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팬들이 있는 한 '3시의 다이얼'은 생방송 중이죠"

1906년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면서, 1907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축음기 음반을 틀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짜 디제이는 35년 등장한 마틴 블락이다. 그는 뉴욕의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음악을 소개하면서 큰 인기를 차지하게 된다. 디제이의 시대를 연 것이다. 한국은 1964년이 되어서야 진짜 다제이가 진행하는 음악방송이 시작되었다. 최동욱씨(81세)가 진행한 동아방송의 ‘Top Tune Show'’가 그것이다. 이후 진행한 ‘3시의 다이얼’은 그를 디제이계의 독보적 존재로 올려놓았다.

음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생각을 반영한 최고의 문화라고 생각해요.” 라고 하는 최동욱씨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 명예회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해 6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에서 ‘3시의 다이얼’을 생방송하고 있다.

▲ '문화공간온'에서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고 있는 최동욱씨

'문화공간 온'에서는 지난해 10월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촛불집회가 시작되면서 매 주말 <한겨레> 주주를 비롯한 시민들로 뜨거운 열기를 뿜는다. 상대적으로 일요일엔 한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려는 음악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다시금 온기를 덥힌다.

“40년 전 고교생 시절 엽서를 보냈으나 듣지 못한 노래,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다시 한번 신청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40년 팬을 이제라도 만나니 기쁩니다. 오늘은 신청이 밀리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들려드리겠습니다.”

때로는 ‘안녕하세요’의 가수 장미화씨처럼 ‘디제이 최’와 친분이 있는 왕년의 인기 가수와 프로듀서, 방송인들이 놀러와 자연스럽게 청취자들과 노래로 추억으로 어울리기도 한다. 계절에 맞는 대중적인 곡을 선정해 다 함께 부르는 싱어롱으로 마무리 짓는다.

‘3시의 다이얼’ 시그널 뮤직은 That Happy Feeling이다. 먼저 이 음악을 틀어놓고 그 친근함에 젖어 과거의 행복한 한 때를 기억하며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뮤직홀 디제이'라는 직업을 개척하다.

고교시절 최동욱은 음악을 좋아해서 성가대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성가보다는 팝송이었다. 친구들과 취미로 팝송을 들으면서 LP판을 사서 모으고 팝송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미래 디제이의 싹을 키웠다.

고려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음악에 관심을 놓지 않았다. 대학 클래식 합창단을 만들어 활동도 했다. 합창단원 자격으로 미국대사관 공보실에서 LP판을 빌려서 듣기도 하고 교수 나운영님, 작곡가 이흥렬님을 초대하여 매주 음악감상회를 열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는 팝송에 대한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다. 외국 잡지를 어렵게 구해 보기도 했고 AFKN, 심지어 미군부대에서 나온 정보를 얻어듣기도 했다.

군 생활을 마친 1959년 그는 아르바이트로 디제이 일을 하게 된다. 종로소리사 옆골목에 있던 뮤직홀 ‘디 쉐네’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음악을 소개했다. 그 이전에는 기본 정보만 제공하며 ‘판’만 틀어주는 플레이어(player)만이 활동하고 있었다. 최동욱은 음악에 소개(Talk, 한국식으로 멘트)를 넣으면서 정식으로 디제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디제이 활동이 인기를 끌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그를 부르는 곳이 많아졌다. 그는 화신백화점 3층의 뮤직 홀 ‘메트로’, 종로2가 YMCA 뒤의 ‘세시봉’, 충무로의 ‘카네기’, 그리고 다시 ‘디쉐네’로 갔다가, 종로2가의 ‘뉴월드’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디제이의 전형을 만들어 스스로를 훈련했고, 후배들에게도 훈련의 기회를 제공했다.

뮤직홀 디제이로 이름을 날리던 1961년, 유일한 팝송 프로그램인 ‘히트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KBS 라디오는 그를 ‘히트 퍼레이드’의 프리랜서 PD로 발탁한다. 구성을 기획하고 원고를 쓰며 아나운서를 배정받아 스튜디오에서 녹음까지 하는 과정은 직접 마이크를 잡지 못한 것만 빼면, 그가 뮤직홀에서 꿈꾸어왔던 디제이 전형 그대로였다. 그는 ‘히트 퍼레이드’에서의 2년간 경험으로 음악프로그램 기획에서도 자신감을 얻게 된다.

KBS의 ‘히트 퍼레이드’를 진행하던 중 동아일보로부터 음악칼럼을 의뢰받는다. 신문지면에 가요와 팝송을 4-6곡씩 소개하는 ‘금주의 히트 퍼레이드’라는 고정 코너를 맡아 2년간 진행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칼럼리스트로서의 자신감도 갖게 된다.

KBS의 ‘히트 퍼레이드’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동아일보에 칼럼까지 쓴 인연으로 1962년 동아일보에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다. 동아일보 자회사로 개국 예정인 동아방송 음악과 소속 프로듀서를 맡아 모든 장르의 음악을 배정하는 일을 한다. 드디어 1963년 동아방송이 개국한다. 그는 일주일간 음악프로그램 12개를 담당하는 전문 음악 PD로 바쁜 시절을 보낸다.

 

라디오 방송 디제이 시대를 열다.

PD로서 그의 프로그램 중 ‘Top Tune Show'는 미국의 최신음악을 오후 5시 20분부터 20~30분간 소개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매일 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없었다. ‘Top Tune Show'는 최초의 매일 하는 음악방송이 되었다. 그는 직접 마이크를 잡지 못했다. 마이크는 아나운서의 전유물이라는 인식 때문에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방송 시작 후 1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그의 꿈이 이루어질 기회가 왔다. 신참 아나운서의 실수로 그날 방송 녹음이 폐기되어 결방될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생방송으로 직접 마이크를 잡겠다고 요청했다. 신참 아나운서의 실수가 한국 최초로 라디오 방송 디제이의 생방송 진행을 허용한 것이다. 생방송이 나간 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새로운 방송에 반응도 좋아 계속 진행한다. 그는 자국 아나운서, 엔지니어, 음악 PD, 타국 아나운서 4면에서 질시를 받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인 상태가 되지만, 1년 후 문화방송과 동양라디오에서도 ‘Top Tune Show'와 같은 방식으로 뮤직홀 디제이를 발탁하여 기획과 진행까지 맡긴다. 드디어 라디오 방송 디제이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1964년 봄 시작한 ‘세시의 다이얼’은 그가 아이디어를 낸 작품이다. 그 당시 라디오 방송은 하루 종일 하지 않았다. 아침 5시에 뉴스를 시작으로 10시까지, 낮엔 12시 뉴스를 시작으로 2시까지. 저녁은 5시 뉴스를 시작으로 10시까지 진행했다. 중간 공백의 시간을 잇는 연속방송으로 진행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는 오후 비는 시간에 매일 1시간씩 음악프로그램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3시의 다이얼’이 만들어졌다. ‘3시의 다이얼’은 1967~1969년 연속해서 전국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히트를 쳤고, 현재까지 유사 음악프로그램은 있지만 똑 같은 프로그램은 나오질 못할 정도로 독특성을 자랑했다.

‘3시의 다이얼’이 그렇게 사랑받은 이유가 뭘까?

그는 첫 번째로 ‘전화리퀘스트(전화신청)’를 뽑았다. 그 당시 전화신청을 받는 프로그램은 있었으나 전화 내용을 녹화한 후 음반을 확보하고, 녹음 대화를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생방송으로 전화를 받아서 즉석에서 음악을 들려주는 곳은 없었다. 그는 기존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솔직하게 하고 싶었다. 동아방송에서는 RCA레코드에서 구입한 음반이 1300장 가량 있었고, 음반에 욕심이 많은 그가 극성스럽게 요청해서 지속적으로 확보한 음반이 다른 방송사와 비교할 수 없게 많았다. 전화 요청 후 3분 정도면 음반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이 그는 청취자와 음악에 관한 에피소드를 나누면서 기다렸고 음반이 오면 바로 틀 수 있었다. 그런 풍부한 자원과 음악에 관한 그의 탁월한 전문적 지식 때문에 다른 방송사에서는 할 수 없었던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변화’를 꼽았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똑같은 진행을 하게 되면 식상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매번 조금씩이라고 색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매일 유명한 배우, 가수, 체육인,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는 명사를 게스트로 초대해서 이야기도 나눴다.

1964년 봄부터 1970년 3월까지 6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을 포함하여 약 2000일 넘게 단 한명의 대타도 없이 ‘3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다. 간혹 일이 겹쳐 5-10분 정도 늦은 경우도 5회를 넘지 않는다.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지식과 역량을 모아 30대 청춘을 ‘세시의 다이얼을 위해 바친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1970년에는 라디오 사상 처음으로 심야 생방송인 ‘0시의 다이얼을 개발하여 진행을 맡았다. 최동욱의 0시의 다이얼‘로 시작한 심야방송은 곧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로 이어지면서 야밤엔 심야음악방송이 전국을 휩쓸었다.

그는 매일 5시 30분에 진행하는 ‘Top Tune Show’, 3시부터 1시간 진행하는 ‘3시의 다이얼’, 매일 밤 12시부터 1시간 30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0시의 다이얼’까지 세 프로그램을 맡았다. 한 사람이 매일 3개의 음악방송을 진행한다는 것은 그때도 처음이었지만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동아방송 음악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에 할애한 것이다.

 

새로움, TV 음악방송 디제이시도하다.

그는 동아방송을 떠나 1971년 4월 3년 계약으로 동양방송으로 이적한다. 삼성 이병철이 만든 동양방송은 1964년 동양라디오, 동양텔레비전을 개국했고, 1966년에는 동양FM까지 개국을 한 방송이었다. 나중에 전두환의 언론강제통폐합에 의해 전부 KBS로 넘어가버렸지만 TBC는 자타공인 1위 방송사였다. 최동욱의 이적에 대해 어떤 이들은 ‘최동욱이 돈에 팔려갔다’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직 전 동아방송에서 받은 그의 월급은 21만원이었다. 동양방송에게도 같은 월급 21만원을 요구했다. 적어도 돈에 팔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TV라는 매체를 활용해서 디제이의 영역을 확장 개척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당시 음악동영상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는 ‘그림에 노래 싣고’라는 TV 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유명한 여자 탤런트 안인숙과 Talk Show처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곡을 소개하고 신동우 화백이 그 곡의 흐름에 따라 즉석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도 심야음악방송인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오후에는 2시 40분부터 4시까지 ‘최동욱 쇼’, FM에서는 ‘버리이어티 쇼’를 진행했다.

TV라는 매체를 통한 새로운 시도는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 지금은 동영상 앨범을 활용한 VJ(Video Jockey)라는 직업이 생성되었지만 그 당시는 너무 앞서 나가지 않았나 싶다. 3년 계약을 마친 1974년 그는 동양방송을 떠난다.

 

'자동차 칼럼리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개척하다.

잠시 휴식 기간을 거친 후, 1961년 동아일보 컬럼을 썼던 경험을 살려서 기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1975년 서울신문사 방송, 영화, 가요부 차장으로 입사하게 된다. 그 당시 서울신문은 굉장히 보수적인 신문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그에게 서울신문은 그의 개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서울신문사에 있으면서 동양방송에서 ‘추억의 팝송’을 진행해달라고 해서 잠시 진행하기도 했으나 신문사의 반대로 중도 하차한다.

1978년, 동아일보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동아일보가 자매지인 스포츠동아를 창간하면서 그를 기자로 스카우트했다. 스포츠 동아에서는 방송, 영화, 레져, 음악 분야를 총괄하는 레저분야 담당 기사를 그에게 맡겼다.

그는 남들이 안 쓴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 당시 자가용 시대가 막 열릴 때였는데 자동차에 대한 기사는 신차 소개 등 경제부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평소에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는 자동차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싶었다. 과학적인 자동차 운전 방법, 자가 수리 방법, 드라이브 코스 등 한국 최초로 신문지면에 자동차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직접 발로 뛰고 실측을 거쳐 쓴 드라이브 코스 칼럼은 인기가 좋아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6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전국 운전자의 필독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음악방송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1980년 들어서부터 음악방송 디제이는 전부 젊은 사람들 위주로 발탁되었다. 기성 디제이들이 설 땅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 동아 기자를 그만두고 1993년 재충전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도 음악방송 디제이로 활동하다.

그는 미국에서 쉬면서 음악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구하고 싶었다. 항상 음반과 음악에 관한 자료가 부족했던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92년 미국 로스앤젤러스 소재의 미주한인방송에서 사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2003년까지 미주한인방송에서 AM, FM 등 지상파에서 디제이로 일하면서 희귀 음반 수집과 음악전문서적 등 자료 수집에 매진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이미 LP판을 CD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수집할 수 없는 희귀 CD 음반을 1만여 장 수집했고, 새로 나온 CD를 포함해서 전체 300만곡을 확보했다. 또한 2천여 권의 책을 포함해 한국에선 접하기 어려운 각종 음악자료도 수집했다. 그렇게 1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모든 음반과 자료를 가지고 2003년 한국으로 귀국한다.

 

한국 인터넷 음악방송 디제이 개척하다.

귀국 후 도로안전공단에서 하는 교통방송에서 심야 12시부터 2시간 진행하는 음악 생방송을 하기도 했고, 아리랑 방송에서 음악 PD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청취자들과 생방송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 당시 인터넷 방송은 전 세계적으로 확장세에 있을 때였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지상파방송 청취율을 능가하는 인터넷방송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미국에서 가져온 2억에 달하는 최고의 방송기기를 활용하여 인터넷 방송을 열기로 마음먹는다.

2005년, 광케이블 전용회선을 사용해서 정식 서버를 통한 인터넷 방송 '라디오 서울 코리아(i-Radio / www.radioseoulkorea.com)'를 개국한다. 한국 최초의 지상파 수준 음질을 지닌 인터넷 방송이다. 생방송과 재방송을 섞어 24시간 진행하는데, 생방송 때 청취자는 듣고 싶은 곡을 실시간으로 신청할 수 있다. 예전 동아방송에서 3분 걸린 음반 찾기를 그는 지금 컴퓨터를 통해 3초면 찾을 수 있다. 그가 미국에서 수집한 300만 곡 중 엄선한 최고의 명곡과 히트곡, 청취자가 신청할 만한 알짜배기 17만 곡을 컴퓨터 파일로 저장해 놓았다. 이런 막강한 자료와 그만의 시스템 구축으로 신청곡을 받으면 3초 안에 틀어줄 수가 있는 것이다. 풍성한 음원과 곡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 최고의 음질로 인해 매일 4-5000명이 방문하여 방송을 듣는다.

현재 12년째 진행하고 있는데 매월 150만원씩 전용회선과 서버 사용료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광고를 붙이지 않는다. 그동안 자신의 음악프로그램을 열심히 들어주고 사랑해준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해서다. 또한 방송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지금 방송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외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방송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방향을 제시해주고 싶다.

 

 

‘문화공간 온’에서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다.

‘문화공간 온’ 이요상 상임이사의 소개로 ‘문화공간 온’을 방문했다. 팬들과 만나는데 ‘문화공간 온’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문화다. 특히 명곡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생각을 반영한 최고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넘나드는 그런 음악문화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라디오 서울 코리아(i-Radio)'는 온라인에서 청취자를 만나는 공간이라면 ‘문화공간 온’은 오프라인에서 청취자를 만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라디오 방송의 현주소에 대하여...

라디오 방송의 절대 청취대상은 18세부터 지금같이 초고령시대에는 80세까지다. 우리나라는 80년대부터 젊은이 취향으로 가면서 방송이 본 모습을 잃고 있다. 주 타킷이 중학교 연령에서 내려와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을 위주로 방송을 한다. 타깃이 어린아이들 위주이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하게 말해서 방송을 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방송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방송이 아닌 방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 라디오 방송의 현주소다. 방송은 옛날부터 뉴스와 생활정보와 음악인데 지금은 이 구성이 막 뒤섞여 있다. 음악방송이어도 잡담이 위주고 음악은 보조로 전락했다.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인식되는 라디오가 소외된 기존 청취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양질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방송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신문이란?

한겨레는 솔직하고 용감하다. 바른 말하는 언론이지만 편파적이라는 생각도 한다. 기사의 비중에서 보수와 진보 둘 다 공정하게 두었으면 좋겠다. 한겨레라는 말 자체가 온 국민이라는 말이다. 편파적이 되면 맘에 드는 사람들만 보지 나머지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포용하면서 국민을 이끌어주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조선일보의 독자 수가 많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 독자들도 다 수용할 수 있는 한겨레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겨레가 온화해졌네.’ 그런 말을 듣고 싶다. 대신 한겨레가 줏대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양면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신문 그래서 어떤 독자들도 다 좋아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뭘까? 한마디로 ‘도전 인생’이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굳건한 소신과 단단한 지식, 풍부한 경험으로 개척해나갔다. 뮤직홀의 디제이, 라디오 음악방송의 디제이, TV의 디제이, 인터넷 음악방송의 디제이, 그리고 자동차 칼럼리스트까지... 그가 새롭게 개척한 분야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직업을 창출했으며 그는 그들의 전형이 되었다. 기존의 관행을 깨는 이러한 '도전정신'은 '한겨레정신'과도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도 하지 않은 인터넷 방송 ‘라디오 서울 코리아(i-Radio)'을 12년 째 매월 150만원의 자비를 들여 진행하고 있다. 이를 꾸려가는 것이 이제는 쉽지 않다고 했다. 선한 마음으로 문화에 투자하고 싶은 독지가가 있다면 후원을 받아, 그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음악방송문화를 꽃피우고 싶다고 했다. 부디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 이 기사의 압축본은 한겨레신문 2월 21일자 21면 <짬>에도 실렸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783453.html?_fr=mt3

동영상 및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안지애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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