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간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해방 75주년이 되도록 이 장대한 승전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학술적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봉오동전투는 산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이 총을 잘 쏴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이라는 정도가 그동안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독립운동사를 학문적으로 밝히고 구체화해야 할 역사학계조차 몇몇 개인을 영웅으로 묘사하는 책 발간으로 학술연구를 대체했다. 학계로부터 외면당한 그날의 진실은 연구하고 살펴야 할 역사가 아니라 기적이고 신화로 고착화되었다.

왜 봉오동에서 대규모 독립전쟁이 일어났는지, 봉오동의 독립군들이 어떤 무장력을 갖췄기에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는지, 무장 독립전쟁이 일어난 당시 북간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은 어땠는지, 봉오동 주민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연구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봉오동전투에 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도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는 역사학계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현장답사가 어렵고 사료 발굴이 힘든 분야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대한민국 군대의 빛나는 승전으로 기리고 있는 이 역사가 더 이상 신화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2016년 7월에 최운산잔군기념사업회가 설립된 후 수차례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면서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리가 가능했던 역사의 진실에 구체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봉오동을 무장독립군기지로 건설하고 독립군을 정예병사로 훈련시켜 봉오동⦁청신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 최운산이란 사실과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이 최진동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의 헌신이 봉오동전투 승리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 발표자들

지난 7월 9일에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육군사관학교가 독립기념관과 함께 100년 전 독립전쟁을 학술적으로 살펴보는 논의의 장을 펼친 것은 임시정부 설립과 함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이뤄낸 독립군의 승전을 대한민국 군대의 승리로 인식한다는 반증이다. 코로나19로 일반인을 초대하지 않고 발표자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군군사연구소를 비롯한 일부 관계자들만 참석했지만 강당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어 근현대사기념관의 심철기 박사는 “1920년 독립전쟁 참여세력- ‘의원안’에 나타난 의병세력의 성격”을 주제로 당시 의병 세력의 무장독립전쟁 가담 가능성을 발표하며 당시 연변지역 한인들의 움직임과 조직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했다.다섯 시간 동안 다섯 주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먼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신주백 소장이 “1920년 독립전쟁 준비와 독립군의 전투”란 제목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무장 독립전쟁을 독려했던 상황과 당시 북간도 독립군의 전쟁 준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봉오동전투가 대한민국의 독립전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 봉오동전투 현장의 위치를 추정하는 이상훈 교수

육군사관학교 이상훈 교수는 “「봉오동전투상보」를 통해본 봉오동전투의 현장”이란 제목으로 봉오동전투 후 일본군이 기록한 보고서 「봉오동전투상보」의 내용을 분석했다. 당시 일본군 지휘관의 공격 명령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전체 전투가 진행된 상황을 살펴볼 때 이는 공격 명령이 아니라 퇴각 명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분석과 함께 당시 전투의 현장의 위치를 추정했다. 

이어서 “청산리 戰役의 전개에 대한 군사적 재검토”를 발표한 동북아역사재단의 신효승 박사는 일본군 사료를 인용해 당시 일본군의 움직임과 독립군의 움직임을 비교하면서 독립군의 전투력이 상당했음을 확인했다. 특히 1920년 초부터 우리 독립군이 국내진공작전을 자주 펼쳤는데 이 중에서 그 전과가 뛰어난, 1920년 3월15일 250명의 독립군이 신출귀몰한 전투력을 자랑한 미산전투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 미산전투에 대해 설명하는 신효승 박사

이날의 발표 중 육사의 이상훈 교수의 발표는 당시 일본군이 그려놓은 전투지도와 현재의 구글지도를 화면으로 띄워 비교하면서 1920년의 봉오동 독립전쟁의 전투지역의 위치를 비정했다. 이 발표는 봉오동전투의 현장이 그동안 한국에서 전투현장으로 잘못 알려졌던 봉오동저수지를 지나 10km가량 더 들어간 산위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심포지엄에 참석한 역사학자들은 구체적으로 위치를 드러낸 전투 현장의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일본군 「간도출병사」를 완역한 육군사관학교의 김연옥 교수는 “「간도출병사」를 통해 본 강안수비대의 실상”이란 제목으로 두만강변에 설치된 일본군 국경수비대의 시대별 변화와 움직임에 대해 발표했다. ‘강안수비대’란 명칭으로 강 건너 중국으로 출동이 용이하도록 상주시킨 부대의 역할과 임무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독립군의 전투력을 인정하고 대비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 국경수비대에 대한 발표(육사 김연옥 교수)

비록 지난 100년을 무심히 보냈지만 이제 젊은 학자들이 눈길을 돌리면서 북간도 독립전쟁 연구가 새로워지고 있다. 다시 시작하는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사 연구에 인재를 투입하는 일이 국가적 과제로 선택되어야 한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에 남아있는 독립운동 사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부터, 국사편찬위원회가 가진 사료를 번역하는 일부터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100년 전 그분들의 선택과 헌신으로 오늘 우리가 독립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간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나라, 대통령이 G7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나라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당시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리며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되살린 횃불이었다. 일제하 억압 속에서 민족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방향키 역할을 했던 중요한 역사가 분단과 후세대의 방치로 100년의 시간이 흐르며 신화화 되었던 것이다. 그날의 역사를 함께 기억하는 일은 후세대의 마땅한 몫이다. 국민들의 역사의식과 역사연구는 정비례하기 마련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역사도 그렇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야 한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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