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 박치우와 박종홍 돌아보기

▲ 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박치우와 아내(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경성제대 재학 시절,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일본에도 없는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던 철학자 박치우는 1936년 김종숙과 결혼한다.

박치우와 박종홍은 신남철과 함께 서양철학을 수용한 1세대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박종홍은 1903년생으로 신남철보다 4살 많고 박치우보다 6살 많다. 1907년생 신남철은 박치우보다 2년 먼저 졸업했고 박종홍은 박치우보다 1년 먼저 졸업했다. 셋 다 모두 경성제대에서 독일관념론, 바로 신칸트학파 철학을 전공했다. 다시 말해 서양철학을 한국 사회에 수용하고 연구한 1세대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철학자 박종홍을 기억하지만 철학자 박치우와 신남철은 잘 모른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두각을 나타낸 신남철을 안다. 그러나 박치우에 대해선 소상히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히려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일제 말기 최재서의 『인문평론』에 발표된 박치우와 신남철의 ‘신체제론’, ‘동양문화론’을 들어 친일비평가로 인식하는 정도이다. 여기에는 한국근현대문학사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김윤식의 비평이 작용했다. 물론 친일문학을 연구한 임종국 역시 박치우의 30년대 후반 평론에 대해 친일비평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 대한민국에서 주류 행세를 하던 친일파를 다시 소환한 임종국(1929~1989) 선생의 생전 모습(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고, 한국전쟁으로 남북 대결이 격화하자 빨갱이 잡는 반공 투사로 애국의 개념을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1960년대부터 홀로 친일파 연구를 수행한 임종국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해 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부터 <임종국상>을 제정해 민족사 바로잡기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1940년 7월에 나온 박치우의 평론, 「동아협동체론의 일성찰」(『인문평론』)에서 연유한다. 정작 박치우는 파시즘을 통렬히 비판한 철학자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의 파시즘을 비판했고 해방 후엔 일본 제국주의를 포함시켰을 뿐, 철학자 박치우의 논리에는 변함이 없었다.

해방직후 박치우가 쓴 『사상과 현실』(1946년)에 수록된 평론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문학계에선 친일비평가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철학계에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집단 망각이 역사를 왜곡시키는 방법이듯이 선택적인 집단 기억 또한 역사를 왜곡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특정 시기 지배집단이 특정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인간의 의식과 관련된 상부구조를 가장 손쉽게 장악하는 도구는 교육 문화 영역이다.

거기에 교육 연구와 언론, 그리고 종교 등 문화 메커니즘은 훌륭한 이념 전파 도구로서 기능해 왔던 게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 박종홍은 있어도 우리 머릿속에 박치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75년 분단 상황에서 교육연구 활동이 지극히 왜곡, 편향된 때문이다. 이 글은 그러한 왜곡과 편향을 깨트리고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고자 쓴 글이다.

해방 공간에서 세 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해방공간은 ‘분단이냐 통일이냐’라는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절체절명의 시대였다. 역사적 실천과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내면화한 당대 인텔리겐치아에겐 더욱더 그러했다. 해방이 곧 분단으로 이어진 전후 처리 상황에서 민족 분단은 필연코 전쟁의 참화를 낳을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몽양 여운형이나 백범 김구는 분단국가 건설이 전쟁이라는 민족의 참화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민족지도자들은 피살되거나 테러에 시달렸다.

▲ 조선 청년들을 유난히 사랑했던 항일독립투사이자 해방공간 가장 뛰어난 민족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해방 공간 한국현대사에서 여운형만큼 국제정세에 탁월한 식견을 지닌 정치지도자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했던 정치지도자였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로부턴 기회주의자로 비난을 받았고 우파 정치세력으로부턴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었다. 여운형, 김규식, 김성숙이 제대로된 역사평가를 받을 날을 고대해 본다.

두 거인, 특히 몽양 여운형은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1946-47)가 두 차례 결렬되는 와중에 일찌감치 김규식, 김성숙 등 당대 민족적 양심들과 좌우합작에 혼신을 쏟았다. 그렇게 민족분단을 막기 위해 12차례 테러 위협 속에서도 온 몸으로 저항하다 흉탄에 스러졌다.

따라서 분단으로 치닫던 민족 현실은 민족 구성원 누구에게나 절실한 삶의 문제로 다가왔고 일단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대로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해방 공간, 삶과 죽음이 극명히 갈리는 극한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들은 침묵하며 현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일단의 사람들은 외세와 분단권력에 밀착돼 분단체제에 적극 순응하였고 또 다른 일단의 사람들은 분단질서를 거부하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당대 정치적 패배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렸고 죽음을 운명으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오늘 여기서 소개하는 두 철학자 박치우와 박종홍은 해방 공간 자신들이 공부한 철학에 충실한 삶을 살아갔다. 박치우는 해방공간 남로당에 가입해 박헌영의 비서로 그리고 남로당 핵심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과 다르게 해방 공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민족분단이라는 모순된 현실을 실천을 통해 변혁시키려 애썼다.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철학자는 현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모순된 현실을 변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고 그 스스로 실천했다. 철학자 박치우에게 실천은 이론과 현실이 모순된 속에서 모순을 극복하려는 투쟁이자 변증법적 통일의 과정이었다.

박치우는 아버지가 함경북도 노회장을 지낸 기독교 목사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17년이라는 오랜 기간 러시아 선교를 떠난 아버지의 부재로 경제적 궁핍 속에 살았다. 영민한 덕에 1928년 경성제대 예과에 국어학자 이숭녕과 함께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박치우는 두 번 등교정지 처분을 받았다. 학비를 내지 못한 때문이었다.

실제로 박치우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심지어 박치우는 대학시절 조선일보 방응모에게서 장학금을 받아 학비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다. 당시 박치우는 방응모가 만든 장학회 ‘서중회’ 회원이었다.

박치우가 등교정지 처분을 받은 시기가 1931년 두 차례인데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1931)과 비슷한 시기이다. 그러나 박치우는 그 사건과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박치우는 ‘경제연구회’나 ‘독서회’ 서클활동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남철이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부각된 것과 달리, 박치우는 일제강점기 적어도 30년대 중반까지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게 틀림없다.

다만 1933년 박치우는 신남철, 박종홍과 함께 ‘철학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철학연구회’ 창립 멤버로는 박치우, 신남철, 박종홍(이상 경성제대), 김두헌(도쿄제대), 전원배(교토제대), 갈홍기(미국 시카고대), 안호상(독일 예나대), 한치진(미국 USC대)들이었고 ‘철학연구회’ 활동 자체는 서양철학 일색이었다.

‘철학연구회’는 한국 사회 최초로 철학 전문잡지 『철학』을 3회 발간했다. 1933년 7월 17일 1호가 나오고 1935년 6월 20일 마지막 3호를 발간한 뒤 1936년 발행인 이재훈이 사상범으로 일제에 피검되면서 해체되었다.

‘철학연구회’ 활동이나 학회지 『철학』은 내용상 일제 식민당국을 긴장시킨 적은 없었다. 식민지 약소민족 문제나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 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글을 실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조선의 현실문제와 동떨어진 아카데믹한 내용으로 서양철학을 소개하는 잡지였기 때문이다.

박치우는 오히려 경성제대 재학 시절 원정경기를 갈 만큼 축구 선수로 맹활약했다. 1920년대 후반 일본 문부성과 총독부는 대학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온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성제대 학생모임인 ‘문우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자 학생들이 ‘문우회’ 대신 축구부를 만들어 모임을 지속했던 시절이었다.

박치우는 재학 시절 졸업 이수단위 21단위를 초과해 27단위를 수강하였고 학점도 우수했다. 동료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정도로 한문 실력도 뛰어났고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인지 서양음악에도 재주를 보여 경성제대 총장 부임 환영 음악회에서 학생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대 철학과는 도쿄제국대학 철학과와 마찬가지로 칸트와 헤겔 등 독일관념론이 풍미했고 당대 주류학문이었다. 당시 경성제대 철학과 교수들이 미야모토를 비롯해 소장파 학자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들은 이와나미(岩波) 서점을 통해 칸트철학 전집을 발간하였다.

박치우 역시 대학시절 칸트 철학에 깊이 심취했다. 사회주의 사상과는 거리를 두었다. 자신에게 철학개론을 가르친 스승 미야모토로부터 ‘일본에서도 보기 힘든 천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박치우는 1933년 3월 31일 대학 졸업 후 미야모토 교수의 연구실 조수로 생활했다. 당시 연구실은 오늘날 대학원에 해당한다. 그러나 박치우는 2년 계약 기간인 연구실 조수를 1934년 9월, 1년 6개월 만에 그만둔다. 그것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때문이다. 당시 숭실전문학교 동료교수로는 양주동, 이효석이 있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박치우의 학문세계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경성제대는 관학 아카데미즘에 갇혀 있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0년대 국내 유일한 대학이었다. 이는 3·1운동 직후 거세게 일어난 조선사회 고등교육 열망을 일제 식민당국이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동시에 식민지 중견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한 학교였다. 다분히 식민통치 도구로서 경성제대를 운용한 것이 일제 식민당국의 의도였다.

실제로 조선 민중의 고등교육 열망을 수용한 것이라지만 신입생의 2/3는 일본인들로 채워졌다. 그나마 조선인 입학생들은 경성제대 입학 당시 철저한 신원조회로 입학 자체가 까다로웠다. 가족 가운데 독립운동을 비롯해 사상 사건이 일부라도 관련돼 있으면 아무리 조선의 수재라도 입학을 불허했다. 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의 졸업 이후 상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삶의 양태가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나 조선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제 식민당국의 충직한 관료로서 친일한 인물들이 다수였다.

따라서 경성제대는 조선 민족이 처한 참담한 현실과 유리된 관학 아카데미즘이 지배했던 분위기였다. 그러나 평양 숭실전문학교는 서북지방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로서 그런 아카데믹한 분위기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상당히 민족적인 분위기가 우세했고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시절 기독교 계통 사립학교들은 민족주의 교육이 일상적으로 행해질 정도로 상당히 민족의식을 강조하고 공유했던 공간이었다. 그런 연유로 일제 식민당국이 4차례 강행한 교육법 개정 역시 민족 교육의 온상인 사립학교들을 억압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거부운동 당시 윤동주가 재학 중이던 평양 숭실중학교나 박치우가 재직 중이던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의 거센 저항은 그런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표출한 사건이었다.

1933년 9월 12일 부임해서 1938년 3월 31일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강제 폐교된 숭실전문학교를 떠날 때까지 철학자 박치우는 사상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았다. 현실과 유리된 아카데믹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박치우는 민족이 처한 비참한 현실과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깊은 고뇌와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 1949년 11월 빨치산 유격투쟁 와중에 군경토벌대에 사살된 천재철학자 박치우(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1936년 1월 잡지 『조광』에 발표한 글 「아카데믹 철학을 나오며」는 박치우 스스로 자신의 학문세계가 대전환을 맞았다는 자기선언이었다. ‘철학이란 무엇이며 더구나 이 땅! 조선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적 질문 속에 박치우는 실천을 지향하는 철학적 탐색을 시도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시절 박치우는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한다. 조선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발자국인 셈이다. 그리고 자신이 정립한 철학적 개념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고 제국주의 일본은 황도 국민정신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강제했다. 결국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학교는 강제 폐교되었다. 박치우는 당시 방응모가 만든 장학회 ‘서중회’ 회원이었기에 바로 이튿날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1938년 4월 1일 박치우가 조선일보로 옮긴 사건은 박치우의 삶에 또 다른 전기를 맞게 했다. 이육사의 동생 이원조가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자신의 상관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원조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사회주의자로 일제치하 부르주아 문학작품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해방 공간에선 좌파언론지 『현대일보』 편집국장으로 언론활동을 통해 직접 변혁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한국전쟁기엔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특히 이원조가 『현대일보』 편집국장 시절에 『현대일보』 발행인이 박치우였다. 박치우가 빨치산 투쟁에서 총살되고 이원조는 남로당 숙청 때 임화, 김남천, 설정식과 함께 미제스파이로 투옥돼 평양교화소에서 사망했다.

박치우는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총독부 시책인 물자절약 차원에서 자진 폐간하기 전에 경성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30년대 중반 파시즘의 대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던 박치우는 파시즘의 대두를 위기로 진단했고 시대의 위기와 싸울 것을 역설했다. 1934년 2월 『철학』 제2호에 쓴 「위기의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 박치우는 위기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독일의 파시즘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제 식민 통치 말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박치우는 직접 그리고 노골적으로 파시즘의 또 한 축인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할 자신이 없었다. 1940년 경성제대 대학원 진학은 박치우가 치열한 삶을 요구하는 일제 말기 현실로부터 아카데미로 자신을 감춘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대학원 진학은 일종의 도피처인 셈이었고 대학원 시절 박치우의 전공 역시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았던 것 역시 암울한 현실과 일정한 거리두기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비록 경기도 경찰부가 작성한 비밀문서이긴 하지만 박치우가 조선일보 퇴직 당시 1,000엔이라는 고액의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았다는 점이다. 고액의 퇴직금과 대학원 진학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은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1938년 4월 박치우가 조선일보에서 이원조를 만난 사건은 1940년대 박치우의 해방 이전 숨겨진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1940년 박치우가 경성제대 대학원 진학 후 1945년 해방 직전까지 행적이 불투명하다. 훗날 박치우의 진술에 따르면 박치우는 1940년대 어느 시점에 중국으로 건너갔고 중국에서 활동하다 해방을 중국 땅에서 맞았다.

따라서 박치우의 해방 전 행적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를 이원조에게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박치우와 이원조는 1938-1940년 기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서 함께 활동했고 해방 이후엔 박치우와 이원조는 같은 남로당원으로 정치노선을 같이 했으며 『현대일보』에서 함께 활동하며 사회변혁 활동에 함께 투신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박치우에 대해 최초로 연구된 논문은 손정수의 「신남철 박치우의 사상과 그 해석에 적용하는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장」(2005)이다. 물론 손정수는 1996년 서울대 석사 논문으로 「일제 말기 역사철학자들의 문학비평 연구」에서 박치우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06년 윤대석은 『우리말글』 제36권에 「아카데미즘과 현실 사이의 긴장 - 박치우의 삶과 사상」을 발표함으로써 철학자 박치우 연구의 계몽기를 열어젖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철학자 박치우를 연구한 서적이 출간된 것은 윤대석, 윤미란이 함께 펴낸 『박치우 전집』(2010)과 류승완이 쓴 『이념형 사회주의』(2011), 그리고 위상복이 출간한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2012)이 잇따라 세상에 나오면서부터이다.

▲ 2012년 전남대 위상복 교수가 7년 자료 수집과 2년에 걸친 집필 끝에 펴낸 <불화 그리고 불온한 시대의 철학 - 박치우의 삶과 철학사상> 책 표지.(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길 출판사)

그들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들어간 박치우는 자신의 상관으로 만난 이원조를 매개로 항일혁명시인 이육사와 연결된다. 박치우와 이육사는 1943년 어느날 중국 북경으로 잠입한다.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투옥됐다 1943년 여름쯤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태준이 아내 박진홍과 함께 화북 연안으로 탈출한 시기와 비슷하다. 김태준이 아내 박진홍과 함께 화북 연안으로 탈출한 배경은 국내외 항일무장투쟁을 서로 연계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화북 연안에는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김명시가 파견돼 무정 장군 부관으로 항일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이육사의 절친 윤세주 역시 태항산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육사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중국 북경으로 잠입했을 땐 윤세주는 얼마 전 태항산 반소탕전(1943. 5)에서 이미 전사한 뒤였다. 물론 이육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43년 박치우와 이육사의 중국 북경 행은 같은 목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육사가 일제 경찰에 피검돼 고문 끝에 피가 낭자한 채로 죽어 갔을 때 이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이병희 역시 이육사와 함께 일제 경찰에 투옥돼 있었고 그 역시 경성 콤그룹 활동가였기 때문이다.

박치우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국내에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박치우가 귀국한 것은 해방된 해 11월이었다. 그 사이 박치우는 장춘에서 경성콤그룹 동지인 이명신과 함께 ‘장춘해방동맹’ 및 『한민일보』 발간에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40년대 일제 강점기 암흑기로 치닫던 그 순간, 박치우가 단순히 현실도피처로서 경성제대 대학원 아카데미를 선택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박치우 역시 모종의 임무를 띠고 중국 북경으로 잠입한 것이고 해방이 되자 조직의 지시에 따라 만주에 남아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20대에 『조선 소설사』와 『조선 한문학사』를 써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태준 역시 항일전선 참가와 해방공간 민족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동안, 문학도로서 자신의 연구 활동을 뒤로 미루고 당대 절체절명의 당면과제에 충실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박치우는 해방이 돼 중국에서 귀국함과 동시에 해방 공간 좌파가 중심이 된 통일전선체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민전) 결성대회 준비위원 및 민전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박헌영 비서가 돼 4차례 방북 과정에서 3차례 수행했다.

『현대일보』 발행인 겸 주필로 있을 때 박치우는 우익 청년들로부터 테러를 당하곤 했다. 남로당을 비롯해 좌파 정치세력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과 극우파시즘을 비판한 『현대일보』 논조 때문이었다. 박치우는 1946년 10월 대구 인민항쟁 당시 미군정 경찰로부터 지명수배를 받고 소환되었지만 불응했다.

부득불 박치우는 월북 후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해 정치부원장을 맡아 사상교육을 담당했다. 그러다 1949년 9월 6일 박치우는 직접 강동정치학원 출신 360명을 제1군단으로 편성해 남쪽 빨치산 부대로 내려왔다. 오대산, 태백산으로 이동하던 박치우 빨치산부대는 국군 제8연대의 토벌에 직면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박치우는 앞서 침투한 김달삼 부대와 연합해 전투 중 그해 11월말 경 군경토벌대에 사살된다.

군경토벌대에 사살되었을 때 당시 ‘빨치산 유격대 괴수’ 박치우는 나이 마흔이었다. 제1군단 사령관 이호제가 토벌대에 사살된 후, 목이 잘렸듯이 1군단 정치위원 박치우 역시 그런 죽음을 맞았으리라! 외세에 의해 분단된 암울한 현실 앞에서 철학자로서 자신의 사상대로 해방공간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 박치우의 삶과 죽음은 어쩌면 엄숙한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경성제대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천재 철학자로 인정받은 박치우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볼세비즘을 좇아간 그 신념이나 철학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반면에 박종홍은 서양철학을 수용한 철학 1세대로서 한국 실존주의 철학의 효시이다. 박종홍은 철학의 실천을 강조하며 대학 강단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분명한 사실은 철학자 박종홍이 일제감점기 시절이나 해방 이후 1976년 작고할 때까지 파시즘 체제를 비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강고한 제국주의 질서와 해방 후 파시즘에 준하는 독재체제에 저항 없이 순응했다.

▲ 한국 사회 서양 철학을 수용한 철학 1세대 박종홍(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 사회 실천철학에서 박종홍의 업적은 중요한 성과를 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철학적으로 봉사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다시 말해 철학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기초로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독재체제를 비판한 적이 없다. 다음은 최초로 발간된 철학 전문 잡지 『철학』 제1호에 실린 박종홍의 글이다. 철학도로서 박종홍 스스로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

“철학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절실한 자기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비록 사소한 문제일는지는 모르나 진실로 적극적 정신을 가진 힘 있는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중략) 즉, 철학이 무엇이라는 개념을 가지기 전에 벌써 우리는 사실에 있어서 철학을 하고 있다. ‘철학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本性)에 속한 것이요, 단지 학과의 일부분도 아니며 학자의 이지(理智)로써 짜낸 어떤 특이한 영역(領域)도 아닐 것이다.”

실제로 박종홍은 서울대 철학교수로서, 그리고 당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존경 받는 학자로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미화하는 데 자신의 철학을 활용한 인물이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의 전주곡인 국민교육헌장(1968)을 기초한 실질적인 인물이자 72년 10월 유신(維新)에 이름을 붙여준 10월 유신의 명명자가 바로 철학자 박종홍이라는 사실은 단적인 사례이다. 그런 측면에서 비록 늦었지만 철학자 박종홍에 대한 공과는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 엄격히 재평가되어야 한다.

흔히들 열암 박종홍을 유교, 불교를 비롯해 한국 전통 사상을 현대화시킨 최초의 인물로 기억한다. 그 직계 제자들은 열암기념사업회를 통해 철학자 박종홍을 세계적인 철학자로 부각시키려 분투한다. 박종홍이 연구했던 원효, 의천, 지눌, 이퇴계, 그리고 19세기 최한기의 사상을 독특한 민족 주체적인 사상으로 현대화하여 해석한 철학자로 스승 박종홍을 추앙한다.

나아가 철학자 박종홍이야말로 동서고금의 철학을 망라한 사상가로 한국적 특수성을 세계 보편적 가치 속에 담아낸 철학자로 높게 평가한다. 60-70년대 민족이 당면한 현실 문제를 창조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 사상을 현실에 적용시킨 실천적인 철학자로까지 찬미하고 숭배한다.

그러나 과연 철학자 박종홍은 그 직계 제자들의 표현대로 존경할 만한 인물일까? 필자는 박종홍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대단히 조심스럽고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철학자 박종홍을 대대손손 존경할 만한 위대한 철학자로, 반면에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치우를 망각의 철학자로 역사의 감옥에 유폐시키는 것은 또 다른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역사 왜곡은 현실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진원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이유는 현실을 바로 바라보기 위함이요, 나아가 미래를 제대로 전망하고 설계하기 위함이다. 왜곡된 역사인식의 토대 위에선 감히 한국 사회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종홍은 1903년생으로 신남철보다 4살 많고 박치우보다 6살 연상이다. 뒤늦게 만학으로 1929년 경성제대에 입학한 탓에 박치우와 졸업 연도의 차이는 1년밖에 나질 않는다. 박종홍은 평양고보 재학 시절 3·1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인생의 일대 전환을 맞는다. 김산, 조봉암, 김성숙, 윤세주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삶의 질적인 전환을 맞는 것처럼 박종홍도 스스로 고백하듯이 3·1 만세 사건을 계기로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3·1독립운동 당시 박종홍은 3주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돼 친구들이 고문당하는 걸 목격하면서 치를 떨고 일제 통치에 분노한다. 그러면서 참담한 현실로 고통 받는 우리! 바로 우리 민족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다. 그리하여 이전까진 교과서 이외에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박종홍은 닥치는 대로 독서에 열중한다.

맨 먼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한문으로 된 우리 역사책을 탐독한다. 그런 와중에 일본인 다카야마가 쓴 『근세미학사』를 접하면서 미학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접한다. 20세에 대구 수창보통학교 교사를 하면서 논리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공부하는 내내 박종홍에게 ’우리’, ‘우리 민족’은 철학적 탐구의 기저를 이루었다.

결국 철학자 박종홍에게 ’우리’, ‘우리 민족’은 민족적 우월의식을 지닌 ‘천성적 민족우월주의’로 귀착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타고난 기질과 창조적인 재능은 다른 민족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장점으로 극찬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전 세계에 내보여도 손색이 없는 우월함으로 자긍심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박종홍이 탐구하고 주장한 민족우월주의는 일제 강점기 식민제국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질 못했다. 결코 일제 식민당국을 비판하는 철학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했다.

일제 말기 이화여전 교수를 하다 전시 상황에서 갑자기 실직 당했을 때 박종홍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으로 일한 적이 있다. 1944년 7월부터 1945년 6월까지 박종홍은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그가 친일을 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기간 동안 박종홍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가 알려진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에 추종하거나 협력했다고 비판할 근거도 없다.

실제로 박종홍은 일제강점기 시절 식민통치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식민통치에 협력하기보다 현실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초연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된다. 이화여전 교수 시절 학생들이 일본인 교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자 백지동맹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당시 박종홍은 교실에 들어와 제자들에게 ‘잘했다! 잘못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수심에 가득 찬 모습으로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화여전 교수 시절 백지동맹 사건에 참여했던 제자, 김옥길(전 이화여대 총장)은 그렇게 회상했다.

박종홍은 1933년에 출간한 『현대철학의 동향』에서 하이데거와 니체의 철학을 나치즘과 연관지어 비판했다. 그럼에도 고희를 눈앞에 둔 나이에 박종홍은 박정희 정권에서 교육문화 담당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지낸다. ‘국민정신’을 강요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3인 기초위원으로 참여하고 유신독재의 서곡인 10월 유신의 명명자가 된다.

▲ 박정희 정권 <국민교육헌장>은 메이지 유신 <교육칙어>와 비슷하다. <교육칙어>와 달리 <충효>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국민정신을 강조할 뿐, 사회정의와 인권이란 낱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후 박정희 70년대와 전두환 80년대엔 학교교육에서 유달리 <충효>를 강조했다.(출처 : 박영신 선생님 제공)
철학자 박종홍이 이인기(서울대 대학원장, 도쿄대 교육학), 유형진(건국대 교수, 하버드대 교육학)와 함께 기초위원으로 참여해 만든 국민교육헌장 초안은 이후 심의 과정에서 개인의 기본권과 정의를 삭제하고 더욱 국가주의 요소를 강화시켰다.

자신의 철학이론과 현실의 모습이 어긋나 보이지만 철학자 박종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국적 있는 교육’이나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는 박정희 정권에서 ‘민족’을 앞세운 자신의 철학이론을 실천적으로 현실에 접목시킨 것으로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사상 속에서 주체성과 창조성, 그리고 민족의 우수성을 찾아내고 그 민족우월성을 현실 정치 속에서 실천적으로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박정희 유신체제에 참여한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 박종홍이 유독 근대화와 주체성을 강조하는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자신의 국가철학을 펼친 것은 소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기보다 적극적인 것이었고 서로 궁합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자 박종홍이 박정희 정권에 참여한 것은 60년대 말 국민교육헌장 제정과 70년대 교육문화 담당 대통령 특보가 전부는 아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쿠데타 최고 권력기구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사회분과위원으로 추대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해 10월 문교 재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한 달 뒤엔 재건 국민운동 중앙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1년 뒤 1962년 서울대 대학원장이 된 이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그해 8월 15일에 훈장을 받고 10월에는 중앙국민투표 관리위원이 된다.

1966년 5월에는 5·16민족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1967년에는 이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 3인 기초위원(박종홍, 이인기, 유형진)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철학자 박종홍은 60-70년대 박정희 정권 내내 권력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철학자 박종홍은 이승만 철권통치가 자행되던 12년 동안 독재정권을 비판한 적이 없다.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한 경우는 더더욱 없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에선 적극적으로 현실권력에 밀착돼 있었다.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임을 강조하고 유신독재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국민교육헌장에서 ‘정의’를 삭제했다. ‘정의’ 대신 ‘성실’로 충분하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던 철학자 박종홍! 그는 전 국민을 향해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이해하라는 뜻에서 『국민교육헌장 독본』을 발간해 배포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박종홍의 철학은 박정희가 추구한 조국근대화의 위업을 이룩하는 데 아낌없이 활용되고 동원되었던 셈이다. ‘반공=민주주의’로 인식되고 민주주의의 반대가 ‘공산주의’로 등치되던 무서운 시절에 철학자 박종홍은 철학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해방공간 박치우가 『사상과 현실』(1946)을 펴냈을 때 박종홍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며 철학 동료 박치우를 극찬했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최초로 수용한 1세대 철학자 박치우와 박종홍, 그리고 신남철은 경성제대 졸업 후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선보였던 신남철은 월북 후 연안파 신민당에 가입해 김일성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50년대 말 종파투쟁 끝에 연안파가 숙청되면서 신남철도 숙청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박치우는 마르크시스트로서 남로당에 가입해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고 1949년 말 군경토벌대에 사살되었다. 박종홍은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 철학 연구와 후학양성에 몰두하였고 당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박종홍의 철학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붕괴되면서 세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정치적 패배자로 몰려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경성제대 철학 동료들과 달리, 철학자 박종홍은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정권 시절 현실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주의 교육철학을 구축하는 데 철학자 박종홍은 스스로 일익을 감당하며 박정희 유신체제에 철학적 기초를 다져 주었다. 그리고 ‘유신은 민족중흥을 실현하려는 과제’라고 역설하며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국민정신’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결국 박종홍은 유신을 내세워 국민 동원체제와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데 자신의 철학을 아낌없이 제공했다.

이제 후대의 사람들은 박치우와 박종홍을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까? 분단 75년은 과잉이데올로기로 질식된 시대였다. ’반공’이라는 특정 이데올로기가 압도한 시대였다. 이제 이데올로기 금기를 넘어서야 할 시점이다. 그렇지 않고선 한국 사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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