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8일 아침, 큰 눈이 쏟아 붓듯 내리는 서울.

오빠! 당신의 장례식이 대만시간 10시에 시작합니다. 저는 서울에 돌아와 창밖에 휘날리는 눈꽃 송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개구쟁이 당신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모두 장난꾸러기였습니다. 할머니는 대나무 회초리로 우릴 다스렸는데, 그 회초리는 벽에 높이 매달려있는 액자 뒤에 두었지요. 할머니가 매를 어디다 감추는지 모두 알았습니다. 대나무가 액자 양쪽 밖으로 튀어나왔으니까. 어느 날 오빠는 어른들 몰래 대나무 회초리를 자른 후, 귀신도 모르게 액자 뒤에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 라문황 한지 민속화

며칠 후, 오빠는 또 할머니를 화나게 했습니다. 할머니는 오빠를 때리려고 회초리를 꺼내 휘둘렀는데, 꺼낸 대나무가 반 토막인 걸 알았지요. 할머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오빠의 그림자를 쫓으며, 동시에 애꿎은 며느리 욕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키웠기에 이리도 단정치 못한 애가 되었냐고. 어머니는 액자 뒤에 반 토막이 남아있는 것을 보시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요.

눈앞에서 춤을 추는 눈꽃 송이를 보고 있으니 할머니의 매를 피해 달아나던 그림자가 떠오릅니다.

1월 8일 오후. 저는 대만에 있었습니다. 오빠의 종이 기저귀를 갈아줄 때 요양사가 다가와 거들며 묻습니다.

“언니, 언제 한국에 돌아가요?” 모레 돌아간다고 대답했습니다.

“언니, 대만에는 언제 다시 돌아와요?” 또 묻습니다.

오빠가 우리들 대화를 듣고 있으며, 내가 다시 대만으로 돌아와 함께 있어 주길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대답하기 난감하여 모호하게, “몇 달 뒤에!”

오빠의 몸을 닦아주고 옆으로 뉘자 고개를 돌려 저를 보고, “그렇게나 늦게!”

오빠의 실망한 표정을 보고 서둘러 대답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상황을 보고요. 가능하면 20여 일 후에 다시 돌아올게요.”

오빠는 제가 몸을 다 닦을 때까지 묵묵히 계시다가 저를 보고 한마디 했습니다. “가는 길 편안해라”

저는 똑바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를 껴안아 휠체어에 앉히고, 요양원 병상에서 창밖으로 보이던 귤나무를 보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던 이틀 동안 오빠는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창밖에 과일나무가 귤이 맞지? 내 기억에는 귤이 많이 달렸었는데 왜 안 보이지?”

‘오빠, 이틀 동안 안경을 끼지 않았기 때문이잖아요. 안경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있으니 나무에 달린 귤이 보이겠어요?’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바람이 강해서 물었습니다. “오빠, 추워요?”

“조금 춥지만, 침상에 누워있는 것보다 밖에 나오니 더 좋다.”

듣는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틀 후 10일 저는 서울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시간이 없어 누구도 오빠를 돌보지 못한다면 침상에서 홀로 말기 암의 통증과 싸울 수밖에 없겠지요. 오빠는 하늘을 바라보며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원래자리(천리교의 발상지 일본 나라)로 돌아가 교조님 옆에서 좋은 전교자가 될 거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오빠와 이야기할 용기가 그동안 없었습니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참으며 대꾸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부모신으로부터 빌린 것, 시간이 되면 몸은 반드시 부모신에게 돌려주고, 영혼은 원래자리로 돌아가 윤회의 길로 나갑니다.”

오빠는 평온하게, “알겠다.”고 대답합니다.

오빠는 매일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 주말에는 애가 몇 시에 오느냐?’고 물었답니다. 저는 자식들이 오빠를 보러 찾아와주길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오늘도 또 여러 번 물었지요. “내일이 주말인데, 꽝위와 샤오위가 몇 시에 오지?”

“애들이 차비를 아끼려고 열차로 오니 4시가 지나야 이곳에 도착해요.”라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오빠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큰언니의 작은딸이 결혼하는 날입니다. 저는 오빠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기에 가족 모두 결혼식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아들이 늦게 오는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대만에는 딸이 시집가기 전날 반드시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저는 제시간에 맞춰 집에 가서 함께 저녁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원래 조카딸을 위해 몇 가지 음식을 만들려고 했는데, 요사이 오빠의 병세가 악화되자 음식을 만들 마음이 사라졌고, 서울로 돌아기기 전 조금이라도 더 오빠 곁에 있으려고 했지요.

저녁 7시, “오빠, 집에 갈게요.”라고 말하자,

오빠는 “그래”라고 짧게 답하고는 두 눈을 감더니 더는 말이 없습니다.

전에는 차를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오토바이를 타고 왔느냐고 묻고, 만약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면 조심해서 가라고 하고는, 제가 가는 걸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안녕’했었지요.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 앞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봤지만 오빠는 눈을 감고 저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가족 만찬이 끝나고 큰조카에게 말했습니다. “큰삼촌 병세가 안 좋다. 나는 모레 서울로 돌아가야 해서, 내일 너 동생 결혼식에는 못 가겠다. 큰삼촌 곁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다,”

이런 이야기를 차마 큰언니 앞에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은 큰언니 딸이 시집가는 경사스러운 날, 제가 참지 못하고 눈물이라도 터뜨리면 여러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니까요.

대만에 있는 동안, 저는 아침 8시 좀 지나면 요양원에 가서 오빠를 돌보고, 오후 6시가 지나면 집에 와서 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매일 밤 11시에 잠을 자면 항상 새벽 5시나 6시에 눈을 떴습니다. 이날 밤에도 11시에 잠들었는데 12시가 좀 지나 깨어나서 전전긍긍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커피 한잔 마시고, 오늘 일어난 일들을 적어 오빠 아이들에게 전송하는데 집안 전화벨이 갑자기 울렸습니다. 놀라서 뛰어가 전화를 받았지요. 요양원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언니! 오빠가 의식불명이에요.”

저는 오빠의 병세가 그렇게 빨리 변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황망한 가운데도 내일 결혼식 행사를 위해 2층에 사는 큰언니와 3층에 사는 큰 남동생이 놀라지 않도록 건너뛰고, 4층으로 올라가 작은동생을 불러 함께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의식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오빠가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오빠가 일전에 요양원 의사 앞에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동의서에 서명했기에, 저는 오빠의 뜻에 따라 바로 결정했습니다. 영안실로 오빠를 옮기려고 하는데 남동생이 묻습니다. “가래가 너무 많아, 먼저 제거해야 하지 않아?” 저는 매우 강경한 목소리로, “아니야!”

제 결심은 분명했습니다. 가래를 제거하고 인공호흡기를 꼽으면 오빠도 엄마처럼 의식이 돌아올 수도 있고, 혹은 한 달, 반년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부호도 아니고 모두가 일합니다. 아무도 종일 오빠를 보살필 수도 없습니다. 오빠의 의식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그저 침상에 누워 홀로 병마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차라리 조금 일찍 떠나 올케언니 곁으로 가시는 게 낫겠지요.

▲ 라문황 한지 민속화

아침 8시 큰 남동생의 처가 오빠 소식을 듣고 먼저 찾았습니다. 혼미한 상태에서도 그녀의 손을 잡더군요. 저는 그것이 고맙다는 표현임을 압니다.

오늘이 큰언니 딸 결혼이고, 대만 풍습에서 외삼촌은 가장 큰 어른입니다. 특히 형부가 없는 경우에는 외삼촌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식을 진행합니다. 아침 10시가 넘어 큰 남동생이 결혼예식을 마치고 급히 와서 오빠를 위해 종교의식을 거행하자 90, 80까지 떨어졌던 심박 수가 바로 160, 150까지 회복되더군요.

마침 큰아들이 급히 도착하여 오빠 곁으로 가서 불렀습니다. “아빠, 저 꽝위예요.”

오빠의 전신이 크게 떨리더니 3차례 깊은 호흡이 있은 후 숨이 멎고, 심전도상의 심박 수가 떨어집니다.

150, 130, 100, 60, 30, 24, 20, 16, 5...

삐-----------------

심전도 파장이 일직선으로 변하고 오빠의 몸은 차갑게 변했습니다. 그렇게 곱게 떠나셨지요. 제가 서울로 돌아오기 하루 전 오빠는 당신의 일생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오빠는 가족이 당신 때문에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셨나요? 아니면 저를 따라 서울에 오고 싶으셨나요? 저는 갑자기 깊은 고독에 휩싸입니다.

지난밤이 오빠의 첫 7일이었습니다. 망연자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창밖에 춤추는 눈꽃 송이를 바라봅니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 오빠가 떠오르고, 우리가 함께 보냈던 최후의 한 달이 점점이 떠오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순간 이 눈송이가 오빠가 저에게 보내온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 눈물을 닦고, 울지 마라’

오빠! 당신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가족 모두에게 최선의 방식으로 이별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늘의 장례식을 끝으로 새로운 윤회의 길로 들어서겠지요. 오빠의 건강하고 행복한 새로운 생을 축원합니다.(번역 : 김동호)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最後 >

2016年1月18日早上,首爾正下著傾盆大雪。

大哥您的告别式將在台灣時間10點開始。我待在首爾的家,站在窗前望向窗外飛舞的雪花,想起童年頑皮的您。

我們小時候總是調皮,奶奶便用竹枝教訓我們,並習慣把竹枝卡在高掛牆上的相框後面。我們都知道奶奶把竹枝藏在那裡,因為竹枝會超出相框的兩側。有一天,您趁大人沒發現,把相框後的竹枝折成兩小截,再神不知鬼不覺地放回相框後方,就像沒有人動過一樣。過幾天您又讓奶奶生氣了,奶奶用力地抽出竹枝來要教訓您,結果發現抽出來的竹枝只剩一小截,奶奶怒不可遏,追著您四處鑽來竄去的跳躍身影,同時叨罵媳婦怎麽養了一個沒有規矩的孩子。媽媽看著牆上相框後面那另一小截的竹枝,哭笑不得。

眼前飛舞的雪花,令我想起您躲著奶奶竹枝的跳躍身影。

1月8日下午,我在台灣。

正在幫您換紙褲時,養老院的護佐過來幫忙。護佐問我:「姐姐什麽時候回去韓國啊!」

我說後天回去,護佐又問:「姐姐什麽時候再回來台灣呢?」

我知道大哥您聽著我們的對話,也知道您一直希望我能再回來陪您。我不知道要怎麼回答,最後我含糊地回說:「幾個月後吧!」

我幫您擦洗身體,您側著身體回頭對著我說:「要那麽久啊!」

看您那失望的表情,我急忙回答說:「我回去看看家裡情况,可以的話二十多天就再回來。」

您默默地讓我擦洗完身體,翻過身來對我說:「祝汝順風。」

我無法正眼看您。

抱您下床坐上輪椅,推您到室外看病房窗外的桔仔樹。這兩日您躺在床上一直反覆問著:「窗外那棵樹是桔仔樹對不對?記得好像結了很多桔仔,怎麽都沒看到桔仔了?」

我很想回您:「大哥,是因為您這兩天眼鏡沒戴好,掉了您也不知道,所以看不見樹上的桔仔。」

但我的喉嚨哽著,什麼話也回不了。

室外的風很大,我問您:「大哥,您會冷嗎?」

您回我:「有點冷,但出來外面比躺在床上好。」

我聽著心很痛。1月10日我就要回首爾了,如果家人沒空來陪您,您只能躺在床上獨自對抗癌末病痛的折騰。您望著天空,告訴我:「我死後,將回到原地(天理教的起源地在日本奈良),在教祖的身邊,當個好用木(傳教者)。」。

對於如何面對死亡的問題,我一直沒有勇氣與您談起。聽您這麼說,我忍著淚水回應您:「人的軀殻是向父母神借貸的,時辰一到,必須將軀殼還給父母神,靈魂會返回原地邁向轉生的路途。」

您平静地說:「我知影(我知道)。」

您每天都會問我,今天星期幾?周末孩子會幾點回來?我知道您盼著兒子們回來看您。今天您又多次問我:「明天是周末,光予和小予幾點回來?」

我說:「他們為了節省車資,搭國光號要四點多才能到您這裡。」

其實我騙了您。明天是大姐的小女兒大喜之日,我見您身體每况越下,便沒告訴您明天是家族都要去吃喜酒的日子,並編造一個孩子晚回來的理由。

台灣的習俗裡,女兒出嫁前一天,必須和娘家親人吃團圓飯,我看著時間,惦記著晚上得趕回家與大家一同晚餐。我本來也想為外甥女做幾樣團圓菜的,但這幾天您的病情逐漸惡化,我已無心做菜,只想在回首爾前盡量多陪您一些。

晚上七點,我說:「大哥,我回家去了。」

您回了聲:「好。」然後閉上雙眼,不再作聲。

以往您會問我是開車還是騎摩托車,我若回說騎摩托車,您就會要我騎車小心,道聲再見,接著揮著手看我離開。

我一如往常地走到房門口後回頭望向您,但您沒有看我,您閉著眼睛。

團圓飯結束,我告訴外甥:「你大舅的病情不好,我後天就要回首爾了,明天你妹妹的婚禮我就不参加了。我想多陪大舅一天。」

這些話我無法當面對大姐說,明天是大姐嫁女兒的大喜日子,我怕我忍不住眼淚破壞大家歡喜的心情。

回來台灣的這段時間,我早上八點多去養老院陪您,下午六點多回家陪媽媽。我每天晚上11點就睡了,一覺到天亮,固定在凌晨五、六點醒來。這一晚我也是11點就去睡了,結果我在12點多醒來之後就輾轉難以入眠。乾脆起身喝杯咖啡,也把今天陪伴大哥的情况寫下來,傳給大哥的孩子們。就在我按下傳出鍵後,家裡電話突然響了。我驚慌地跑去接電話,電話那頭是養老院護士的聲音:「學姐!大哥的意識不清!」

我沒想到您的病情變化如此之快。

儘管著急心慌,亦不想驚動住在二樓的大姐和住三樓的大弟,明天可是大喜的日子。跳過二樓三樓,我直接上到四樓叫小弟跟我去養老院。

一到養老院,病床上躺著沒有意識呼吸急促的您。您之前在安寧醫師面前已簽下放棄急救同意書,因此我馬上决定按照您的意願不搶救。我想把大哥移到安寧房間,小弟問我:「痰很多,是不是先抽痰?」

我用很堅决的口氣回道:「不抽。」

我心裡很明白,要是選擇抽痰、搶救,您會像媽媽那樣醒過來,也許可以多活一個月、半年,但意義何在?我們不是富豪的家庭,每個人都要工作,沒人可以整天陪伴您。就算您再醒過來,也只能躺在床上獨自受盡病痛折磨,不如讓您早日離席與大嫂相伴。

早上八點,大弟媳聽說您的事便前來探望您,昏迷中的您竟然握了她的手,我知道您是在向她道謝。依台灣習俗今天大姐嫁女兒,母舅是最重要的長輩,尤其是姐夫不在了,母舅得代替父親的位置進行儀式。早上十點多,大弟忙完婚禮儀式後趕來為您神授,您心跳一度降到90到80,一下子又恢復160到150。

此時您大兒子趕到了,他靠近您喚著:「爸爸,我是光予。」

您全身顫動著深呼吸三次,接著沒有呼吸了,心電圖上的心跳一路下落。

150...

130...

100...

60...

30...

24...

20...

16...

5...

嗶──

心電圖的波段一變成直線,您的身體亦冰冷起来。您瀟灑離去了。

就在我回首爾的前一天,您就這樣結束了您的一生。您是不想讓家人再為您辛苦了?還是您想跟着我回來首爾?

我突然感到萬般孤獨。

昨晚是您的頭七。茫茫然,夢醒、夢中難分辨。 我望向窗外飛舞的雪花,想起兒時調皮的您,也想起我們最後一個月的相處點滴,忍不住淚流。一時恍然,感覺這些雪花是您寄予給我的話語,要我抹掉眼淚,別哭了。

大哥!謝謝您的豁達,選擇了對大家最好的方式離開。今天的告别式後您將邁向轉生之路,祝福您,願您有個新的康樂生活

라문황 주주통신원  low030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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