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을 목전에 둔 나, 환갑을 넘긴 평화서림의 동행
이익세(李益世, 79세, 평화서림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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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세야" 어머니가 내 뺨을 어루만져 주신다. "어머니! 어머니!"

아, 또 꿈을 꿨다. 가을 햇살이 평화서림 유리창에 부서지던 날 깜박하는 사이 졸음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이렇게라도 전쟁 통에 생이별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 만추의 정경을 말로 풀자니 형형색색 낯간지러운 비유를 한다. 내 인생의 계절도 노랗게 익은 만추! 올 가을 유난히 태풍이 자주 들이치더니 소출이 적을까 걱정이라는 소리를 가게에 들르는 이마다 했다. 발길 뜸한 것 보니 추수는 다들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농사를 짓지 않아 날씨에 큰 영향을 받지 않지만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웃들이 가물어도 걱정이고 태풍이 불어도 뉘 집 농사에 피해는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이젠 운 좋은 날 꿈에서나 볼 내 고향 중화에도 가을은 깊숙할 것이다.

▲ 신랑 이익세. 신부 정길순. 듬직한 신랑과 어여쁜 새댁이 만나 평화서림을 굳건하게 지키고 일구었다. 내 인생 결실의 8할은 아내 덕분이다.

 

통한의 1주일, 열두 살 사내아이가 맞은 생이별.

1951년 1·4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평안남도 중화를 떠나 남한으로 피난 나왔다. 해방이 되면서 이 땅의 주인은 정작 손 한 번 못 들어보고 공산주의자가 되고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의 논리 앞에 평범한 민초들은 참으로 약한 존재이다.

아버지는 300주 넘는 사과밭을 갖고 계셨고 마을 도랑가 주변에 드넓게 펼쳐진 논 두 배미를 가지신 대농이셨다. 자기 소유의 금쪽같은 땅을 하루아침에 정부에 내놓아야 한다니 도저히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와 의논하여 잠시 고향을 떠나있자고 결심하셨다. 12살인 나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 아버지와 사촌 형제 둘이 길을 나서는데 느닷없이 18살이었던 누이가 채비를 하고 부리나케 쫓아왔다.

아버지 밥을 해드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며칠만 떠나 있다가 돌아올 요량이었기에 그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를 남겨두고 우리는 눈보라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생이별이 시작되었다. 구사일생으로 도착한 서울 영락교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언 몸부터 녹였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냈는데 엉덩이 붙일만한 곳이 주는 위안이 그렇게 큰 것인지도 처음 알았으니 난리 통에 인생의 쓴맛 단맛을 순식간에 맛보기도 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들고 온 돈뭉치로 쌀 한 말 반을 6천 원에 샀는데 그 때 돈으로 큰돈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오면서 이북돈은 쓸모가 없어졌다. 행여 도둑맞을까 몸에 꼭꼭 지니고 온 지폐를 휴지 조각으로 날려버려야 했을 때 아버지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전쟁은 그렇게 참혹하여 사람을 절망의 늪에 빠뜨린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넋을 빼앗아 간 것은 휴지가 된 돈이 아니라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는 청천벽력같은 현실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누이는 기가 막혀 땅을 치며 뛰며 통곡을 했다. 1953년 휴전선이 가로 놓인 것이다. 그 일주일이 평생 얼굴을 볼 수 없는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 이북에 남은 가족들의 얼굴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세월은 흘러 80세를 앞둔 지금까지 뜨거운 상처를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다. 아, 인생은 또 그렇게 살아진다.

▲ 평화서림과 같이 나이든 우리 부부, 평화서림과 같이 성장한 우리 아이들 내 사랑들 고맙구나!

 

■ 새로운 인생의 시작은 충북 옥천에서

평택에 머물러 있을 때 아버지의 됨됨이를 유심히 지켜본 쌀 도매업자 금용필(후에 나의 외삼촌)님이 자신의 고향인 옥천으로 오라고 했다. 남한 땅에 전혀 연고가 없던 터라 우리 여섯 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옥천행 기차에 올랐고 옥각리에서 1년을 살게 되었다. 기차 지붕까지 겹겹이 올라탄 피난 행렬은 이제 6.25 동란의 기록사진으로 남아 역사가 되었다. 옥천은 어수선한 시대와 무관하게 평화로웠다.

아버지는 금용필님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셨고, 나는 삼양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마암리에 터전을 잡으면서 아버지는 새우젓 장사를 시작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책장사로 바꾸셨다. 작은 아버지와 함께 홍길동전, 숙향전 같은 고전 소설들을 대전에서 떼어다가 옥천장, 이원장, 안남장 등을 돌며 장사를 하셨는데 책이 잘 팔렸다. 지금처럼 매체가 다양하던 시절이 아닌지라 사람들의 문화적 욕구는 책 읽기에 쏠렸고, 특히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책을 즐겨 찾았다. 사랑은 동서고금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어깨에 메고 다녀야 했기에 늘 힘들어하셨지만 그만한 벌이도 없어서 10여 년 간을 그렇게 장터를 떠돌며 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내가 옥천중 3학년 때 파출소가 있던 자리에 지금의 평화서림을 내셔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 날 아버지의 환한 웃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운동을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농구를 잘해 충북 대표로 전국체전에 나갈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옥천실업고를 다닐 때도 권투와 수영을 하며 체력을 단련시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집에서 쉬다가 마음먹은 게 있어 서울로 올라갔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밥 벌어 먹기도 힘들었다. 2년 동안 신문배달만 하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고 군대에서는 운동선수로 활약하면서 연대, 사단별 경기에 출전하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왔을 때가 1966년 5월이었는데 6월에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함석집이던 평화서림을 뜯어내고 새로 건물을 지었다. 그 때 우리 땅 일부를 도로로 내주는 대가로 군청에서 시멘트를 받아 건물을 올렸고 지금의 평화서림이 50년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나이 들고 있는 것이다.

▲ 이익세씨가 운영하는 평화서림

■ 내 인생 결실의 8할은 아내 몫이다.

내 나이 서른 살, 아내 나이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는 영동 학산 사람으로 농사가 천직이라 생각한 순박한 여인이었으나 그녀의 진가는 나를 만나 서점을 운영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현명하고 생활력이 강한지 나는 아내 옆에서 자리만 차지해도 우뚝 서 보였다. 아내의 내조는 빛났다. 서점이 옥천읍내에 있다 보니 학생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고 손이 모자라게 장사가 잘 되었다. 그 때는 책을 사러 기차나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나가야 했다.

아내는 그 무거운 전과와 수련장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먼 길을 오가며 떼어 왔는데 비가 억수로 내리던 어느 날은 전과가 버스 안에 다 쏟아져 발 디딜 틈 없는 버스 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승객들이나 운전기사나 그 상황을 누구도 탓하지 않아 지금도 고맙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한다.

이른 아침 가게 문을 열어 아이들이 등교가 끝날 때까지 정신없이 장사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 대전으로 전과, 수련장, 문제집을 떼러 나가는 것이 아내의 일과였다. 그렇게 바쁜 중에도 3남매를 잘 키워냈으니 아내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딸 향순이는 가수가 되고픈 열망이 커 나를 난감하게 했으나 아내는 그런 향순이 뒷바라지를 적극적으로 했다. 그 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연예계를 염려했지만 아내는 딸의 꿈을 묵살하지 않고 해보라며 길을 내주었으니 생각이 트인 사람이었다.

큰아들 형근이는 지금은 변호사 사무장으로 일을 한다.

작은 아들 동근이가 공부를 잘 했는데 옥천고에서 2등 3등 했고 경희대 합격했다고 옥천에 프랑카드가 붙었을 때는 어깨가 으쓱했다.

당시 전과 한권이 5천 원 정도였으니 모든 아이들이 전과를 갖고 공부하기는 어려웠다. 전과 수혜자의 첫 번째는 우리 자식들로 지금으로 치자면 전과가 강남의 1타 강사 역할을 한 셈이다. 동아 전과, 표준 전과, 우리는 전과 장사를 하니 자식들에게 1차로 지급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 열심히 공부해 옥천 시골에서 서울까지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두 번째 수혜자는 처남들이다. 우리가 보내준 전과로 공부해 큰 처남은 영어교사가 되고, 둘째 처남은 기술사, 막내처남은 부산은행 지점장까지 지냈다.

이렇게 우리는 전과를 팔며 자식들 어엿하게 키우고 나는 처갓집에 사위 노릇하며 살 수 있었다. 지금은 책을 사러 우리 가게까지 찾는 이는 뜸하지만 볼펜이며 공책, 스티커 등을 사러 몰려와 재잘대는 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제는 서점이라기보다 잡화점으로 불릴 물건들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지만 아버지께서 문을 여시며 지으신 평화서림이라는 가게이름은 영원히 갖고 가고 싶다.

▲ 이익세씨가 운영하는 평화서림

 

평화서림, 이야기 또 이야기

평화서림은 휴일이 없다. 난 성실하고 정직했다. 30년도 더 된 옛날, 곗돈 500만원을 신문지에 둘둘 싼 채로 책 더미 위에 올려놓고 그냥 간 후 혼비백산해서 찾으러 온 아주머니. 우리도 손님들로 부산한 통에 아주머니가 온 후 알았지만 먼저 알았다면 당연히 경찰서에 갖다 주었을 것이다. 돈을 찾아가는 아주머니의 안도를 우리 일처럼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겼다. 돈다발을 흘리고 간 젊은 부부에게 돌려주니 고맙다며 처음 보는 고급스런 내복을 두 벌 사다가 우리 부부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가게의 애용 고객이 이제는 성인이 되어 찾아와 우리 모습이 여전해서 감사하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5일장이 설 때마다 가게 앞에 푸성귀를 가져다놓고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화장실을 쓰자며 들어서는 일... 아이들이 서넛 짝을 맞춰 들어와 작정하고 문구를 훔쳐가려 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해주던 황당한 일들, 다 추억이 되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이 좁은 공간을 맴돌고 있어 나는 문을 여는 아침이 기다려진다. 외지에서 손님이 오면 수 십 년 오랜 길을 같이 걸어온 옥천 맛집 '풍미당'으로 안내해 같이 물쫄면을 먹는다. 나란히 이웃한 풍미당과 평화서림은 긴 세월 속에서 옥천의 명소가 되었다.

평화서림이 행운만 따른 건 아니다. 아이들이 줄고 문구를 사는 경로가 다양해져서 우리도 당연히 매출도 줄었다. 세상의 험한 일들이 우리들에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지만 지금만큼 남에게 손 안 벌리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불상사 없이 수 십 년 이 터를 지키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

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몇 번 씩이나 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나의 아침은 항상 신선하다. 그리고 나의 곁을 지켜주는 여전히 예쁜 아내가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나이다. 가끔 우리 아들 녀석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평화서림의 다음 주인은 누가 될 것인지 우스갯소리를 하는 모습이 나의 희망이며 미래다. 아버지가 열고 내가 일궈낸 이 평화서림을 우리 자식들이 지켜준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이만하면 내 인생도 자존심을 지켰다. 가을햇살이 눈이 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날, 살짝 졸음이 찾아와 열두 살 익세로 돌아가고 싶다. 내 고향 중화마을의 황금들판과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 언저리를 맴도는 꿈을 꿀 수 있다면 이 가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 막내아들 이동근님 감사편지

한 40년 전쯤 지금의 평화서림 건물을 지을 때 삼양초등학교 가는 길옆으로 부모님께서 나무로 된 작은 가건물을 지어서 장사했었습니다.

그 작은 가게에서 모든 가족이 다 같이 살수 없었기에 제일 어렸던 저만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죠. 부모님은 항상 바쁘셔서 보통 혼자서 놀거나 별 도움은 안 되었지만, 가게 앞에 앉아서 부모님 장사도 도와줬었습니다.

그 당시 저녁에 아버지가 모임에 갔다가 기분 좋으실 때면 아주 가끔 시장통닭을 사오셨는데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요리도 가끔씩 해주셨었습니다. 도리뱅뱅을 정말 기가 막히게 잘 해주셨는데 그 맛이 아직도 머리속에 선명합니다.

다른데서 먹어봐도 그때 아버지가 해줬던 그게 제일 맛났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바쁘게 살아오셨습니다.

365일 평화서림 문은 항상 열려있었고, 옥천읍내에서 가장 늦게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집 앞 소방서에서 싸이렌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소방차에 타고 같이 출동하셨습니다.

그런 봉사와 희생정신 때문에 나중에 의용소방대장까지 하신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치라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평생 좋은 옷, 비싼 무언가를 본인들을 위해서 사보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좋은 것은 자식들에게 주려고 하셨고, 본인들은 근면하고, 절약하시는 게 몸에 배어 계셨습니다. 그게 저에게 살아있는 교육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항상 열정적이고 건강하실줄만 알았던 아버지는 2007년, 2016년 두 번의 큰 수술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도 최근에 건강이 안 좋으셨다가 검진결과 큰 병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연세를 생각안하시고 너무 열정적으로 일을 하셔서 건강이 조금 걱정됩니다.

건강 생각하셔서 일을 조금 적게 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바르고 건강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손주들 커가는 거 지켜보면서 건강하게 오래사세요.

동근 올림.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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