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방문 후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형제들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막내여동생과 함께 독립기념관, 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비롯해 만주독립운동에 관한 자료가 보관 되어있는 곳은 모두 살펴보고 있다. 증조부 崔友三이 함경북도 온성에서 이주했던 조선 말기 간도의 역사, 한일합방부터 해방까지의 무장독립전쟁, 당시 연변의 경제와 사회상, 자연과 지리 등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가능한 모두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서 대규모 승전으로 기록하고 있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역사가 학술적으로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굶주림 속에서 만주벌판을 헤매던 독립군이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했다는 승전의 감동만이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독립군들이 어떻게 무장한 대규모 일본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고, 포수 출신 의병대장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한 총솜씨만이 신화가 되어 남아 있었다.

화승총을 지니거나 무기도 없이 봉오동에 왔던 의병 출신의 포수들이 어떻게 신식 무기를 지니게 되었는지, 몇 십 명에 불과했던 의병 출신의 빨치산부대가 봉오동에서 갑자기 몇 백 명의 독립군으로 불어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전체 독립운동 기간의 대부분을 함경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했고, 봉오동에 단 몇 달밖에 머무르지 않았던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전투를 총지휘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여러 편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료가 뒷받침되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병참기지 건설과 독립군의 훈련과 양성, 다양한 작전을 통한 전쟁준비 과정 등을 외면한 너무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결론으로 치밀하지 못한 분석이다.

독립군부대가 편성되려면 부대의 주둔지, 병력, 식량, 무기 등의 운영이 필수 요소다. 한 사람의 독립군을 양성하려면 10가구의 뼈를 깎는 희생이 필요했다는데 만주에서 몇 천 명 규모의 독립군부대 운영이 어떻게 가능했을 지를 분석한 연구는 전무하다. 만주지역 독립군의 숫자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지만 아직도 그 규모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미 공고해진 만주 무장독립운동사의 오류에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의 역사는 완전히 묻혀있다.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서있는 것 같다.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 가늠도 할 수 없는 벽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가족사를 통해 전해진 역사적 진실이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 남아있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온 일생을 헌신하신 최운산 장군의 삶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서훈신청서에 최운산의 독립운동 활동기간은 1945년 7월 4일까지라고 기록했다. 1945년 7월 5일 순국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운산 장군의 일생은 온전히 조국의 독립을 위한 삶이었다는 뜻이다.

최운산장군은 모든 재산을 독립군부대의 창설과 운영에 쓰신 것을 넘어 '자유시 참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공동체 건설의 의지를 꺽지 않으셨다. 계속되는 전투와 이동 중에도 곳곳에 무장독립군부대와 군사학교를 재건하고, 여러 번의 투옥과 고문에도 단 한 순간도 흔들림 없이 한길을 가셨다. 손녀인 내가 지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북간도의 독립운동사를 새로 써야 하는 거대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서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 196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

아직 직계 후손들이 살아있다. 최운산장군의 동반자로, 여성 독립운동가로, 남편의 모든 삶을 손자들에게 전해준 할머니 김성녀 여사가 길러낸 우리 5남매가 있다. 그리고 85세의 막내고모와 78세의 막내삼촌이 계신다. 아직 정정하신 그분들의 기억에서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연길에, 봉오동에 도문에, 석현에, 왕청에 살고 있는 6촌 형제들과 함께 후손들만이 할 수 있는 몫을 찾아내고 봉오동의 역사를 다시 찾을 것이다.

부족하나마 역사적 자료도 나타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65년에 발간한 『한국독립사』는

“군무도독부는 3.1독립선언 후 일어난 단체로서 본부를 왕청현 석현에 두고 최진동(일명 명록) 삼형제가 주동이 되어 활동한 단체이다. 독립군 오백여명 장총 오백여정을 갖고 있었으며 군복은 중국군인 복색과 같은 회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중국군인과 구별하기 곤란하였다....” 고 할아버지 3형제의 역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1975년에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기록한 『무장독립운동사』는 봉오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 지(之)자형으로 장장 2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써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져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있어서 며칠 만에 한 번씩 중국 관헌이 순라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 (중략)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부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 3형제의 공적을 밝히며 최운산 장군에 대해서도 “독립군을 편성할 때에 사령부를 봉오동에 설치하기 위하여 기성 촌락을 군사촌으로 개발한 것은 주로 최진동 동생되는 최운산과 최치흥 형제의 노력의 결과이다.” 라고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형제들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도서관에서 그늘에 묻혀있던 최운산 장군의 삶의 편린을 다시 발견하고 있다.

▲ 1975년 발행한 무장독립운동사(이강훈)

“일찌기 정착하여 생활기반을 굳혀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전쟁의 장비며 군량 등을 보급하여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과 최치흥 등 3형제의 업적은 봉오동전투 등을 비롯하여 당시(경신년)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중략)

"군무도독부는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형제가 왕청현 봉오동을 근거지로 하고 풍부한 경제력을 선용하여, 거의 개인적 힘으로 양성한 수백명의 사병을 기간으로 일개 전투 군단을 편성하였으며, 최진동 사령관과 그의 동생들의 참모와 경제적 뒷받침으로 전투 태세를 완비하고....봉오동전투에서 흉적 일본군에게 대 타격을 줌으로써 독립전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긴 기관으로 되었다.”

이렇게 6,70년대의 기록이 있었음에도 80년대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는 특정인을 영웅으로 그리는 작업에 치중했고 역사가 굴절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역사가들의 재평가를 통해 최운산 장군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그 시작에 서서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이 기록이 역사가 되고 미래로 이어져 최운산장군의 삶을 통해 후손들이 느꼈던 감사와 위로가 우리 세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참고 사항 : '자유시 참변'은 '[연재]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 3. 봉오동에 가다' 에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글 주소 :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05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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