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2015년 가을 봉오동을 찾았다. 아버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봉오동은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상향을 꿈꾸며 鳳梧洞(봉황과 오동나무의 동네)이라 이름 지은 곳, 물이 맑고 토질이 좋아 많은 조선인들이 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와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주민 중에는 함경북도 온성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진산 최씨들이 많았다. 최운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우리 집안 친척들도 함께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여느 한적한 시골마을과 다름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오랜 기간 중국이었던 곳이지만 한국의 어느 마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봉오동 마을 입구의 십자로는 연길, 도문, 훈춘으로 가는 길목이다. 마을을 지나 뒷산을 넘어가면 양 갈래로 나뉘어져 연해주와 북만주의 여러 지역으로 이어지는 곳, 봉오동은 경제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鳳梧洞을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연길 국자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연길을 떠나 부모님과 형제들, 모든 식솔들이 봉오동으로 이주하셨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면 가족을 부대와 떨어진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상례지만 증조할아버지 崔友三과 할아버지 형제들은 고조할머니 한씨 부인부터 어린 자녀들까지 4대의 대가족을 이끌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러 鳳梧洞봉오동에 들어오신 것이다.

▲ 최운산장군이 토성을 쌓은 마을이라 토성리라 불렸다. 방치되어 있던 토성리 표지석을 밭 가운데서 발견했다.

후 1920년의 봉오동전투까지 10년 간, 모든 가족이 함께 군대를 운영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많은 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여러 공장을 운영하는 재산가였다. 전통무술의 고단자요 뛰어난 총포술을 지니고 있던 최운산 장군은 1908년 중국 동삼성 보위단에서 군사훈련을 책임지는 간부가 되어 중국군을 도와주었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인들과 깊은 교류를 하셨던 최운산장군은 1912년 조선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중국군을 사직하고 1개 중대 이상의 군사를 사병으로 모집하여 하여 鳳梧洞으로 데려오셨다. 중국군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후 애국청년들이 계속 모여들어 봉오동 독립군의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르자 최운산 장군은 정식 군대로 편제를 구성했다. 1915년 뒷산 중턱을 개간하여 넓은 연병장을 만들고 독립군들이 머물 대규모 막사 3개동을 지었다. 또한 집 둘레에 3000평 규모의 거대한 토성을 쌓고 성채의 사방 구석에 4대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최운산 장군이 조성한 토성은 두께가 1m 넘었다. 짚을 섞은 황토를 쌓고 말이 커다란 연자 맷돌로 다진 위에 다시 흙을 켜켜이 얹는 방식으로 쌓은 토성은 웬만한 포탄에도 부서지지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봉오동전투 전적비에 총사령관이었던 대한북로독군부장 최진동장군을 부사령관, 연대장 홍범도 장군이 사령관이라고 새겨져있다. 명백한 오류다. 많은 답사팀은 이 현장에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시간이 가면서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간도 전역과 조선에서 넘어오는 우국청년들의 합류가 계속 되었고, 최운산장군의 사병조직이었던 도독부는 대규모 독립군 부대로 성장하게 된다. 도독부는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를 받아들인 최운산장군이 1919년 형제들과 함께 창설한 대한민국의 첫 군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의 모체다. 당시 도독부군은 중국군에서 데려온 병사들이 입고 있던 중국에서 입었던 군복을 그대로 착용하여 중국군과 비슷한 복장을 했고, 최운산장군이 러시아에서 구입해온 현대식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670명의 <大韓軍務都督府> 군사들은 잘 훈련된 정예 군인이었다. 최운산 장군은 형님인 최진동 장군을 사령관에 추대했다. 1919년 대한민국 창립한 상해 임시정부는 이미 무장력을 갖춘 만주의 무장독립군 세력을 앞세워 1920년을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다.

1920년 5월 만주의 대소 독립군부대가 모두 봉오동에 모여 통합부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군부)>를 창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와 군복, 식량을 대 재산가인 최운산 장군이 모두 책임진다는 약속이 있어 가능했다. 임시정부 노력과 최운산 장군의 헌신으로 수천 명 규모의 통합 독립군부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가 결성되었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전투 후 민간인의 피해를 우려한 <大韓軍務都督府>는 러시아군과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하여 밀산을 거쳐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우리 독립군들은 '자유시참변'을 당하는 등 무수한 고초를 격어야 했다. 그러나 최운산장군 3형제는 그 후로도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를 무대로 무장독립군을 유지하며 쉬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중국정부는 독립군부대가 상주하던 鳳梧洞 계곡의 물이 맑아 거기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봉오동을 잘 모르는 역사학자와 언론의 전언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大韓軍務都督府>와 통합 독립군부대 <大韓軍務都督府>의 본부가 있었던 지역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했다. 경신참변을 겪으며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최운산장군의 옛 집터가 있는 鳳梧洞 중촌의 마을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저수지 건설로 마을사람들도 모두 그곳을 떠났다.

▲ 봉오동을 찾는 대부분의 답사팀은 이 댐 위에서 물에 잠긴 봉오동전투 현장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다. 그러나 이 곳에서 10km정도 떨어진 봉오동전투의 현장은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다

봉오동전투가 벌어졌던 전투현장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鳳梧洞에 가도 이제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발길을 묶었다. 나에게 鳳梧洞은 청년시절의 아버지가 죽음을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곳이었다. 아버지가 겪은 離散이산의 아픔이 오랫동안 간직되어 있던 곳이었고 대지주였던 할아버지 최우산 장군의 가족들이 모두 고통을 겪으며 떠나야 했던 곳이었기에, 아버지의 고향 鳳梧洞은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지고 연변에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된 후에도 우리 가족 모두鳳梧洞에 꼭 가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없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시작하면서 鳳梧洞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해도, 할아버지의 자취를 찾지 못해도 괜찮다 생각했다. 2001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이 되었고,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부르시는 것 같았다.

▲ 봉오동 저수지 입구에서 우리 삼남내와 6촌 여동생(왼쪽)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신 鳳梧洞, 최운산 장군이 토성을 쌓아 마을 이름이 土城里가 되었다는 그곳에 가면, 들에서 농사일 하는 동네 노인을 보고 말에서 내려 인사하는 할아버지를, 귀한 음식을 들고 나가 동네 아이들의 개떡과 바꾸는 어린 아버지와 부모님 몰래 일본유학을 준비하느라 돈을 모으는 아버지의 학창시절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鳳梧洞에 가서 할아버지께 못 다한 인사를 드리고, 긴 세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사셨던 아버지의 외로움에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그런데 鳳梧洞에 가서 서로 존재를 모르던 고종 6촌, 고향을 지키며 살던 최진동장군 외손자를 만났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대지주의 후손이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났는데 일흔을 훌쩍 넘긴 그는 홀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다행히 최진동장군의 큰사위였던 6촌 오빠의 아버지는 지주가 아니었다. 막내아들은 대지주의 딸로 고통 받는 어머니 곁에서 엄혹했던 문화혁명의 시기를 지내야 했다. 공산당으로부터 핍박 받는 어머니를 보며 오랜 시간 독립투사 외할아버지 최진동장군을 거부하고 당에 충성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제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독립투사 최진동 장군의 존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 봉오동에서 만난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의 3형제의 손자들, 가운데가 집주인인 최진동장군의 외손자 김금철 부부

핏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연락도 준비도 없이 무작정 봉오동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초면의 6촌 형제들은 마치 오래 기다린 가족처럼 반갑게 서로를 확인하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기억하는 작은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을 만났다. 독립군부대의 본부였던 경신참변으로 소실된 중촌의 저택을 떠난 최운산 장군이 1945년까지 사셨던 집, 鳳梧洞 입구 마을 수남촌의 집터로 우리를 데려가 주었다. 6촌 올케언니는 자신이 시집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최운산장군이 마을 둘레에 쌓으셨던 토성과 돌담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던 집터에 서자 만감이 교차했다. 갑자기 어디에도 없던 고향을 찾은 느낌이었다. 1983년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한국에 살던 형님과 재회한 막내삼촌은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결정했다. 중국을 떠나던 1989년 마지막으로 고향을 찾았던 삼촌은 1989년까지도 축대 일부와 흙무더기 등 무너진 집터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새집이 들어섰고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무런 표식도 없이 6촌 형제들의 기억 속에만 그 집터가 남아있었다.

▲ 봉오동 수남촌 최운산장군의 집터 앞에서

그날 저녁에 연길에 살고 있는 80대의 고종 6촌 언니를 만나 최운산 장군의 집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커다란 홍송으로 지은 견고한 집, 동네에서 유일하게 마당에 펌프가 있던 집, 제일 큰집이었던 아버지의 집은 주인이 없는 세월을 견디며 오랜 기간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집은 마을의 구락부가 되었다가 유치원이 되었고 다시 마을회관으로 사용되다가 공동작업장이 되고 창고가 되었다가 80년대에 허물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탈출과 할아버지의 순국 이후 할머니가 평양에 다니러 간 사이 열두살과 여섯 살의 어린 고모와 삼촌은 마을의 한 폐가로 쫓겨났다. 입은 옷 그대로 맨손이었다. 마을에서 제일 큰 집에 살던 아이들이 마을에서 가장 허름한 집으로 쫓겨 간 것이다. 그리고 공산당 간부들이 집안에서 옷가지와 식량, 생활용품 등 할머니가 아끼던 살림살이 모두를 마당에 꺼내놓고 동네 사람들에게 하나씩 분배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코흘리개 어린아이였던 6촌 형제들은 70년 전의 그날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젠 우리의 기억에만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고향이었는데 마치 기적처럼 봉오동에서 할아버지를,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 '자유시참변' 보충 설명 : 봉오동과 청산리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민간인의 피해를 우려하여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동해 무력항쟁을 지속하기로 했다. 소련군의 지원 약속으로 4000여 명의 독립군들은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그러나 러시아내전이 종식되자 독립군의 이용가치가 없어진 소련군은 일본과 손을 잡았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 수천명은 소련군에 의해 갑자기 무장해제를 당했다. 독립군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거나 저항하다 사망하였다. 대규모 독립군 무장세력이 소련군에 의해 궤멸당한 역사적 비극을 '자유시참변'이라 한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