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절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부모라고 해서 꿇어 엎드려 절하는 건 맞지 않다’고 보셨어요. 아버지 말씀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자들하고도 함께 맞담배를 피우며 격 없이 소통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꼰대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셨던 분이었습니다. 제자를 끔찍하게 아끼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임창순 선생의 아들 안동대 사학과 임세권 전 교수는 아버지를 권위주의 없는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임창순 선생은 나이 직급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

“아버지는 저에게 보성중학교로 가라고 하셨는데 당시 보성중학교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학칙이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머리를 삭발하는 게 아니라 가르마를 타야 했고, 학교 안팎에서 명찰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학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학교에 다니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임세권 전 교수는 어린 시절을 줄곧 글과 책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임창순 선생이 의도치 않았지만, 아들 역시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같은 학자로서 바라본 아버지의 업적은 어땠을까. 임세권 전 교수는 임창순 선생이 금석학의 토대를 닦고 학문으로서 적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봤다.

“금석학은 주로 비문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비문·비석은 1차 사료로 학문 연구의 출발점입니다. 종이로 된 사료는 잘못될 수 있고 왜곡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비석은 왜곡 가능성이 적을뿐더러 종이 사료보다 이전에 남긴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대중들이 금석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부터 이론을 적립하셨습니다. 학문의 토대를 만들고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비문을 일일이 찾으며 연구하고 의미를 짚어보는 일을 하셨죠. 발로 뛰는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임세권 전 교수는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봤다. 때문에 민주화운동가를 기억하고 발자취를 좇는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과거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친일·반공·독재세력이 우리나라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완전한 민주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민주화 세력이 주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돌아보고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처럼 민주화운동가들의 업적을 살피고 의미를 짚는 활동이 계속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들의 업적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청명 임창순 선생의 아들 임세권 안동대학교 전 교수가 ‘청명 임창순 선생 10주기 기념 유묵전’ 책자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양수철 옥천신문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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