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장군의 막내딸 계순과 막내아들 호석은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 연변에 살다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살고 있던 최운산장군의 아들 최봉우를 찾게 된 두 분은 1986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초청을 받아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아버지는 60대 중반이셨고 계순고모는 50대 초반, 호석삼촌은 40대 후반이었다. 어린아이였던 동생들을 4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의 감격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동생들과 몇 날밤을 새면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셨다. 특히 6살에 부모님과 헤어져 집안이야기를 많이 듣지 못한 막내 호석에게 이제라도 부모님과 집안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다.

▲ 1986년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을 찾았고 제주도 여행 중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아버지, 게순고모 호석삼촌

1939년생으로 열한 번째 태어나 일곱째가 된 호석삼촌은 할아버지가 55세, 할머니가 47세에 낳은 막내아들이다. 첫아들은 봉우鳳羽, 둘째아들은 봉학鳳鶴이라 불렀다. 김성녀 여사는 아들을 셋 낳았으니 막내아들의 이름은 자신이 짓겠다고 기염을 토하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뜻을 받아들이셨다. 최운산 장군 휘하의 독립군 중 잘 생기고 인품 좋은 金浩石 대장이 마음에 드셨던 김성녀 여사는 막내아들에게 호석浩石이란 이름을 주셨다. 그렇게 막내로 귀염을 받으며 유아기를 보낸 호석은 시대의 격변으로 6살에 부모님을 잃어야 했고 누이들의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는 큰누나 청옥이 엄마가 되어주었고 커서는 막내누나 계순이 여러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생을 가르쳤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지주집안 자식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동생 호석이 출신성분이 나빠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바로 계순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지방으로 가서 출신 성분을 빈농으로 속이고 동생을 자신의 적에 올렸다. 누나 덕분에 학교에 다니게 된 호석은 항상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너무 성적이 좋았던 탓에 가족력을 조사하다 출신성분이 들통나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에 들어가도 학창시절 내내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야 했고 목에 커다란 팻말를 걸고 구령대에 올라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혹독한 비판을 당했다. 지주 자식이라는 놀림을 참지 못해 싸움을 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누나 계순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동생을 어르고 달래며 지역을 옮겨 고등학교를 마치게 했다.

월급의 절반을 동생의 학비로 쓰면서도 계순이 호석의 공부를 포기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어려움을 속에서도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호석의 가능성을 지켜주고 싶었던 동생에 대한 사랑이었다. 계순고모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호석삼촌은 화학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주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늘 제일 어려운 일을 배정 받았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긴장 속에서 지내야 했다. 삼촌은 작은 실수만 해도 쫓겨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공장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을 수 있도록 자신을 숙련시켰다. 화학공장이라 위험한 화학물질을 다루는 일이 많았는데 공장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숙련공인 호석을 찾았다. 그 일은 작업 중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라 모두 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호석삼촌은 의지적으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공장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무시당하지 않고 안정되게 일할 수 있었다.

▲ 앞줄 중국을 방문한 영옥고모와 호석삼촌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면서도 지리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호석삼촌은 독학으로 지리공부를 꾸준히 해서 지리교원 임용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땄다. 중국에서는 고졸도 일정 정도 성적이 되면 교원임용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한다. 뛰어난 성적으로 중등지리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한 삼촌은 화학공장을 그만두고 중학교 지리교사가 되었다. 중등교사로 일정 기간이 지나자 능력을 인정받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호석삼촌은 연변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고등 지리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봉오동에서 제일 큰 대궐 같은 집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줄줄 새는 마을에서 제일 허름한 빈집으로 쫓겨 갔던 6살 고아의 처절했던 삶으로부터 일궈낸 놀라운 변화였다. 계순고모와 호석삼촌의 의지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난한 호석남매에게 만주의 긴 겨울은 너무 혹독했다. 해마다 동상에 시달렸고, 귀와 발이 얼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호석삼촌은 동상으로 살이 떨어져 나가 자신의 발가락뼈를 직접 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살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말을 들으며 상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아리고 서늘해졌다. 그러나 호석삼촌과 나는 고문과 매질 끝에 집에 가서 죽게 하려고 풀어주었는데 극적으로 살아난 우리 아버지 최봉우에 대해, 감옥에 갈 때마다 수레에 실려서 돌아왔지만 고문의 상처가 잘 아물어 금방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도 동상 걸린 발이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렇게 멀쩡하게 아물었다고 자신의 발가락을 보여주는 호석삼촌과 이런저런 상처가 빨리 나았던 우리 형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 집안은 상처가 잘 아무는 유전적으로 좋은 체질을 타고 난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식에서 인사말하는 호석삼촌

호석은 고등학교 지리교사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중 한국방송을 통해 6.25 때 죽은 줄 알았던 큰형님을 한국에서 찾았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큰형님에 대해 들었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17살이나 많은 큰 형님은 동경유학생이라 방학 때나 얼굴을 볼 수 있는 조금은 어려운 사람이었다. 방학이면 일본유학을 같이 했던 옥순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두 남매가 마을 어귀에 나타나면 온 동네가 다 훤해지는 것 같았다. 어린 호석은 그런 형님과 누나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닮은 큰형님과 어머니를 닮은 작은형님은 성격도 많이 달랐다. 큰형 봉우는 소학교를 마치고 부모님 몰래 유학을 떠날 만큼 담대했지만 착한 둘째형 봉학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집에 남았다.

형제들과 친척들 간의 우의가 깊었다. 호석삼촌은 사촌 형들과 연어가 줄지어 다니는 봉오동의 강에서 자주 낚시질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연어가 뛰어노는 봉오동 계곡은 물이 맑고 수질이 좋은 곳이었다. 어느 여름엔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봉우와 봉학, 호석 3형제가 봉오동 계곡으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런데 경험이 없어선지 큰형님은 한 마리도 못 잡았고 둘째형님이 양동이에 물고기를 가득 채워주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3형제가 함께 했던 몇 안 되는 행복한 순간 중 하나다. 물맛이 좋아선지 예전부터 연변에서 생산되는 쌀은 맛이 좋아서 중국 전체에서 일등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70년대 말 중국정부는 봉오동 계곡 아래에 대형 댐을 건설했다. 그 댐의 물이 지금 국경도시인 도문시의 식수원으로 제공되고 있다.

학창시절 축구선수와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봉우형님은 운동도 잘 하고 굉장히 민첩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날 봉우형님이 누군가와 싸움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그런데 몸집이 크지 않은 형님이 덩치 큰 상대에 전혀 밀리지 않고 단숨에 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정말 멋있었다. 한국의 KBS가 연변에서 이산가족을 찾는다고 광고를 했을 때 어린 시절 마치 불사조 같았던 봉우형님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으로 형님을 찾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거의 1년이 지나 잊어버리고 지낼 즈음, 형님이 한국에 살아계신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날아왔다. 꿈같은 일이었다.

40대 후반에 한국에 살고 있는 큰형님을 만난 것은 호석삼촌의 일생을 바꾼 대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동생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다. 내가 두 분의 귀국길에 약간의 보탬을 드렸는데 그 돈이 중국에서는 꽤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한과 중국의 생활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격차를 느낀 호석삼촌은 오래지 않아 연변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들어와 살기로 결정했다. 이미 경제력을 잃은 노년의 형님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독립유공자의 아들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자신이 젊으니 자본주의 사회가 제공하는 여러 가능성과 기회를 잡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삼촌은 한국행을 원하지 않는 아내와 결별하면서까지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계순고모와 호석삼촌이 모국방문단으로 한국을 찾았던 1986년, 거제도에 살고 있던 나는 남편과 함께 부산으로 나가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아버지가 일식을 좋아하시니 동생인 두 분도 당연히 생선을 좋아하시리라 생각한 나는 맘 먹고 유명한 일식집으로 모셔갔다. 모두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했다. 그런데 한 십년 정도 지난 후에 삼촌과 고모 두분 모두 회를 못 드신다는 것을 알았다. 내륙지방인 연변에서는 회를 먹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만난 조카가 모처럼 비싼 식당으로 초대한 것이 고마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셨단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섬세하게 사랑을 하지 못한 나의 덤벙거림이 지금도 너무 죄송하다.

부산의 형님 곁으로 돌아온 삼촌의 첫 직장은 경상대학교 중국어 강사였다. 국가에서 주선해준 것이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라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회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삼촌에는 정말 좋은 시작이었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계속 공부해서 학위를 딴다면 앞으로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으니 최상의 직장을 구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정말 좋은 분을 만나 결혼도 하셨다. 호석삼촌을 눈여겨보던 이웃집에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친정 동생을 소개시켜 주었다. 10년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두 분은 마치 20대 젊은이들처럼 연애를 했고 결혼에 성공했다. 지금까지 알콩달콩 잘 살고 계신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한국과 많이 달랐다. 돈 잘 버는 택시기사를 대학교수보다 더 선호했다. 호석삼촌에게는 수입이 적은 대학강사라는 직업이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왕 자본주의 사회에 나왔으니 더 늦기 전에 구체적으로 경제활동을 더 할 수 있는 분야의 일하고 싶다고 학교를 그만두셨다. 그 후 일반 기업에 취직을 해서 몇 년간 일했으나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마음고생 끝에 회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임신한 숙모도 병원을 그만두고 늦둥이 아들을 낳았다.

삼촌부부는 함께 이런저런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을 키우는 신혼살림은 무척 고생스러웠고 자본주의 사회를 몸으로 겪으며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이가 좀 크고 나서야 숙모가 다시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지금도 산후조리원 관리자로 직장생활을 하신다. 50세에 결혼을 하고 낳은 꼬마 사촌동생은 벌써 대학 졸업반이다. 아버지를 닮아선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싸움도 곧잘 해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가기도 했는데 이젠 워킹홀리데이를 경험하겠다고 1년간 호주에 가서 일한 돈을 모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장정으로 성장했다.

1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최운산 장군의 유족연금이 승계되어 삼촌의 노년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연변을 떠나 한국으로 들어올 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지만 30년 가까이 한국에 살면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적응하게 되었다. 비록 넓지 않지만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자족하신다. 더구나 이제 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더 바랄나위가 없다고 하셨다.

삼촌과 고모가 들려주는 연변이야기에서 가끔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진실을 마주하곤 한다. 6.25 때 중공군 7만이 참전했는데 많은 수의 연변의 조선 사람들이 중공군에 소속되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군이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분단의 역사는 일제를 향했던 총부리를 동포끼리 서로 겨누게 만들고 말았다. 호석삼촌이 잘 아는 이웃사람 중에도 중공군으로 낙동강 근처까지 내려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국군의 병력이 대체로 약했다고, 그러나 그중 백골부대는 꽤 강한 부대였다고 평가했단다.

▲ 지금의 호석 삼촌

얼마 전 삼촌을 만나 할아버지 부대가 부르던 독립군가가 있었을 텐데 한 번도 듣지 못해 아쉽다고 말씀드렸더니 삼촌이 어릴 때 집에서 따라 불렀던 독립군가를 기억해 불러주셨다. 제목을 모르지만 가사에서 연해주와 북만을 넘나들었던 독립군들의 애환이 느껴졌다.

삼촌이 기억한 독립군가다.

시베리아 타향에 이 몸이 자라

부모동생 이별을 당하였으니

눈물이 앞을 막아 옷을 적신다.

만리자창 천리에 어찌 가리오.

비쿠리시크 찬바람 살기를 띠고

밤인가 로수에 달이 비칠 때

막막히 앉아있는 나의 심사를

날아가는 저 기럭아 너는 알련만

나의 부모 동생 손목을 이별하기 싫어 슬피 운다.

소항영 시내야 너 잘 있거라.

 

독립군이 부르던 노래 하나 더 

 

바람 좇아오는 비 우수수 우두둑

우레 소리 번개 번쩍 바다 물결 폭포수

노래도 가지각색 소리도 가지각색

귀뚜라미 또루룩 또루룩 스르르 맴맴 스르르 맴맴

각각 좋다 노래하니 자연의 군악소리, 또다닷띠 띠띠따

 

노래를 불러주시는 걸 보면 삼촌도 할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잘 하시는 분인 것 같다. 삼촌이 기억력도 좋으시고 아직 건강하셔서 정말 다행이다.

 

[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최성주 주주통신원  immacoleta@naver.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