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한겨레신문 주주이며 '문화공간:온'의 월요영상팀인 최운산장군의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자 주]

 

만주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을 만나 일제문서 등 사료를 전해주며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의 주역 최진동 장군3형제가 마치 한 사람처럼 알려져 있어 둘째인 최운산 장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반가워했다. 그들은 그동안 봉오동·청산리전투에 대한 연구에서 봉오동전투가 가능할 수 있었던 주변상황, 근거나 배경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음을 자인했다.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결과만으로 처절했던 독립전쟁이 단순화되었고, 몇 사람의 영웅담으로 간도의 무장독립운동사가 채워져 있다고 연구자로서 미안한 일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역사학자들은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최운산 장군을 역사에서 다시 살리는 일을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가능하다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활동하라고, 구체적인 제안까지 했다. 공적인 활동이 가능한 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최운산 장군의 삶이 역사적으로 다시 정리된다면 봉오동·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만주 항일 무장독립전쟁사 전체가 재조명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하기도 했다. 본인들도 가능한 함께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일, 철이 들고 할아버지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으며 언젠가 이루리라 마음으로 깊이 다짐한 일이었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념사업회를 만드는 일은 또 다른 설렘이었다. 먼저 형제들과 누구를 발기인으로 모시는 것이 좋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의논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기념사업회는 가족이 아닌 분들이 마음을 모아 추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분이니 일단 후손들이 마중물이 되어야 했다. 발기인을 모으며 단체명을 고심했다. 최씨3형제기념사업회, 봉오동3형제기념사업회, 최진동최운산최치흥기념사업회 등등 최운산장군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활동한 것을 기념하는 단체명을 만들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총사령관이었던 맏형 ‘최진동장군기념사업회’로 하고 진동, 운산, 치흥 3형제의 활동을 함께 정리하기로 했다. 먼저 오래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살고 있는 6촌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최진동 장군의 셋째아들 국빈의 큰딸이다. 사실 할아버지 3형제는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최진동은 8남매, 최운산은 7남매, 최치흥도 6남매를 두셨다. 그런데 자식세대보다 우리 세대인 손자들의 숫자가 적다. 어쩌면 할아버지들이 사셨던 일제시대보다 아버지 세대가 겪은 6.25가 후손들의 생존에 더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을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우리 근현대사가 지닌 시대적 아픔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진동 장군의 아들 중 둘째 국량과 셋째 국빈, 그리고 후처 소생의 3남매는 해반 무렵 서울로 내려왔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의 자식들은 우리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여변에 남았다. 최치흥과 최명철의 자식들도 모두 연변에 그대로 남았다. 의열단 활동으로 잡혀있다 대전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던 최진동의 셋째 아들 국빈당숙의 두 딸이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 우등불이라는 소설로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왜곡했던 이범석씨와 갈등을 빚던 국민당숙은 술로 분노를 달래다 일찍 돌아가셨다. 그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당숙모와 6촌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삶의 터를 옮겼었다. 6촌 언니는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다시 찾는 일을 시작하자는 우리의 제안에 반가워했다. 오래 전 하와이에 살던 막내당숙과 당고모가 최진동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추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우리나라 최초로 시민의 조직된 힘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하여 만든 시민단체다. 나는 30여 년 전 경실련에 참여한 이래로 언론인권센터,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언론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시민사회 인사들이 기념사업회 발기인으로 대거 참여해주셨다. 많은 분들이 기꺼이, 기쁘게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무장독립전쟁이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유감을 표했다. 그리고 왜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냐고, 시민운동도 필요하지만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더 중요하니 이제라도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주었다. 역사의 무게는 후손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게 했다.

간간히 자료를 찾아보면서, 만주무장독립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던 우리 형제들은 주변의 반응에 몹시 부끄러웠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그 시대에 당신이 해야 할 일로 무장독립투쟁을 선택하셨고, 나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NGO 활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일부러 숨기진 않았지만 최운산 장군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왠지 집안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아 쑥스러웠다. 후손들의 주장이 아니라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찾아 밝혀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고지식과 안일함이 최운산 장군의 삶을 우리 역사에서 지우는 일에 일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반성과 자책이 들었다. 시민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후손이 해야 할 책임을 외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자각은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 기념사업회 설립의 당위성을 토론하는 역사학자들

최운산장군은 나의 온 일생을 관통하는 힘과 위로였다. 민족적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손녀라는 자부심은 현대사의 질곡을 걷는 시민운동가의 길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했고 힘들고 지칠 때도 무릎 꿇지 않게 했다. 그러나 직계 후손인 내가 그분 삶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얼마나 이해하고 내 것으로 했을까! 가족사를 통한 단편적인 기억을 넘어 만주를, 동아시아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깨닫는다. 중국과 러시아, 조선의 삼국관계를 알지 못하면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고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은 어쩌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가면서 만주지역 동포들과 함께 신한촌을 건설했고, 공동체적 삶을 나누었고, 그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이라는 가치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고자 조선과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며 헌신했던 최운산 장군, 이제라도 그 삶속으로 들어가 간도의 근현대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상주의자 최운산崔雲山, 당대 재벌기업가 최만익崔萬益, 전쟁영웅 최문무崔文武, 모두 한 사람이다. 100년 전, 그 암울했던 민족의 시간 그의 일생을 통한 선택과 결단이 질곡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바꾸는 지렛대가 되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여러 동지들이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을 기억하며 역사적 진실을 넘어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지닌 새로운 힘과 우리 사회에 내재된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공동체의 미래를 파괴하는 정책에 부끄럼 없는 정치인이 늘어나고, 공권력이 최소한의 시민적 삶을 지켜주지 못하는 시대, 인간의 상식보다 눈 먼 자본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 시대에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삶이, 그가 지녔던 진정성이 신자유주의적 일상에 지친 우리 세대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모색하는 여러 전문가들을 만나 기념사업회 설립을 구체화하던 중 미국 6촌 언니의 생각이 바뀌었다.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기념사업은 직계 손녀인 본인이 2년 후 한국에 나와서 직접 하겠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더 이상 막연하게 뒤로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셋째 할아버지는 아직 유공자로 서훈 받지 못해 이름을 병기할 수 없었다. 학자들과 우리 형제들은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셨던 최운산 장군 3형제의 삶을 기리고 만주독립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로 먼저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검토를 시작했다. 준비위원장을 맡아주신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님은 존경 받는 시민사회의 원로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을 지낸 분이다. 20여 년 전 경실련에서 상임집행위원장과 상집위원으로 만난 인연으로 기념사업회에 참여해주셨다. 첫 회의는 ‘최운산 장군’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현양사업을 할 만한 인물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문제제기로 시작되었다. 봉오동전투와 최진동 3형제란 표현에 갇힌 채 100년의 세월이 흘러 현재는 구체적 설명이 부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문제제기였지만 마음 한편에서 무언가 억울함 같은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 다지며 시작하자는 제안은 정말 감사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조차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름 ‘최운산 장군’, 준비위원들은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회 출범의 역사적 당위성과 방향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최운산 장군 3형제가 홍범도 김좌진 두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장본인들이라는 것은 학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독립전쟁에 투신한 3형제 중 최진동 장군만 외부에 알려져 있고, 실제적인 역할을 한 최운산 장군의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이러한 역사적 상이성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최운산 장군의 활동과 행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은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전투 결과만 부각하는 투쟁사의 맥락에 갇혀있던 우리나라 항일무장독립운동사가 새롭게 정리되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중국 연변지역 동포들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기억이나 평가는 국내의 일반적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왜곡된 것이 많았고,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실제로 왜곡된 부분들이 있으니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그들은 최운산 장군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당시 간도의 사회상에 좀 더 접근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아직 역사학계에서 정리되지 못한 북로군정서와 사관연성소의 창설비용 등에 대한 연구도 포함한다면 1920년대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조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조차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름 ‘최운산 장군’, 준비위원들은 그를 기리는 기념사업회 출범의 역사적 당위성과 방향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최운산 장군 3형제가 홍범도 김좌진 두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장본인들이라는 것은 학자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독립전쟁에 투신한 3형제 중 최진동 장군만 외부에 알려져 있고, 실제적인 역할을 한 최운산 장군의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낮으니 이러한 역사적 상이성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최운산 장군의 활동과 행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은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의미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전투 결과만 부각하는 투쟁사의 맥락에 갇혀있던 우리나라 항일무장독립운동사가 새롭게 정리되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발걸음이 시작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최운산 장군이 역사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오실 때가 된 것이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그 역사적 자산을 사회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발기인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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