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나는 사실상 한국에 영구 귀국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미국을 가더라도 일시적으로 머문 후 곧 귀국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암에 살면서 통일 코리아를 꿈꾸며 한반도 중립화 운동을 하는 것이다

56년동안 서양에서 이민생활을 해 온 내게 전라남도 영암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2015년 30명의 국제평화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평양에서 판문점까지 통과한 Women Cross DMZ 행사를 마치고, 영암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하늘이 내게 점지해 준 곳이 영암군 군서면 한 귀퉁이에 보석같이 반짝이는 구림마을이었다. 그런 곳에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림마을 2,200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영암에 집을 마련하였고, 지척에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그 곳에 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는 월출산의 산세와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구림마을을 감싸고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구림마을은 월출산의 주지봉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예로부터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이라 불리 우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암은 삼한시대(기원전 4~2세기)에 마한의 세력 안에 있었고, 삼국시대에 백제의 대외무역항이었다.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출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상대포에서 해마다 4월에 벚꽃 축제가 있어 일본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황톳빛 돌담길과 하천을 따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잘 살려놓은 군서면은 멀리 미국에 있을 때에도 항상 내 마음을 그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국가가 없어지는 것이다. (영암 군서면, 이순신 장군 어록비)

군서면 군립하정웅미술관 옆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비 국보 제76호와 더불어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이 1596년 9월 1일 영암을 방문하여 국난극복을 위한 민정활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 영암군민의 호국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2020년) 미국에서 귀국 후 코로나 때문에 2주간 자가격리를 구림마을에서 한 후 서울에 있는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면서, 나는 또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암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회장 강종일 박사로부터 김삼규 선생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김삼규 선생은 제1공화국부터 시작하여 1989년 사망할 때까지 국내외(일본)에서 동지 없이 독보적으로 활약한 중립화 통일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1908년 영암군 영암면에서 태어난 그는 영암에서 <독립만세운동>를 주동한 혐의로 투옥되어 감옥살이를 한 그의 형 김만규가 출소 후 함께 일본으로 갔다.

김삼규 선생은 21세 당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경유학생회 위원장으로 <식민지교육반대> 삐라를 만들어 광주에 보냈고,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좌익운동에 관여하다가 동경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는 동안 ‘무산자사’ 조직에 가담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하여>라는 문서를 출판하여 유학생 편으로 한국에 보낸 사실이 탄로되어 1931년 8월 서울의 치안당국이 보낸 종로경찰서 요원들에 의해 동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3년간 많은 책을 읽었고 출소 후, 가족이 있는 동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김삼규 선생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Neutralization of Korea”(한국의 중립화)라는 제목의 글을 Japan Times에 투고했으며, 1953년 6월 11일 “대외적으로는 중립화, 대내적으로는 민주화가 조선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글을 조일신문 논단에 기고했다.

김삼규 선생의 중립화 통일론을 요약하면, “영세중립국이란 전시나 평시에 있어서, 언제라도 중립을 지키는 나라이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4대강국에게는 한반도가 국제적으로 보장된 중립국이라야 안심할 수가 있다. 두개의 세력권으로 분단되어있는 조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환원하는 길은 통일조국의 중립화를 전제로 한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부터 표면화된 미.소의 패권싸움이 우리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에 편승하여 표현된 것이며, 6.25전쟁을 통해 중국과 일본이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를 둘러싼 4대 강국이 모두 이 분단에 관여하게 되었다. 4대 강국이 납득할 수 있는 통일조국의 모습은 4대 강국이 두려워하지 않는 통일 코리아, 즉 어느 나라와도 동맹하지 않는 것이 국제적으로 약속되어 있는 존재 양상이다”고 설명된다.

영세중립국의 실현은 사실상 국민 전반의 고차원의 영성지능과 개인의 독자적인 통찰력과 의지력을 요하는 일이다. 일신의 성공과 명예를 생각하는 사대주의 사고방식에 비해, 통일을 위한 민족적 입장과 국제평화 존중의 입장을 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화이다. 그것은 남북이 타협하고 4대 강국이 타협하도록 국민들의 소망을 모으는 유일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한반도의 중립화야말로 통일운동의 대 전제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세중립국이 이뤄지고 평화가 보장되게 되면 지금까지 분단이 빚어 온 국내외의 코리안 들의 생명 에너지를 고갈 시켜 온 모든 갈등 구조가 사라지게 된다. 그때부터는 한국인들의 창의력과 생명력은 전적으로 국내의 사회복지와 인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발상과 발명에 모아질 것이다.

나는 3대째 한반도의 영구평화를 위한 중립화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1948년에 외조부 이종만 선생이 북으로 가시고, 우리는 이산가족이 된 채, 해외로 이민을 나가서 3대양 4개국에 흩어져 자유로이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60년 전 외조부로부터 시작된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 집안의 헌신은 2013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역이민 하여 제주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일선님을 거쳐서 이제 나에게 와 있다. 해외 여러 나라에 살면서 나는 한국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든지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내게 주는 사명감과 더불어 뿌리 깊은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방역 일등국이 된 한국은 앞으로 영성 일등국, 도덕 일등국, 창의성 일등국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는 모범을 보일 것이라 예측한다.

현재 한반도의 중립화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닫힌 마음 때문에 코앞에까지 와있는 수많은 정보를 놓치고 있다.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인식은 세상사를 입체적이고 넓게 보는데 있다. 열린 마음으로 평양을 한 번만 방문하게 되면 순식간에 의식의 전환이 오게 된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현재 한국인들은 미국적 개인주의나 물질주의적인 자본주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는데 자신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 미국이 혈맹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미국화 된 한국 사람들의 사고체계는 자신의 혼 줄을 자진해서 빼놓고 있다. 분단이 초래한 친미반공정신의 늪 속에 깊이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 운동가들의 비전을 되살리고, 현재 자기의 앞길도 헤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강대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 꼬레아 영세중립 연합국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에 와있다. 촛불 시민들의 각성으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한 반석을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시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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