았다.

 

▲ 가훈을 '화기만당'으로 지었다. '화목한 기운이 온 집안에 넘친다'는 뜻이다.

 

■ 자식 많이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던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동이면 적하리 출신의 김청자와 결혼했다. 당시로선 매우 늦은 나이였다. 결혼은 늦었지만 자식 많이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던 아픔 때문에 그런 생각을 더욱 강하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장녀 유순, 장남 용화, 차남 정성, 삼남 정권, 사남 정현이 차례로 태어나주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아내와 함께 정말 열심히 일했다. 경운기, 이앙기, 트랙터가 나올 때마다 남들보다 빨리 배워서 농사에 활용했다.

결혼하고 이듬해 첫째이자 외동딸인 유순이 태어났다.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저수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원각리로 이주했다. 유순은 군남초, 옥천여중, 옥천여고를 다녔는데, 글씨 쓰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닭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유순이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실물처럼 잘 그렸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던 유순은 서른네 살 늦깎이로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서예문인화학과에 입학했다. 문인화에 능통했던 유순은 대학원까지 다니며 '송대문인화론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대한민국 미술세계명감전, 한국-캐나다 수교 50주년 기념 목우회 회원전, 국제서법예술연합회 초대작가전, 한국문인화 대표작가전에 초대받는 등 실력도 인정받았다.

유순이 2018년 서울과 대전에서 생애 첫 전시회를 가졌다. 27년 동안 작업한 작품 중 39점을 골라서 '내 안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았는데, 아비로서 너무나 자랑스러워 전시회 리플릿을 가지고 다니며 여기저기 돌렸던 기억이 난다.

장남 용화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옥천중을 다닐 때부터 공부에 맛을 들이더니 전국의 수재들이 다닌다는 철도고에 합격했다.

철도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용화는 군 복무를 마치고 철도청에서 근무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갑자기 병에 걸린 아들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 남은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성, 정권, 정현 등 나머지 세 남동생이 형의 몫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 집수리봉사단 만들자고 내가 먼저 제안

평생 일만 하고 살아온 내가 나이 일흔을 넘긴 뒤에야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노인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문화정보대학이 그 계기를 제공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恨)을 풀고 싶었다. 서예, 동양화, 수채화 등 예술 분야와 영어, 일본어 등 어학 분야는 물론이고 웰다잉, 풍수지리까지 배웠다. 기타 등 악기도 배웠고 정보화 교육도 수강했다.

뒤늦게 공부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내 안에 숨어 있던 재능이 발휘되었다. 최우수상, 우수상, 모범상 등 각종 상도 수상했다. 2008년 성균관 유도회가 주최한 대한민국 유림서예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는데, 부상으로 10만원의 상금도 받았다. 그보다 한 해 전인 2007년에는 광주에서 열린 전국노인서예대전 문인화, 동양화 부문에서 장려상을 탔다. 당시에도 상장과 함께 1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서예는 류흥열 선생이, 동양화는 박홍순 선생이 지도해주셨다. 서예와 동양화를 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도 사라졌다. 문화정보대학에서 또래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는 것도 좋았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날 때마다 사각모를 쓰고 수료식을 가졌다.

청주에 있는 충북노인대학에도 다녔다. 군청에서 4만5000원의 학비를 대주었다. 옥천군에서 8명이 신청했는데, 대다수가 중도에 하차하고 나만 유일하게 졸업했다. 인내심도 강했지만 뒤늦게 불붙은 향학열이 비결이었던 것 같다. 이왕 시작한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마무리 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공부와 함께 봉사의 세계에도 입문했다. 나는 노인자원봉사지원센터 집수리봉사대 반장과 자원봉사클럽 코치로 활동했다. 집수리봉사단을 만들자는 제안은 내가 먼저 노인장애인복지관장에게 했다. 덕분에 반장의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다. 읍내는 물론이고 관내의 거의 모든 면까지 다니며 봉사했다.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 영세민을 대상으로 집수리를 해주었다.

"일선에서 은퇴한 뒤 편안한 노후 생활을 거부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젊은이들도 하기 힘든 집수리 봉사에 나선 노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봉사 활동이 KBS 9시 뉴스 시간에 '아름다운 황혼을 보내고 있는 실버봉사대'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취재하던 기자가 나에게 몇 마디 물어서 "가지고 있는 기술 나이 먹었다고 썩히면 뭐해.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남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고 답했다. 그날 자식들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텔레비전에서 아버지 봤어요."

 

■ 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서로 의지하며 이겨냈던 6남매 피붙이도 내 인생의 큰 선물이었다. 종예, 종임, 종연, 종분, 종희, 광국 등 우리 6남매의 우애는 각별했다. 그래서 매년 일부러 한 자리에 모여서 잔치를 벌였다.

6남매의 자식들이 지리산 고로쇠 물을 구해 오기도 했고, 진도의 굴과 전복을 공수해오기도 했다. 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 해 한 해 만남을 이어왔다. 얼굴만 봐도 그냥 고맙고 기분이 좋은 행복한 만남이었다.

형제자매의 우애는 대(代)를 이어 계속됐다. 장녀 유순, 차남 정성, 삼남 정권, 사남 정현이 모두 5명의 손자와 1명의 손녀를 낳아주었다. 크게 출세하거나 치부(致富)하지는 못했어도 형제자매가 우애를 나누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정직하게 살라'고 세 아들의 이름에 바를 정(正)을 넣었는데, 크게 어긋나지 않은 것 같다. 옛날 어디서 보고 오려놓았던 '복 받는 10가지 지혜'를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1. 가슴에 기쁨을 가득 담아라. 담는 것만이 내 것이 된다.

2.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하루를 멋지게 시작하라.

3.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라. 웃음꽃에는 천만금의 가치가 있다.

4. 남이 잘 되도록 도와줘라. 남이 잘 돼야 내가 잘 된다.

5. 자기 자신을 높여라. 행운의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6.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도 나를 향해 축복한다.

7. 이론보다는 실천을 행하라. 실천은 성공의 열쇠다.

8. 힘들다고 고민하지 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 들게 마련이다.

9. 준비하고 살아가라. 준비가 안 되면 들어온 떡도 못 먹는다.

10. 그림자를 보지 말라.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라.

88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원각리 이장(8년), 성주 이씨 옥천군 종친회 회장(10년), 이원초 23회 동창회 총무와 회장 등으로 봉사했다.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게 감사한다.

 

▲ 양옥집 곳곳에 이종연 씨의 서예와 그림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 양옥집 곳곳에 이종연 씨의 서예와 그림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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