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공자는 <주역>을 읽은 지 3년 만에 '지천명', 즉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원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주역은 동양학의 뿌리라고도 합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경전이란 뜻이죠. 주역은 유학에서 말하는 '삼경' 중 하나입니다. 원래 이름은 <역경>인데 '주(周)나라시대의 역(易)’이란 뜻에서 <주역>이라고 부릅니다. 얼마 전 한겨레 주주가 된 김상학 주주님은 현재 대학 교육원에서 주역 노자 장자 역학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동양철학 특히 주역에 대해 관심 갖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막상 호기심에 책을 들추면 너무 어려워 곧 덮어버리곤 할텐 데요. 이번 기회에 주역을 쉽게 접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김상학 주주의 '쉬운 역학(易學)'을 2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우리가 길을 몰라 헤매듯이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에 헤매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지요. 외로움, 괴로움, 근심, 걱정, 두려움, 방황, 스스로의 속박,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들이 그러한 것이겠네요. 이러한 모든 미망(迷妄)은 말 그대로 무지(無知 無明)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성현들께서는 이미 갈파해 놓았지요.

그러면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서 대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를 알면 무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까요. 3독 5욕과 미망, 선입견 고정관념, 색안경 편견 등이 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행(修行)을 하겠지요. 다음의 글을 한번 참고해 보시지요.

 

그대는 한 여자와 살면서 그를 아내라고 부른다.

그대는 한 남자와 살면서 그를 남편이라 부른다.

 

그대는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가?

그대에게서 태어난 자녀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가?

 

그들의 눈을 침묵 속에서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보통 관계나 이름을 말하지요.

 

우리는 어디서 어디까지일까요?

진정으로 관계와 이름이 나일까요?

 

가까운 관계의 부모님이나 아내와 남편 그리고 자녀와 지인들...

우린 그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향해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정목 비구니 스님. 나무 아래 앉아서-

▲ BTN불교TV 교양프로 '정목스님의 나무아래 앉아서'

나의 이름과 고향과 부모, 형제자매와 주소와 족보와 주민번호 등등. 이것들은 나가 아니고 임시로 ‘나’를 대신하고 있는 이름이나 관계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나’라는 말조차도 곧 이름인 언어문자일 뿐인데요. 그러면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아래 두 가지 영역을 공부해 보아야 한다네요. 이 공부는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니고, 덜어내는 도(진리) 공부이지요. 쌓는 지식 공부는 몰라도 아는 척하는 아상, 아만의 공부이라지요. 도, 진리 공부는 하심하여 ‘아는 모름’으로 덜어내는 공부가 된다지요. 그래서 논어에는 知之爲知之 不知 爲不知 是知也(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論語 爲政 17)라 하여 지식의 허상을 통찰했네요.

이 공부에는 하나는, 이법을 터득하는 공부 - 우주란 무엇인가? 다른 하나는, 심법을 깨닫는 공부 - 나는 누구인가? 이 두 물음은 나를 찾아가기 위한 질문이고 결국은 같은 질문이 된다지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 마음의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先理法 後心法). 이 두 공부를 하다보면 콩나물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빠져 나가고, 어느덧 콩나물이 자라나 있듯이, 그렇게 나의 정체가 드러난다고 하네요.

내가 누구인지, 우주란 무엇인지 완전히는 모르겠지만 그 질문을 왜 해야 되는가는 드러날 것으로 믿고 있지요. 그래서 이 공부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왔다가는 존재 이유 0순위 곧 인생의 마지막 공부라네요. 선각자들의 말씀이지요.

내가 나를 아는 것을 유교에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극기복례(克己復禮), 중용. 본 성품을 알아 양심을 회복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고요. 불교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을 ‘자성을 본다(見性)’라고 하여 견성성불, 해탈(解脫), 열반이라고도 하네요. 그래서 염불, 간경, 사경 수행을 하고, 특히 ‘이 뭣꼬?(是甚麽)’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話頭)를 명심하고 참선 간화선 수행을 한다지요. 도교에서는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는 말로 표현했네요. 기독교에서는 ‘내 안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되겠지요.

그리스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탁(神託)의 글이 있다지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사유와 철학의 주제로 삼았던 글귀라네요. 언어문자의 표현 방식과 수행의 길은 달라도, 모두 ‘자신의 본 마음 자리’에 이르는 것을 말하겠지요. 신, 하나님, 알라, 부처 등. 이 모두가 이름은 달라도 내 본 마음자리 하나를 가리킨다는 것이지요. 우주 삼라만상, 세상의 이치가 하나의 진리로 시작되어 그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이겠지요(萬法歸一 一歸何處?)

▲ 델피(델포이) 아폴론 신전. 사진 오른쪽 지하의 방이 델포이 신탁소다. 입구에는 두 개의 경구가 걸려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너 자신을 알라!”고, 다른 하나는 “어느 것도 지나치지 말라!”다. (사진출처 : 한겨레신문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26592.html)

어느 날 누군가 소크라테스에게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요?”라고 되물었다네요.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내 자신을 완전히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무엇인지’ 생각으로는 근접할 수 없는 곳을 인식의 경지로 이해는 하고 있다.”고 했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역학 공부는 나를 찾아가는 진리 공부이지요. 나를 알면 모든 궁금증과 두려움, 모든 사술(邪術) 등의 자장권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겠지요. 사람과 사물이 보이겠지요. 결국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겠지요. 이 상태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임제록-어느 곳에서든 그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된다면, 그 모든 곳이 참 되어질 것이다)’의 의미가 가슴을 울리겠지요. 그러면 남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네요.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사랑은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살게 해 주는 것이다!)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상학 주주통신원  saram5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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