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가 집이었다.

1983년에 방송한 KBS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연변에 살고 있던 고모들과 막내삼촌을 만났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었지만 “중공에서 찾습니다”란 코너가 있었다. 그 방송에서 아버지의 최봉우를 찾는 형제들을 확인한 것이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이산가족 신청을 포기했었다. 피난 내려와 최치영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던 아버지는 공산 치하에서 출신 성분을 숨기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북한과 중국의 형제들이 당신으로 인해 지주의 가족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더 큰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음을 더 걱정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형제들이 먼저 방송을 통해 혹시 남한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최봉우를 찾아주었다. 그야말로 감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이후 막내고모와 막내삼촌은 연변의 생활을 정리하고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해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청옥 큰고모는 우리 가족사의 보불창고였다. 아버지 형제들의 영민함에 대한 에피소드는 어려서부터 많이 듣고 있었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처음 만난 막내 동생 호석삼촌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놓치지 않았고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성이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최운산 장군과 달리 형님인 최진동 장군은 여성에 대한 교육관이 달랐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지론으로 자신의 딸들은 물론 조카들의 공부도 막았다. 첫째 청옥과 둘째 영옥고모가 소학교를 다닐 때 큰아버지 최진동 장군이 두 조카의 학업을 중단시켰단다. 학교에 다닐 때 늘 1등만 했다는 청옥, 영옥 두 고모는 큰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제재로 소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자신이 세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여자들이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형님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운산 장군이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두 딸이 어릴 때는 젊었을 때라 형님의 생각을 그대로 따랐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성교육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셨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읽히고 배움의 즐거움을 알아가던 어린 청옥, 영옥 두 고모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당시의 시대상이었지만, 호기심 많고 공부를 좋아하는 집안 식구들의 성향을 후손인 나도 아는지라 어린 고모들의 실망과 안타까움이 시공을 초월하여 내게로 다가왔다. 후일 셋째 옥순이 공부하러 부모님 몰래 서울로 떠난 일도 공부 욕심이 많은 옥순고모가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멀리 도망 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언니들이 동생이 도망가서 공부하도록 도와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옥순고모가 방학에 돌아왔을 때 함께 찍은 사진, 최봉우의 동생인 게 알려질 까 무서워 아버지의 사진을 잘라냈다.
옥순고모가 방학에 돌아왔을 때 함께 찍은 사진, 최봉우의 동생인 게 알려질 까 무서워 아버지의 사진을 잘라냈다.

청옥 큰고모는 할머니를 닮아 키가 작았지만 둘째 영옥은 키가 크고 무거운 짐도 척척 들어서 옮길만큼 웬만한 남자들보다 기운이 세고 일도 잘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를 닮아 7남매 중 제일 미인이었고 노래도 잘했다는 둘째고모가 제일 먼저 돌아가셔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90년대 중반 한국을 방문해 동생인 아버지와 삼촌의 집에서 몇 년간 지내셨던 청옥 큰고모는 동네사람들이 연변 말투를 듣고 조선족 할머니냐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정색을 하고 호통을 치셨다.

나는 당시 결혼하고 거제도에 살 때였고 직장생활도 하고 있어 자주 친정을 찾지 못했다. 고모가 한국에 머물 때, 고모가 살아계실 때 자주 만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최운산장군의 모든 역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큰딸에게서 최운산장군의 삶과 자신이 눈으로 목격한 만주 봉오동의 무장투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때는 내가 역사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큰고모는 한국 텔레비전에서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고 크게 실망하셨다. “봉오동·청산리전투는 우리 아버지 부대가 치른 것이고, 큰아버지 최진동 장군이 총사령관인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홍범도, 김좌진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총사령관이라고 하느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기가 막혀 하셨다. "어찌 이러오?" 하는 고모의 질문에 아버지는 낯을 들지 못하셨다. "지금은 한국 역사가 잘못 되어있지만 언젠가 사학자들이 제대로 정리해줄 것"이라고 답하시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이미 노인이 된 아버지는 당신이 사회적으로 좀 더 성공했더라면 이렇게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을 거란 자괴감으로 많이 힘들어 하셨다. 

큰고모는 “홍범도, 김좌진 두 분은 우리 아버지 최운산의 부하들이다. 두 분이 봉오동전투 전에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인 봉오동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다. 특히 김좌진은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집에서 겨울을 나고 자기 부대로 갔다.”고 설명했다.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설립 당시 본부에서 머물다가 최운산 장군이 서일총재와 함께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자 간부로 임명 받아 서대파로 갔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보다 더 늦게 봉오도전투 직전에 봉오동에 들어왔다. “홍범도 김좌진 두분은 자주 우리집에 와서 머물렀고, 회의를 마치고 갈 때는 수십 개의 수레에 곡식을 가득 싣고 자기들이 속한 부대로 돌아갔다. 그 수레들이 너무 많아서 수레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 막내 삼촌이 한국에 정착하고 결혼한 뒤 큰고모를 만나러 연변에 가서 찍은 사진 큰고모와 계순 고모가 같이 있다. 왼쪽에 있는 친척은 누구인지 

봉오동전투 당시 두만강을 건너 밤새워 행군을 한 일본군이 새벽에 봉오동 건너편 고려령에 도착했고, 일부러 길이 아닌 산중턱을 넘어 중촌의 봉오동 마을로 들어왔다. 1912년생인 청옥고모는 봉오동전투 당시 아홉 살이었다. 어린애지만 겁이 없고 호기심이 많았던 청옥은 주민들이 모두 대피한 마을 귀퉁이에 숨어서 마을에 도착한 일본군을 몰래 훔쳐보았다. 번쩍거리는 긴 장화를 신고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군인들은 마치 개선 행진을 하는 것처럼 나팔을 불면서 마을 뒷산을 향해 힘차게 열을 지어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산 위에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역사적인 대패를 하고 만다.

"그때 일본군이 수레에 대포, 기관총 등 무기를 싣고 왔는데 말들이 무거운 무기를 끌고 산길을 넘어 오느라 지쳤다고 우리집 마구간에 있던 말들을 끌고 와 수레를 지워 산으로 올라갔다. 또 일본군 대장은 그 중 제일 좋은 백마를 빼앗아 타고 갔다.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자 집에서 끌고 간 말들은 총소리에 놀라 수레를 매단 채로 마을 쪽으로 내달렸고, 백마를 탔던 장교는 백마가 높이 뛰어오를 때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고 한다. 말들이 무를 싣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대포와 기관총 등 일부 대형무기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문을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일본군이 끌고 갔던 말이 집으로 돌아와 머리로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할머니와 아버지도 자주 들려주셨던 봉오동전투의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이와 함께 할머니가 들려주신 봉오동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다. 당시 일본군은 본대와 후속부대가 따로 구성되어 들어왔는데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군의 군복은 누런색으로 모자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뒤따라온 부대가 위장 작전으로 붉은 띠를 떼어낸 모자를 썼다는 것이다. 

당시 전투 중에 피아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봉오동 산의 지형에 익숙한 독립군들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교전을 하다 후속부대가 들어오자 숨어버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 속에서 같은 편 군인을 적군으로 착각한 일본군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난사해 대규모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고 한다. 오전에 맑았던 날씨였는데 전투 중 우리 독립군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서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졌다.

날씨 덕분에 독립군이 위기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다. 폭우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지형지세를 잘 아는 우리 독립군들이 재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빗속에서 우왕좌왕하는 일본군을 완벽하게 격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후 하늘이 대한민국의 독립전쟁을 돕는다는 믿음이 커졌고 독립군의 사기는 의기충천했었다.

80대 노인이 되어 만났던 큰고모를 먼저 하늘로 보내드리고 어린 시절 자매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예쁜 청옥고모를 다시 만났다. 청옥고모는 내 기억보다 훨씬 곱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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