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이(태명)는 지난해 12월 24일 19시 28분에 태어났다. 언감생심, 그리스도의 탄생과 견줄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랴. 손주를 위해 촛불을 밝히고 기도했다. 너는 예수님 같은 삶은 꿈도 꾸지 말고 그저 네 한 몸 맑고 밝고 향기롭게 살다 가라고.

그런데 사돈어른도 참, 외손주 넷 볼 때까지 경기도 이천 신둔면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친손주가 그리 좋으실까.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엄동설한에 사부인 대동하고 오셨다!

장동리 당신 집에서 10여 분 걸어 나와 24-4 버스 타고 이천역, 양재역, 백석역 빙빙 돌아 일산 병원까지 대여섯 번을 갈아타고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오시더니 글쎄, 눈인사도 건성건성 숨도 고르질 않고 신생아실 앞에 드리워진 커튼만 바라본다. 그 큰 몸집 까치발 딛고 쫑긋쫑긋 좁은 틈새 비집고 창문 너머 간호사가 안고 있는 손주를 바라본다. 끊임없이 싱글벙글 도톰한 함지박 입 다물지 못하니 나 원 참, 옆에서 쫑쫑이며 곁눈질하다가 한 마디 했다.

“우리 강이는 친가를 많이 택했는갑소. 눈 크고 앞이마 훤한 것이 영락없는 사돈이요, 길쭉한 입 꼬리와 뚜렷한 입술 선은 사부인을 빼닮았응께.”

인사치레로 푸짐하게 보태 한 말씀 했는데 사돈댁 겸양은 마실 갔나? 성탄절 전야라 음식점마다 장사진이라, 어렵게 자리한 ‘조선초가한끼’에서 육전 한 점 드시다 말고 상글방글, 탕탕이 한 젓갈 드시다 말고 싱글벙글. 이리 말해도 하하하, 저리 말해도 허허허. 무슨 놈의 육전은 그리 짐짐하고 곰실곰실 탕탕이는 왜 그리 흉측하게 보이는지...

사돈 내외 가신 뒤에 눈매, 입매, 콧매, 이마, 하나하나 뜯어보니 누가 봐도 친탁이라. 어리바리 절레절레 새들새들 티가 났나? 빤히 보던 마노라님 혀를 차며 한 말씀.

“기다려 봐요. 요놈이 머잖아 지어미보다 당신을 더 좋아할걸. 지어미 어렸을 때보다 아장바장 당신 더 쫓아다닐걸. 그 때가서 귀먹은 푸념일랑 하지 말고 외탁 친탁 가리지 마요. 익은 밥 먹고 선소리하지 말고 애나 잘 봐요. 그래도 귀는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없는 말 한 마디 보탠 걸 내 모를까? 귓불인지 귓바퀴인지 모르지만 얼마나 짠했으면,,, 중요한 건 그날 이후 강이 얼굴 볼 때마다 사돈 얼굴 떠올라 그날의 부아가 스멀스멀 다시 도질 때도 있지만 아서라, 그런 걸 따져서 엇따가 쓴다고? 그래도 귀로 눈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강이를 보러 왔던 아들이 거든다. 나중에 알았지만 딴에는 ‘짜자잔’ 하면서 깜놀할 소식을 전하려던 아들이 제풀에 겨워 그만 발설하고 만 것이다. 아빠 닮은 친손주가 지금 잘 자라고 있다 하며 며칠 전 찍었다는 동영상을 보여준다.

‘떵이’의 심장박동 소리가 우렁차다. ‘슉슉슉슉슉…’ 빠르고 경쾌한 비트음이 이어진다. 다시 들어보니 증기기관차 엔진소리처럼 힘차고 율동적이다. “아빤 안 보여? 여기가 눈! 요긴 코, 입술. 잘 봐, 손톱도 보이잖아. 누가 봐도 할아버지 닮았구만!” 하더니 내 이맛머리를 쓸어 올린다.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은 얼굴 윤곽이랍시고 핸드폰을 코밑에 들이밀며 씩 웃는다.

맞다! 차라리 떵이도 외탁이면 좋겠다. 시원시원한 키, 우람한 체격, 사글사글한 얼굴, 걸걸한 목소리, 고운 맘결에 아무리 드셔도 허술한 데 보이지 않는 당당함… 내가 감히 넘보지 못할 수원 사돈이 떠오른다.

예끼, 이놈아. 아무려면 어떠랴. 내 새끼가 났으면 그만이지, 누가 뭐라든.


이글은 한겨레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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