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여정, 아버지의 귀향

위로 누나만 넷, 다섯째였으나 딸 부잣집의 귀한 장남이었던 아버지 최봉우는 최운산장군의 수려한 용모를 물려받은, 요즘말로 엄친아의 전형이었다. 최운산장군의 큰아들이 태어나던 날 봉오동 초모정자산에 환한 서기가 감돌았다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전해질 만큼 아버지는 그 마을의 신화적 인물이었다. 얼굴뿐 아니라 결단력까지 부친을 닮았던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부모 몰래 일본유학을 감행했다. 봉오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할아버지가 일본행을 허락하지 않자 용돈을 모아 무작정 떠났고, 동경에서 보내온 소식을 전한 아들의 뜻을 꺾지 못한 최운산 장군의 지원으로 아버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일본에서 다니셨다.

최운산장군의 삶에서 용기를 배운 탓인지, 10대 초반에 만주에서 일본으로 홀로 유학길을 떠날 만큼 담대함을 지녔던 아버지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고, 일본학생들과 정면으로 겨루는 강단이 있었다. 물론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 있어 고생스럽지 않았고,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교우관계가 원만한 아버지는 대체로 편안한 유학생활을 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조선학생이 혼자 타국에서 유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조센징이라고 놀리던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을 닮은 형형한 눈빛의 아버지는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학기 초가 되면 소년 최봉우는 제일 강한 급우와 겨루는 것으로 승부를 걸었다.

▲ 와세다대학교 유학생 시절의 아버지

내가 일본아이들을 어떻게 제압하고 관계를 맺었는지 여쭸을 때 “싸울 때는 힘이나 싸움기술이 부족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상대가 이길 수 없단다. 만약 그 싸움에서 진다면 나는 어차피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사생결단을 하고 싸운 거야.”하고 대답하셨다. 덩치 큰 일본 아이들도 최봉우를 이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싸움에서 한 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보다 센 조선인 친구를 “사이상(최씨)”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하고 ‘밀양아리랑’을 흥얼거리셨던 아버지는 노래를 참 잘 부르셨다. 타고난 미성과 풍부한 성량으로 일본에서 성악콩쿨에서 입상도 하셨다. 대학진학 때 성악과를 가라는 하숙집 주인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와 함께 머물던 사촌형 국빈 당숙(최진동 장군의 셋째아들)이 “우리 집안에 딴따라는 없다. 내가 작은아버지한테 알려서 유학자금을 끊게 하겠다.”며 협박하다시피 만류하여 결국 정외과로 진학하고 말았다. 성악가의 길을 포기한 것에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아버지는 가끔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사실 나도 노래를 좋아하고 음악가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오래도록 갖고 있기에 아버지의 그 심정에 깊이 공감하곤 했다.

얼굴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최운산 장군과 닮았던 아버지와 통화할 때는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어야 했다. 내가 “아버지,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프니 조금 작게 말씀해주세요.” 라고 말하면 아버지는 “허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희 할아버지가 마을 뒷산에서 독립군들을 훈련을 시킬 때면 구령소리에 산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렸고 산 아래 집안에서도 최운산 장군의 호령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단다.”하고 답하며 웃곤 하셨다.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성량이 부족한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제대로 닮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형제들 중 내가 외모도 성격도 아버지와 제일 많이 닮았다. 그리고 큰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특별했다.

2차 대전 막바지, 일본 유학생들은 모두 학도병 징집의 대상이었다. 와세다 대학 3학년을 마친 아버지는 더 이상 징집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졸업을 포기하고 만주 봉오동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만주의 삼림지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을 지휘하는 최운산 장군의 큰아들이 일본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정혼자인 차연순과 혼인을 시켰다. 아버지 나이 스물넷, 유학 때문에 미뤄진,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당시 연변은 이미 공산당이 세력을 주도하고 있었다. 지주의 큰아들, 일본유학생 출신의 인텔리였던 젊은이에게 만주는 결코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다. 학병을 거부하고 돌아간 고향에서 따뜻한 신혼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아버지는 결혼 1주일 만에 간첩이란 누명으로 끌려갔다

▲ 와세다대학교 재학생 단체 사진, 앞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아버지 최봉우

당시 간첩은 때려서 죽이는 게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매질이 가해졌다. 아버지를 때리던 간수들은 아침이면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로 툭툭 차며 죽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거의 두 달 간의 매질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간수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돌았다. 봉오동 출신들이 아버지가 태어나던 날 봉오동산 꼭대기에 서기가 돌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해 냈다. 초모정자산의 정기를 받은 사람을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 해가 돌아올지 모른다며 겁을 먹은 간수들이 자기가 당번일 때는 죽이지 않으려고 매질의 강도가 약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아버지는 어차피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치사량의 아편을 요청했다. 아들의 선택을 시대적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고문의 고통이라도 덜어주려고 한 것인지 할머니는 아편을 차입시켰다.

죽을 생각으로 치사량의 아편을 섭취한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자 간수들은 집에 가서 죽게 하려고 며칠의 말미를 주어 최봉우를 감옥에서 내보냈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최운산 장군은 아들을 두만강 건너로 몰래 피신시켰다. 봉학 삼촌과 새댁인 어머니가 아버지를 업고 강을 건너 움막에 아버지를 숨겼다. 그런데 정말 초모정자산의 정기를 받은 탓이었을까 두만강변의 허름한 움막에 숨어있던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아편이 오히려 치료효과가 있어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빠르게 치유되었고 다시 정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마다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아편처럼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되는 게 약리의 기본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시곤 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젊을 때라 회복이 빨랐던 것도 있었겠지만 우리 집안이 체질적으로 회복력이 좋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도 감옥에 갇힐 때마다 고문을 당해 매번 수레에 실려 나오셨지만 오래지 않아 털고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변장하고 다시 무장투쟁에 뛰어드셨다는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은 1924년~1926년 3년간 투옥 당하신 것을 시작으로 모두 여섯 차례 감옥살이를 하셨다. 그러나 일생에 걸친 투옥과 고문에도 최운산장군의 독립운동 의지는 꺾이지도 겁먹지도 않으셨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움막에 숨어 지내며 고문의 장독을 회복한 아버지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평양으로 피신했다. 당시 평양에는 인민군 대좌인 손위 처남 차홍균과 셋째고모 옥순이 살고 있었다. 유학시절 친구이며 공산당 간부인 심종운과 결혼한 옥순고모와 큰외삼촌은 아버지의 평양 정착을 도왔다. 건강을 회복한 아버지는 평양에서  처남과 친구의 보증으로 평양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을 하고 새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살아나 봉오동을 탈출한 아버지 최봉우에게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아무도 살아나리라 예상하지 못한 극한의 상황에서 벗어난 최운산 장군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최봉우가 조선에 가서 복수를 위해 백골단을 조직해 군사들을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고문했던 사람들 주변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였겠지만 마치 누가 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최봉우가 어깨에 금빛 견장을 단 백색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구체적인 묘사까지, 소문은 실체를 지니고 퍼져나갔다.아무도 감옥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극한의 상황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이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부모도 없는 어린 삼촌과 고모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망을 쳤다. 지주 집안의 자식이라는 것에 더하여 도망자인 최봉우의 동생이라는 것이 자신들에게 해를 미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계급투쟁이 일상화 되면서 지주의 자식이라는 멍에는 봉오동에 남겨진 고모들과 어린 막내삼촌의 삶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1960년대 문화혁명기를 지나며 겪어야 했던 극심한 핍박에 고모들과 막내삼촌은 몰래 봉오동을 떠나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출신 성분을 숨기고 조용히 숨어 지내야 했다.

▲ 아버지가 탈출한 후 봉오동을 떠나 살아야 했던 형제들, 둘째고모 영옥과 아들, 그리고 막내 고모 계순과 막내 삼촌 호석

그런데 아들이 떠난 후 최운산 장군이 다시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당하셨다. 매를 맞아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러서 집으로 내보내주었다고 한다. 최운산 장군도 지체하지 않고 봉오동을 떠나 아들 봉우가 있는 평양으로 몸을 숨겼다. 고문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해 평양에 정착하게 된 아들을 살피러 오신 게 아니라 자신마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 풀려나자마자 아들집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며칠 후 돌아가셨다.

50대 중반이던 1939년 말에 10개월간 감옥에서 보내고도 견뎌내셨는데 60세에 당한 모진 고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셨다. 뛰어난 무술인 이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최운산 장군은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일생동안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의롭게 살고자 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고, 곧 해방이 될 것이다. 너희 형제들이 지금은 모두 고초를 겪고 있지만 내 자식들이 크게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너무 염려 말라.“는 유언을 아들 봉우에게 남기셨다.

간도에서 신한촌을 건설하고 동포들과 함께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셨던 최운산 장군, 그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온 일생을 투신했던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영웅 최운산 장군은 조국의 광복을 한 달 앞둔 1945년 7월 5일 평양에서 순국하셨다. 

비록 타향이었지만 부친의 임종을 곁에서 지킬 수 있었고, 유훈을 들을 수 있었으니 큰아들인 아버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곧 해방이 될 것을 기대한 아버지는 평양비행장 근처 야산에 최운산 장군을 임시로 모셨다. 정세가 좋아지면 곧 봉오동의 선산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의 묘소 아래로 모셔가야 하니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화가 심화되면서 아버지의 귀향은 더 어려워졌다.

1.4후퇴 때 평양을 떠나기로 결정한 아버지는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묘소에 당신이 잘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해두었다.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나면서도 전쟁이 끝나면 곧 돌아와 봉오동의 선산 증조할아버지 최우삼의 묘소 아래로 모셔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8선으로 갈라져버린 나라의 운명은 평생을 통일만 기다리던 아버지의 평양행을 끝내 막아섰고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지금도 홀로 평양에 누워 계신다.

아버지는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셨다. 편안한 말솜씨와 미성의 소유자인 아버지에게 아나운서란 직업이 잘 어울렸을 것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아버지에게 평양에서의 생활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정치 상황은 고지식한 성품의 아버지가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더구나 신분을 숨기고 취직을 했지만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고민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던 아버지는 그때 처음 담배를 배우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고, 아버지는 평양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또 한 번의 결단을 하셨다.

▲ 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실 아버지는 피난을 떠나려고 마음먹을 때 처음부터 평양에서 태어난 어린 큰아들과 아들집에 다니러 오셨던 할머니까지 함께 피난길에 오를 생각은 아니었다. 아내에게 전쟁이 끝나면 곧 데리러올 테니 할머니와 아기와 함께 평양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하셨다. 그러나 엄마는 이 전쟁 통에 헤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아버지 혼자 떠나는 것에 반대하셨고 혹시 아버지가 몰래 떠날까봐 졸졸 따라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네 식구가 함께 길을 떠났고 할머니와 두 살 아기였던 큰오빠,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며 평양에서 거제도까지의 먼 피난길을 오롯이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도중에 길을 막아서는 군인들과 담판을 지으며 길을 열기도 했고, 다리를 건너자마자 등 뒤에서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지는 일도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네 식구는 무사히 거제도 피난민수용소에 도착했다. 젊은 아버지는 거제도에 머물다 부산에 정착해 아들과 딸을 둘씩 더 낳아 모두 다섯 남매를 두셨다.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운수업으로 성공해 경제적 여유도 생겼다. 정치에도 참여하셨다. 오랫동안 우리 집은 최동지를 찾는 옛 민주당원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아버지 회사의 지역사업권을 빼앗아갔고 부도가 났다. 이후 다른 사업에도 계속 실패해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며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길었다. 그러나 비록 경제적 여유는 없었지만 다섯 아이들과 할머니도 살아계셨고, 평범한 가정의 행복을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막 고3이 된 1975년 3월, 86세의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다섯 달 만에 마흔아홉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지혜롭고 어진, 그리고 생활력이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동지였고, 위로요 의지였다. 당시 대학 졸업반인 큰오빠, 군대에 간 작은오빠, 고3인 나와 고1인 남동생, 초등학교 5학년의 막내까지 모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였다. 우리 5남매는 각자의 아픔을 넘어 서로 도우며 어머니의 부재를 메우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를 한 해에 떠나보내야 했던 쉰셋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1977년에야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이 되셨다. 1961년에 시작했던 서훈신청이 오랜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았으나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어머니도 아내도 곁에 없었다.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된 막내가 언제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나셨는지 여쭸을 때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해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고 답하셨단다. 우리 다섯 남매는 홀로된 아버지의 외로움을 살피며 각자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내려고 노력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다섯 자식들이 자라면서 인생의 각 단계를 지날 때마다 아버지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무게와 시간들이 너무 깊고 길었나보다. 아버지는 그렇게 오래도록 외로우셨다.

▲ 부모님과 우리 5남매

1992년에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졌다. 봉오동이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 되었을 때는 이미 노인이 된 아버지를 가로막는 핑계가 너무 많았다. 건강도 경제력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7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던 아버지는 죽기 전에 고향땅을 밟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봉오동을 찾으셨다. 각자 직장생활에서 자리 잡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자식들이 아무도 동행하지 못했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귀향길이었다. 연변여행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고 신부전증으로 2년여 투석치료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때의 귀향길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분이 손잡고 봉오동의 마을길을 걸으며 나누셨을 옛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둘째 오빠와 나, 막내여동생이 동행했던 삼남매 고향방문단은 연변에 머물던 기간 내내 아버지 생각에 마음으로 울고 웃으며 각자 아버지의 마음이 되었고 아버지의 눈으로 고향마을을 보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연길, 도문, 왕청, 석현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봉오동 할아버지의 집터에 서서 명절날 부모님의 고향집을 찾은 손자들의 설렘도 생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동네를 둘러보다 토성리라 적힌 옛 비석을 발견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뛰어다니셨을 마을 길을 걸으며 아버지와 대화할 수 있었다. 정말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한 연변여행, 아버지의 귀향이었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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