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보람은 봉오동 선산에서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단 한 순간도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걸어가신 최운산 장군의 삶에 대해, 연변의 도태였던 민족주의자 증조할아버지 崔友三에 대해, 마치 한 몸처럼 독립운동을 실천해 나간 할아버지 3형제가 이룬 일치의 가치에 대해, 고조할머니까지 4대가 함께 살았던 다양한 가족사까지 그리고 홀로 떠난 일본유학 생활, 죽음을 피해 고향을 떠난 역사적 굴곡과 평양에서 거제도까지 걸어야 했던 1.4후퇴 등 당신의 삶에 대해서도 전해주셨다.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평양방송국의 아나운서 출신답게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떤 옛날이야기보다 재미있었고 늘 흥미진진했다. 사실 우리 가족사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어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생생하고 살아있는 이야기의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일제시대, 6.25 등 매번 선택되는 주제와 소재가 달랐지만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담긴 역사적 진실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극적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구체적이었다. 실패담도 성공담도 있었다. 아버지는 굳이 무언가를 미화하려하거나 교훈을 담으려 의도하지 않으셨다. 다만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두 분에 대한 존경과 깊은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셨고 손자인 우리들이 할아버지의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셨다.

증조할아버지 崔友三은 조선 말기 연길에서 '道台'를 지내셨다. '도태'라는 직책이 생소해 물었을 때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도지사 같은 연변지역 관리라고 설명하셨다. 행정과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책임자다. 조선이 국권을 잃어가고 있는 19세기 말 중국 정부는 연변에 한족을 적극적으로 이주시키며 조선으로부터 간도를 완전히 빼앗으려는 정책을 폈다. 연변'道台'였던 최우삼은 중국의 간도정책에 맞서 간도지역이 엄연한 조선의 땅임을 밝히며 청나라 사람들을 연변지역에서 쫓아내고 청나라군과 무력으로 충돌했다. 당시 고토회복을 주창하며 일으킨 그 무력충돌을 '道台의 亂'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최우삼의 ‘도태의 난’은 청나라 군에 진압당하고 만다.

전통무술의 고수인 한 무술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崔友三은 명록과 명길 어린 두 아들만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몸을 피했다. 그러자 청나라 군이 최우삼과 아들들의 목숨을 놓고 방을 붙이고, 최우삼의 모친인 한씨 부인을 잡아갔다. 그런데 청나라 군에 붙잡힌 고조할머니 한씨 부인은 조금도 의기를 굽히지 않고 간도가 조선의 땅이며, 당신의 아들이 조선의 땅을 찾는 일의 마땅함을 밝히며 곧은 자세로 호통을 치셨다. 그러자 한씨 부인의 기개에 감탄한 청나라 관헌들도 예를 갖춰 고조할머니를 대하였다고 한다.

 

▲ 처음 흑송을 발견했을 때 증조부 최운삼의 묘소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두만강을 건너 몸을 피했던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은 고조할머니 한씨 부인의 투옥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연변으로 돌아와 자수를 했다. 그후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보석금으로 세 항아리 가득 보물(은자였을 것이다)을 갖다 바치고 최우삼을 구해냈다. 이후 땅과 재산을 모두 잃고 살림이 곤궁해졌고, 명록(진동)과 명길(운산,문무) 두 아들은 어린나이에 남의 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어린 시절의 고생이 나중에 크게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데 기여를 한 것이라 짐작한다.

아버지는 지금은 우리나라의 영토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지만 원래 우리 영토는 훨씬 더 넓었다고 강조하셨다. 중국이 힘이 세지고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재의 지도보다 훨씬 광활했다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에 대한 설명과 국토와 연결된 역사문제, 민족자치의 문제 등 역사적 문제에 대해 자주 말씀해주셨다. 증조부 최우삼의 '道台의 亂'은 조선 후기에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천명한 조선인의 결의에 찬 군사행동이었다. 최운산장군 형제들의 독립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들의 부친인 증조부 최우삼이 결단한 '道台의 亂'도 그에 못지않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살아있는 역사책이었다. 학교 공부 중 어떤 역사에 관해 질문을 하면 아버지는 그 내용과 배경, 역사적 의미까지 두루 설명해주셨다. 고대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정사와 야사를 넘나드는 아버지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설명은 언제나 역사를 과거가 아닌 오늘로 불러와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어 했고 사학과 진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고3 여름방학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려워진 가정형편과 주부가 되어야 했던 큰딸이라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 주변의 가지를 쳐내고 쌓인 풀들을 걷어내니 산소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렀다. 일흔을 훌쩍 넘긴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꼭 찾고 싶어 하셨다. 고향 봉오동의 선산에 묻힌 채 공산치하의 후손들에게 외면당했을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의 존재를 알려주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년의 아버지는 건강이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의 절박한 심정에도 당시 우리 5남매는 각자의 일에 매여 아무도 아버지의 고향 방문을 동반하지 못했다. 우리 형제들이 가장 후회하고 있는 일이다.

십칠 년 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아버지는 시간 여유가 있는 큰며느리만을 동반하고 봉오동을 찾았고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던 조카를 만나셨다. 그들의 부축으로 힘들게 산에 오른 아버지는 고생 끝에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냈고 내년에 돌아와 비석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남기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고향 봉오동을 다시 찾지 못하셨다. 귀국 후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2년 정도 투석치료를 하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 오남매도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지냈다.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증조부 최우삼 묘.

증조부 최우삼의 산소는 다시 홀로 남았고 17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2015년에 봉오동에 가서 만난 고종 6촌오빠 부부는 증조할아버지 산소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찾으신 이후 17년 동안 가보진 않았지만 그 자리를 확인해줄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그 집의 마당에 서서 저기 산중턱에 보이는 흑송이 있는 곳이라고 손짓을 할 때도 묘를 찾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저수지 옆으로 길을 내며 올라가보니 세 그루의 흑송이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틀 후 아침 일찍 봉오동을 다시 찾았다. 6촌오빠 부부와 우리 3남매, 그리고 연변대 김태국 교수가 함께 산을 올랐다. 길이 없는 산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젊은 우리도 힘이 드는데 걸음걸이도 불편하신 아버지가 죽을힘을 다해 이 길을 오르셨구나 하는 생각에 산을 오르는 내내 가슴이 아려왔다. 흑송은 확실한 표식이었다. 우리는 오래 헤매지 않고 흑송 세 그루를 발견했고 덤불에 가려진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묘를 덮고 있던 낙엽을 걷어내고 주변의 가지를 쳐내자 봉분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묘보다 두 배 정도 큰 규모의 봉분이었다. 6촌 올케언니는 묘가 자라기도 한다더니 17년 전보다 산소가 더 커진 것 같다고 신기해했다.

▲ 봉오동을 지키고 살았던 6촌 김금철 최옥철 부부와 우리 삼남매

높지 않은 산중턱,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골짜기의 명당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자리였다. 후손들이 모두 떠나고 오랜 세월 방치되어 있던 묘가 전혀 훼손이 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감동과 회한이 밀려왔다. 늘 마음으로만 인사를 드렸던 증조할아버지 崔友三, 대한민국의 독립을 과업으로 삼은 아들들의 삶을 격려하고 손자인 아버지의 인생에 빛이 되어주신 분, 그리고 증손자인 우리의 가슴에 영웅으로 남아 등대가 되어주셨던 증조할아버지께 첫인사를 드렸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아버지가 하고 싶으셨을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마음으로 절을 하면서 당신께서 사랑하셨던 손자 봉우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고 증손인 우리도 그렇게 기르셨다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가르쳐주신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이렇게 고향으로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가슴으로 인사를 드려야 했다.

오랜 세월에도 손상되지 않았던 봉분은 증조할아버지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마음 같았다.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은 고향을 떠나 역사의 격변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후손들에게 ‘괜찮다, 이제 곧 나아질 거다, 괜찮다’ 하시며 봉오동의 선산, 당신이 누우신 그 자리에서 그렇게 기다리고 계셨다.

 

 편집 : 김미경 객원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