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 최운산 장군

할아버지, 저는 당신께서 해방을 한 달 앞둔 1945년 7월 5일 순국하신지 12년 후인 1957년에 태어난 맏손녀 星周입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는지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는지요. 고문으로 죽음을 앞둔 큰아들을 평양으로 도피시키고 그 아들의 안위를 살펴보러 가셨던 평양에서 갑자기 심해진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7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당신은 타향인 평양에 홀로 계십니다.


저희 5남매는 모두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태어났습니다. 맏손자인 큰오빠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아래로 넷은 6.25 때 피난 내려온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비록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손자들이 태어날 때마다 하늘에서 기뻐하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저희는 당신의 동반자였던 할머니 김성녀 여사를 통해서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이 어떻게 준비되고 어떤 결실을 이뤄냈는지 자세하게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직 만주의 무장독립전쟁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전투사에 첫 승리를 선물하신 최운산 장군은 언제나 손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영웅이셨습니다.

▲ 연변박물관 최운산장군

당신께서는 1905년 일제가 우리나라와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자 백성이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을 꾸셨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이미 당신이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다져 놓은 곳, 조선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힘을 비축할 수 있는 만주지역을 독립운동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셨지요. 그래서 1908년 도시인 연길을 떠나 두만강이 가까운 봉오동으로 가셨습니다. 고조모 청주 한씨 부인, 증조부 최우삼과 증조모 전주 이씨 부인, 그리고 아들인 명록(진동), 명길(운산)의 가족과 명순(치흥), 명철 등 4대 모두가 당신의 소유지 봉오동으로 터전을 옮긴 것입니다.

이상주의자 최운산이 동포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鳳梧洞이라 이름붙인 곳, 당시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조선의 한 지역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는 새로운 공동체, 할아버지는 '봉오동 신한촌'을 건설하셨습니다. 또한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해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양조장, 과자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필품 기업을 운영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기에 간도 제1의 거부로 불리셨습니다. 최운산 장군이 소유했던 토지가 부산의 6배에 달했지만, 농사로 들어오는 한 달 소출보다 하루에 여러 공장에서 들어오는 수익이 더 많았다고 하셨지요. 사실 농사만으로는 몇 천 명의 무장군인을 지속적으로 훈련시키고 무기를 공급할 막대한 군자금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요.

게다가 최운산 장군은 대규모 목장을 운영한 목축업자로 러시아군에 곡물과 소를 수출한 대 러시아 무역업자였습니다. 매번 훈춘으로 수백 마리의 소떼를 몰고 가서 러시아에 넘겼다고 했는데 당시는 비적들이 횡행할 때라 소를 팔러갈 때면 항상 무술고수인 최운산 장군이 함께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일꾼들이 출발하지 않고 버텼기 때문이었지요. 할머니는 방탄조끼를 입고 허리에 박달 망치와 단도를 차고 등에 긴 박달 봉을 메고 총은 지니지 않은 채 길을 떠나는 당신의 모습과 비적들이 덤벼도 죽이지 않고, 박달 봉으로 잠시 기절만 시켜 목숨을 살려주셨던 당신의 인품에 대해 설명해주셨어요.

무장독립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무기와 군자금이이고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을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상상 이상의 부를 소유했던 대재벌 崔雲山 장군이 계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손녀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저는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보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 같은 뛰어난 무술인 최운산 장군이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사실 최운산 장군은 신해혁명을 지난 중국에서 동북지역의 군벌이 성장하던 시기에 중국군에 합류하여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군사훈련을 책임졌고,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었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등 중국군 지도자와 혈맹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랬기에 이러한 중국군과의 관계가 항일 무장 투쟁의 든든한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무림 고수 사부님으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말씀을 듣기까지 수련을 멈추지 않으셨던 최운산 장군의 피를 물려받아선지 저도 어디서나 구경하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답니다! 달리기를 좋아했고 태권도를 배우기도 했어요. 중학교 때 오빠들과 겨루고 싶어 태권도장에 다녔지만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해 중간에 포기했던 것이 오래도록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고, 음악을 좋아하니 자연스럽게 취미의 수준을 넘어갔던 무용은 고3 때 그만두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제가 아버지를 닮아 사람을 좋아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런 저의 특징에서도 최운산 장군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답니다.

▲ 내가 세살 때 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만주는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입니다. 눈이 내리는 날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아무도 모르게 장독대의 눈을 치워 놓곤 하셨다지요. 할머니를 참 사랑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여러 에피소드를 들을 때마다 함께 계신 두 분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의좋은 부부,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일생을 동반한 김성녀 여사의 삶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견하게 되는 때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만주의 무장투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언젠가 만약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을 뵙게 된다면 여쭤보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도서관에서, 역사자료실에서 하나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에 관한 새로운 둘 사료를 찾을 때마다 문득문득 당신이 더 간절하게 보고 싶습니다. 중국인보다 중국어를 잘하셨던 최풍을, 변장의 귀재였던 최만익을, 전투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는 최문무를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북만주에서 한 시대 한 공간을 자력을 일구어 대한민국에게 내어주었던 최운산 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여러 역사적 사건과 등장인물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안중근, 이상설을 비롯해 만주를 지나가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을 격려하고 지원한 분이 최운산 장군이었다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부터, 혼자서 자위대를 창설하고 무장군대를 운영하던 시절을 지나 독립군들을 모아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통합부대 창설의 그 긴박한 순간까지, 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들었던 수많은 당신의 역사를 재구성해 자료화하고 역사화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요! 이제야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주역, 숨겨진 영웅 최운산 장군”이라고 호명되기 시작한 당신 앞에서 매순간 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있습니다.

얼마 전 1922년의 모스크바 피압박민족대회를 촬영한 동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새롭게 발굴된 귀한 영상이었어요. 그동안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이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다는 후손들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학자들이 참석자 명단에서 최진동 장군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최운산이나 최문무란 이름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형님을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마치 그림자처럼 함께 하셨던 두 분이니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도 함께 가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 손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역사적 개연성은 있지만 구체적 자료로 뒷받침할 수 없어 사료화 작업이 어렵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최운산 장군이 간도 제1의 거부였기에 무장투쟁이 가능했다는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만주 독립군과 최운산 장군이 이끌어가는 장대한 대하드라마는 늘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공간이 필요한 이야기였답니다. 1912년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100여 명의 자위대가 1919년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창설한 대한민국 첫 군대 <大韓軍務都督府>의 모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감동적인지요. 일본군에 대적할 무장력을 기르기 위해 긴 시간 먼저 준비하셨고 그 부대가 대한민국의 정식 독립군부대로 자리매김해 만주 무장투쟁의 중심축이 되었으니까요!

우리 집안은 무인집안이라고 늘 강조하던 아버지는 가족사를 글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후손인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드라마틱하고 풍부한 소재들로 채워진 가족사는 마치 위인전을 듣는 것 같았어요.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저항해 무력충돌을 불사했던 연변 도태 증조부 崔友三, 그 아들인 독립투사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형제들의 파란만장한 무장투쟁, 그리고 일제시대와 6.25를 겪어낸 아버지의 삶까지, 그 시대가 지닌 역사성을 외면하지 않고 매번 정면승부로 난관을 돌파하는 선택하셨던 당신들의 삶은 언제나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진진했습니다. 증조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3대인 아버지를 거치며 세대를 관통하여 시민운동가인 저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 학술세미나 포스터

또한 무장독립군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서일총재와 함께 당신의 소유지인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신데 이어, 3.1운동으로 무장독립군을 지원하는 애국청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서대파에서 가까운 ‘십리평’에 단기 군사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설립해 600명이 넘는 무장독립군을 양성하셨지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자비로 감당한 최운산 장군의 경제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할머니는 이때 너무 많은 군자금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바람에 최운산 장군의 재산이 소진되다시피 했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대군단을 이뤄야 한다는 판단 아래 간도의 모든 독립군을 봉오동으로 결집시키셨지요. 각 부대에 주둔지를 제공하고 식량과 피복, 무기 등 군수품 일체를 지원하겠다는 최운산 장군의 약조가 있었기에 만주 독립군부대의 대통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개별 부대활동에서 무기 부족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느끼던 우리 독립군들은 1920년 봉오동에서 신형무기와 정식 훈련을 통해 체계화 된 대한민국 독립군단 <大韓北路督軍府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까요! 아버지는 무장 독립전쟁사에서 최운산 장군을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강조하시곤 했습니다.

<大韓北路督軍府 대한북로독군부>는 장기간 훈련 양성된 정예부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군을 중심으로 수십 차례 두만강 유역의 여러 헌병대를 습격해 일본군을 긴장시켰지요. 저희 형제들은 최운산 장군이 국경수비대 습격전에서 전화선을 명중시켰던 이야기를 비롯해 할아버지의 신출귀몰한 사격술과 무술실력은 어릴 때부터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독립운동 자료를 조사하다 발견한 일본군의 전투상보에서 전화선을 끊어버려 연락이 두절되었고, 일본군이 모두 전멸한 줄 알았다는 내용과 독립군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평가까지, 어릴 때 할머니께 들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 기록된 보고서를 발견하고 놀라움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빈번해진 국경수비대 습격전으로 일본군의 피해가 늘어나고,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점점 세력이 확대되자 일본은 봉오동으로 대규모 토벌부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의 첩보능력은 이미 그것에 대비하고 있었고 1920년 6월 7일의 봉오동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대포와 기관총, 장총과 수류탄 등으로 완전무장한 독립군은 한 달 전부터 각 연대별로 산위에 참호를 파고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할머니는 그날 전투가 가장 치열할 때 억수같이 쏟아진 비가 결정적으로 우리 독립군들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어요. 비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아 일본군이 서로를 적으로 오인사격을 했다지요. 이렇게 봉오동전투의 시작과 끝을 자세히 알고 있는 저희 손자들은 그동안 방송이나 역사학계에서 봉오동전투를 지나치게 왜소하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요.

할아버지! 저는 봉오동전투 후 96년이 지난 2016년에야 처음으로 이 전투현장을 답사하고 이 참호를 걸어보았습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고 짧은, 크기도 각각인 여러 개의 참호를 발견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낙엽이 가득한 참호에 발을 내디뎠더니 발아래가 푹신푹신 했어요. 그 오랜 세월만큼 가득 쌓였던 낙엽은 삭고 또 삭아서 검은 흙으로 변해있었어요. 독립군이 서있던 참호 속에 서자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사격개시 명령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산 아래 일본군을 주시하는 독립군의 마음이 되었고 역사의 그날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의 감동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 100년 세월이 낙엽으로 가득했다.

할아버지!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대한민국 군대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大韓北路督軍府>군은 이어진 일본군의 보복전 '청산리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수천 명의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던 최운산 장군의 결단과 그 저력에 감동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후손의 마음이 아니라 100년 후를 살아가는 후세대로서 당신이 돌려놓은 역사의 방향이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한일합방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을 향한 열기를 되살린 횃불이 되었고 많은 분들이 독립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저는 최근에야 최운산 장군의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성공 요인이 할머니 김성녀 여사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어요. 최운산 장군의 동반자로 독립군부대의 모든 살림을 책임졌던 할머니는 수천 명의 군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주 말씀하시곤 했답니다. "동네 아낙들을 모아 함께 일을 하고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비롯한 부식을 각 부대에 배급했지만 병사들이 봉오동 연변장에 함께 모인 날은 한 끼에 3000명이 같이 식사를 했다"고 정말 힘이 들었다는 말씀에서 총을 들고 독립군을 이끌고 앞장서는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모습과 그 뒤에서 군대의 살림을 챙기느라 동분서주하시는 동반자 김성녀 여사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이었어요. 할머니는 최운산 장군이 자위대를 창설할 때부터, 자위대를 모체로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고 전투에 임하시던 순간까지의 모든 봉오동의 역사를, 그리고 해방이 올 때까지 단 한순간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최운산 장군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의 역사는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할머니는 생전에 최운산 장군의 역사를 찾아드리기 위해 정말 많은 애를 쓰셨지만 서훈조차 보지 못하고 1975년에 돌아가셨어요.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아픈 기억입니다. 1977년에야 최운산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셨습니다. 최운산 장군의 큰아들인 아버지의 평생 숙원이었던 봉오동전투의 역사를 바로 알리는 일은 이제 손자인 저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생활이 여의치 않다며 뒤로 물러나 있던 모든 핑계와 게으름에 용서를 청하며 첫 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함께 했던 모든 동지들의 삶과 봉오동전투의 역사적 의의를 찾고, 만주의 무장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려고 합니다. 너무 늦었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역시 진실은 힘이 세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창립식

2016년 7월 4일 역사학자들과 뜻있는 분들이 모여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했습니다. 창립식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먼저 당신의 묘를 찾으리라 매일 다짐하던 아버지는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돌아가셨어요. 그러나 최운산 장군의 막내딸과 막내아들이 살아계실 때 기념사업회를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1983년의 KBS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기적적으로 연변의 고모들과 삼촌을 만났어요. 막내고모와 막내삼촌이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의 자녀로 국적을 회복해 서울에 살고 계실 때, 봉오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고모와 삼촌이 그 자리를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타향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에게 “내 일생동안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일생 동안 의를 찾고자 했으니 후회가 없다. 시대가 어려워 모두 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제 곧 해방이 될 것이고 내 자식들이 나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기셨지요. 사실 당신의 7남매 모두는 역사의 격변을 온 몸으로 겪으며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에 흩어져 살면서 오랜 세월 간난신고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뒤안길에서 당신을 만나 최운산장군의 자식으로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말씀처럼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자평들 하시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큰아들 봉우의 셋째인 저는 외모도 성격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빼닮으셨다니 아마 저에게도 할아버지를 닮은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최근에 제가 최운산 장군의 손녀인 것이 알게 된 지인들이 가끔 “어쩐지... 역시 최운산 장군의 손녀라서 다르다”는 말을 해주기도 합니다. 진심일 때도 농담일 때도 그 말은 저에게 언제나 최고의 찬사입니다. 사실 지난 30년 NGO활동을 하면서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할 때, 해답이 보이지 않을 때면 저도 모르게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을 생각했습니다. 매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두려움 없이 가신 당신의 손녀가 이 정도 어려움 앞에 멈출 수는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습니다.

최운산 장군은 나라 잃은 젊은이의 분노와 의기를 고귀한 삶으로 승화시키셨고 온 일생을 통해 단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저도 당신과 동지들이 이루셨던 만주의 역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독립군들이 꿈꿨던 세상과 그들이 달렸던 노정을 후세대에 전하는 수로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삶과 역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적 어려움에 주저앉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한 줄기가 조금이라도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역시 내 손자답게 살았구나! 하고 미소 짓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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