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독립신문에 북간도 독립군의 승전보를 발표했다. 봉오동전투의 시작이 된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에서의 본격적인 전투 전개, 그리고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독립전쟁에 대해 전반적인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이 발표문은 봉오동전투의 작전계획과 전투상황, 그리고 전투의 결과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이 발표문만 읽어봐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군이 얼마나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들을 아군我軍, 즉 대한민국의 군대라고 부르고 있다.

▲ 1920년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문이 실린 독립신문

다음은 독립신문의 내용이다.

봉오동(鳳梧洞) 부근의 전戰

1. 전투 전 피아의 형세

적은 봉오동을 아군의 책원지라 하야 포위공격을 하려하고 적의 보병 약 1대대는 보병을 선두로 하야 고려령 방면으로 전진 중이며 따라서 아군은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하다.

제1중대장 이천오는 부하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점위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를 하였다가 

각기 엄밀하게 전투에 대비하다가 적이 도래할 시에 적의 전위부대는 봉오동 입구를 통과케 한 후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하고 있는 포위 중에 들어오면 호령에 의해 사격하게 하였다.

연대 장교 이원은 본부의 잔여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산간에 위치하여 병원 증원과 탄약 보충, 식량 보급 등의 임무를 맡겼다.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은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 북편 1200m 되는 고지와 동북편 촌락 앞쪽에 약간의 병사를 나누어서 잠복하였다가 적이 들어오거든 개전하여 전진을 지체시키다 봉오동 방면으로 거짓 퇴각하는 작전을 펼쳤다.

사령관 최진동과 부관 안무는 동북산 서간 최고봉 독립수 아래에 위치하고 지휘했다.

2. 전투의 상황 

고려령에서 아군에게 공격을 당한 일본군이 다시 부대를 정돈하여서 같은 날 오전 11시30분에 출발하여 봉오동을 향해 전진하여 오후 약 1시에 적의 첨병은 봉오동 상촌에 도착하였다.

아군은 더욱 은폐하여 잠복부동하니 적의 전위가 통과하고, 그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삼면 포위 중에 들어왔을 때, 사령관의 지휘 호령에 의하여 맹렬한 급사격을 하니 적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생존자는 혼란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다.

그 때 제2중대장 강상모가 부하를 인솔하고 맹렬히 진격하여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중요 지점에 부하 중대를 잠복시켰다가 적의 응원대가 들어올 때 약간의 사격을 하다가 교묘히 거짓 퇴각하니, 서쪽 길로 들어오던 적은 서로 총을 난사하여 적화(적의 무기)로 적을 사살케 하였다.

대패한 적군 수천 명은 온성 유원진 방면(두만강변)으로 퇴각하였다.

3. 피아彼我의 손해수損害數.

적군의 사망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요, 아군의 사망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은 많이 있었으나 아군의 군수품 운반 마차가 없고 전투를 목적으로한 계획전이 아니요 불우전이 되므로 다음 기회를 위한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보병총 약간 정만 수취하였다.

4. 아군은 당장의 전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기에 안전지역으로 퇴각하고

적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가지고 다음날 두만강을 건너 우리 국내로 귀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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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문은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가 봉오동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전투체제로 부대를 배치하고 일본군의 진입을 기다리는 유인책을 썼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봉오동전투의 승리가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의 치밀한 작전과 뛰어난 용병술에 의한 준비된 승리였으며 당시 전투개시를 명령한 지휘관이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봉오동에 살면서 현장을 눈으로 보고 증언한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에 의하면 최운산 장군은 첩보에 의해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예측하고 전투 개시 한 달 전인 5월 중순에 이미 봉오동 산위에 능선을 따라 구부구불 참호를 파고 매복전을 준비했다고 한다. 산에서 전쟁에 대비한 참호를 파는 것은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 소규모 군대에서는 실행할 수 없는 전쟁 준비다.

또한 중국 장작림 군벌시절부터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인들로 구성된 대한군문도독부 군이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군사훈련을 책임지고 있었다. 일제보고서에 의하면 1920년 초부터 봄까지 두만강변의 일본군 국경수비대 습격전이 수십차례 있었다. 이 국내진공작전도 대부분 대한군무도독부 군이 주도했었다. 수비대 초소를 전멸시키는 등 일본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봉오동의 독립군은 이미 일본군과의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준비와 경험을 가진 정예 군인이었기에 유인전과 매복, 철저한 잠복과 동시 집중포화 등이 가능했다. 정식 군대가 아니면 실행할 수 없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우리 독립군이 당시 아시아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 즉 작전과 병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의 문서에 기록된 지극히 상식적인 이 설명이 지금까지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그저 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의 총솜씨와 부하들이 호랑이를 잡았던 날쌘 사냥꾼 출신이라는 것이 봉오동전투 대승의 비결로 전승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런 허술한 설명에 대한 문제 제기조차 없었다. 날쌘 사냥꾼이면 정규 군대의 훈련을 능가할 수 있는지?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잡던 포수 출신 의병들이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훈련된 군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의 설명이니 무조건 신뢰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에야 역사사료를 통해 전설 같은 이야기로 포장된 역사를 다시 돌아보며 역사학자들의 상상력의 한계와 선행 연구자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있다.

사실 이 군무부 발표문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사료다. 그동안 이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문서의 원본을 읽어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 연구는 학자들이 계속 새로운 사료를 찾고, 현장 확인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선행 연구자의 논문을 원본 확인도 없이 재인용하는 손쉬운 연구 방식을 선택하면서 오랫동안 봉오동전투와 북간도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학문적 오류는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아직도 자신이 본 사료가 전부라는 생각에 그 주제에 관련된 다른 사료가 더 있다는 것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전문가의 권위로 후손 등의 문제제기를 가볍게 여기거나 외면하는 학자들을 자주 만난다. 갈 길이 멀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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