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기술혁명일까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는 동화 같은 모습의 하얀 보름달. 우리는 멀리 떨어져 다소 생경한 사물조차 그저 우리의 방식으로 바라보곤 한다. 그 본질과 실체가 이해되지 않을 때조차 우리는 스스로 감각하고 경험한 방식을 통해 그 먼 실체를 쉽게 또는 낭만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이라든가, 규칙성을 가지고 공전하는 태양계 행성들을 보면서 그저 아름답다 느끼며 동경하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아름답게만 다가오는 이 우주의 모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가 경험한 논리와 사고체계로 설명될 수 없는 물질이고 우리의 사고 밖 법칙들로 작동하고 있는 실로 거대한 공포감과도 같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라면? 게다가 거대한 그 세계의 아주 작은 티끌조차 이해되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누군가 다가와 ‘이것이 너의 현실이야.’라고 말한다면?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마냥 흥미롭게만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01 기술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서 집중적 관심사로 거론되는 주제 중 하나는 아마도 ‘4차 산업혁명’ 일 것이다. 한 사회가 뭔가 이전과 다른 차원의 세계로 급속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신호, 이러한 경험을 우린 이전에도 몇 차례(1,2,3차 산업혁명) 경험한 적이 있다.

4차 산업혁명하면 일단 알파고(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 증강·가상현실, 블록체인 등이 거론되는데 뭔가 일상에서 인간의 힘(능력)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그런 사회를 연상하게 한다.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이 완전히 가상세계 안에서 구현되는 꿈과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 사회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뜨겁다. 앞으로 도래할 사회의 모습과 새로운 형태의 사회 메커니즘 등을 설명하는 정보와 강의들도 넘쳐난다. 그런데 잠시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러한 환상적인 세계에 대한 설렘을 뒤로한 채 느껴지는 강한 스트레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간은 그 지적 탐구능력으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다. 그 변화가 발전이라는 개념이든 단순한 변모의 개념이든. 기술혁명도 그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내용을 모른 채 단순히 포장된 결과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우린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멋진 미래임에는 틀림없지만 걱정도 만만치 않은 이유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당면한 문제는, 인간의 노동력이 더 이상 경쟁력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과 그로 인해 귀결되는 먹고사는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준비해야 하고 교육은 어떻게 가야 할 것이라는 등 환상적인 세상을 앞둔 우리의 관심사는 오히려 미래 먹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참 우습지 않은가.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의 혜택으로 인간이 보다 손쉽고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데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니 말이다. 너무도 이질적인 두 문제가 우리에게 함께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그 화려한 변화의 주역에서 일반 대중인 인간이 배제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간의 직접적 소통 체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휴대폰, 인터넷과 같은 온라인 체계로 갈아타기를 강요받았던 것처럼. 그리고 기껏 휴대폰으로 갈아탔더니 그 사양을 업그레이드한 후 이전 사양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선택권조차 박탈해 버렸듯이 말이다. 이러한 방식의 환경 변화는 더욱 가속도를 내며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사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된 것일까. 우리가 그 변화의 주역이 아닌 채 변화의 핵심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술문명은 갈수록 고도화 될 것이지만 고도화 될수록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확대되어 가는 것처럼 우리는 그 변화의 내용으로부터도 갈수록 멀어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술혁명을 주도하는 두뇌들과 우리의 실생활 패턴을 지배하는 자본의 욕구가 만나 항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될 것이고 인간은 단지 그 새로운 세상을 꾸미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근원은 바로 그러한 이면의 복잡함과 격리되는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인류가 서로 흩어져 살던 원시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의 긴 시간 동안 소멸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모여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그 사회를 결속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타인과 공유·교환하기 위한 언어나 미술(동굴벽화 등) 등 예술행위를 통해 복잡한 사회를 조직하고 타인과 깊이 있는 협력관계를 구축하게 됨으로써 개인의 생물학적 수명을 뛰어넘는 사회를 지속시킬 수 있었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 미술이야기1, 양정무 >.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인간들 간 유대관계는 다시 느슨해지고 흩어지면서 단지 가상의 시스템을 통해 점 단위로 연결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복잡한 네트워크는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즉 타인과의 공유·교환이 아닌 기술이 만든 시스템의 흐름을 좇아가고만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주체는 알파고의 알고리즘(algorithm)을 이해하는 일부의 사람들일 뿐, 대중은 그저 그 편리한 기술혁명의 위에 올라탄 이용자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알고리즘(algorithm) :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원하는 출력을 유도해 내는 규칙을 말하는데 컴퓨터를 움직이는 프로그램은 이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함.

이처럼 자신의 생존 환경에서 주체로서 멀어져 간 채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 기술혁명을 이용하려는 것일까. 단순히 편해지기 위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세계가 크고 깊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의지해 왔다. 그렇다면 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을 우리는 무엇으로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출처 : 2016.5.31 한겨레

 

02 우리는 기술혁명의 세상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인류가 이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던 두려움에 종교를 탄생시켰고 그 울타리 안에서 평온을 갈구했던 것처럼, 기술혁명은 그런 종교와도 같이 우리에게 이해보다는 순응해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기술혁명 자체가 아니다. 그 기술혁명의 내용(Logic)을 모른 채 그저 이용해야 하고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그 혁명된 사회(이해되지 않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혹자는 이런 세상에서의 기본적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기도 한다. 향후 예상되는 세상에서의 인간의 노동과 역할의 문제가 모호해지다 보니 급기야 기본소득 문제가 대두되었고, 로봇에게 세금을 물리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그동안 노동을 통해 생존하던 방식으로부터 노동의 역할이 축소되는 세상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불거진 생계문제에 대한 대안일 뿐, 인간이 스스로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에 대한 대안은 아닌 것이다.

이렇듯 문제가 간단치 않음에도 우린 왜 이처럼 끝없이 기술혁명을 통한 변화의 사회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 사회는 점점 내가 개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객관적 실체로서 내게서, 나의 생존 방식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데. 그것뿐인가. 한편으론 사물인터넷, 블록체인 등이 나를 객체로서 더욱 견고하게 묶어두려고까지 하는데 말이다.

종교에 의지하는 인간의 행위는 거대한 세상의 끝 모를 깊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적 사실을 중요시하는 우주물리학자나 과학자들이 종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 광대한 우주 앞에 갈수록 작아지는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면서 그들의 학문적 지향조차 잠시나마 누군가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어서일까. 이처럼 자신의 세상을 인지할 수 없음을 자각할 때 인간은 누구라도 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들과 차원은 다르지만 기술혁명을 대하는 우리 역시 그런 문제 앞에 놓여 있는 듯하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철학적인 사유가,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운 복잡한 물질문명에 덮여서 더욱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느낌으로 말이다.

실리콘밸리의 인공지능 학자인 제리 캐플런은 저서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 ~세계가 얼마나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개인의 욕구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지 감탄하는 와중에 그런 새로운 체제는 슬금슬금 기어 오는 고양이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소리 없이 우리 사회에 엄습할 것이다. 그런 무대 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거대한 인조지능이 사람들 각자에게 돌아갈 혜택을 작디작은 조각으로 자르고 또 자르고 있다. 그 제일 크고 좋은 몫을 차지할 사람은 과연 누굴까?”라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 2017.1.17).

거대한 인공지능 앞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노력 대신 그저 내게 돌아올 물질적 몫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소박한 희망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03 인간의 실존적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애완견들은 스스로의 본능적 세계 밖에서 그 주인의 배려 하에 평온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주인의 시스템이 안전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평온함을 대가로 많은 본능적 능력의 퇴화와 함께 새로운 질병들로 시달리고 있다. 인간이 기술혁명 아래서 누리게 될 상황이 비슷하게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날 책 속의 한 물리학자가 감히 그 끝자락 한 부분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의 세계로 나를 쭉~ 끌어들였을 때, 그 엄청난 세계를 설명해가는 과정을 그저 따라가며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희열과 떨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물리학의 세계는 과학의 한 분야이기 전에 인간이 실재하고 있는 이 우주의 실존을 풀어가는 철학적인 문제와도 본질을 같이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평생 우리 인생에서 알게 모르게 철학이라는 개념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영원히 그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물리학의 개념도 내게 그런 떨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인간의 생존본능에서 생성된 노동이 어느 날 자본이라는 틀 속으로 들어가 태생적 본질이 무참히도 변질되어 왔던 것처럼, 기술혁명은 우리가 과학의 세계에 대해 누릴 수 있는 이런 무한한 사유와 상상력을 거부한 채 새로운 장으로 우리 인간을 가두려 하고 있다. 삶에 대한 철학적 갈구로부터 인간의 정신세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노동의 주체인 인간을 어느날 자본의 부속으로 편입시켜 왔던 것처럼 그렇게.

원시시대로부터 갈구해왔던 인간의 그 오랜 스스로의 세상에 대한 탐구(동굴벽화에서부터). 자본이 어느 날 이런 본능적 성향으로부터 인간의 정신세계를 분리해왔던 것처럼, 과학기술 역시 그 실용화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분리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예나 지금이나 이 거대한 우주에서의 인간의 실존이라는 명제는, 알 수 없는 크기의 세상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했고 또한 연구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사유를 즐기는 동물이다 보니 그로부터 많은 학문 분야들이 가지를 치게 되었고 세련된 탐구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미래사회는 그러한 사유를 방해하는 온갖 환경들(사물인터넷 등)이 우리를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환경을 개발한 극히 소수만이 그 알고리즘(algorithm)을 이해할 뿐이고 우리는 그 알고리즘이 가져다주는 결과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적 사유는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의 세상으로부터 철학적 사유는 점점 더 방해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출처 : pixabay.com

 

04 인간은 여전히 창조적 존재로 존속할 수 있을까

아침이 되면 가벼운 음악소리가 나를 깨운다. 안내된 화장실엔 정확한 양의 치약이 올려진 칫솔이 준비되어 있고 양치질과 세수를 마치는 순간 깨끗한 수건이 내 손에 쥐어진다. 잠자는 동안 체크된 나의 생체정보를 토대로 영양 상태에 맞춰 준비된 식사를 하고 나면 출근하는 나를 위해 자율주행차가 기다리고 있다. 차 안에서는 스크린 속 오늘의 스케줄과 필요한 정보들을 체크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하루의 시작을 점검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사무실에 도착해 있다.

 

기술혁명의 혜택인 사물인터넷과 자율주행차 등이 나의 행동 패턴을 저장하고 데이터화 하여 행동 동선을 최소화하고 건강, 하루 일과 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줌으로써 나는 많은 시간을 벌었고 보다 여유로운 시간 활용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이렇게 효율적 관리가 가능해짐으로써 생겨난 시간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다시 기술혁명이 만들어 놓은 유희, 오락에 심취해볼 것인가.

인간은 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새로운 길을 발견하기도 하고, 사과나무 아래서 졸다가 우연히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빨간 사과 하나에서 만유인력의 개념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간의 창조적 행위는 이처럼 정확히 예측된 행동과 시간 속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

AI, 사물인터넷 등이 인간의 행동 동선, 성향 등을 미리 데이터로 저장하여 다시 인간의 삶이 편리하게 관리되도록 예측된 환경에서 인간의 창조행위는 가능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은 집단지성이니, 공유니 하는 환경에서 인간은 얼마든지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철저한 예측과 계획에 의해 움직이고 길들여진 개인들이 모여 지식을 공유한들 그 집단지성이 창조적인 방향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지. 그 안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해야 효율성, 편리성이라는 개념의 무한 반복적인 복제의 실현 이상일 수 있을까?

19C말 폴 고갱(Paul Gauguin)은 미술을 위한 미술만이 인정받던 고지식한 아카데미즘적 미술세계에 대한 반감으로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 원시사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미술이 가진 본연의 에너지를 회복하고자 노력한 결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즉 스스로 갇히기를 거부하고 길들여진 세계에서 뛰쳐나옴으로써 스스로 주체로서 창조적인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미술이야기 1, 양정무)는 것이다.

이 스토리는 단순히 천재 화가의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 설명을 넘어 우리 자신들의 철학적 삶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우려했던 것처럼 더 이상 우리 스스로 삶의 기반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본질적인 사유 자체가 어려워지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의 인간에게 필요한 질문일 것이다. 기술혁명의 실체를 모른 채 그 우산 아래서의 삶에 익숙해지게 될 때 그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인간은 그러한 성질을 실생활에 활용하여 구현하려고 한다. 기술혁명 역시 오늘 갑자기 불거진 것은 아니고 과거 유비쿼터스와 같은 개념을 통해 우린 이미 그 신세계를 그리며 환호했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 기술의 지배는 어느 순간부터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기술에 대한 의존의 정도가 달랐던 만큼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여백의 크기도 달랐을 뿐이다. 즉 노력한다면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두려움의 크기가 크지 않았다고 할까.

그러나 알파고의 대국을 바라본 이후 우리의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이 IT기술의 도입은 그야말로 알고리즘(algorithm)의 전쟁이고, 일반인이 이 고도의 알고리즘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될 IT 혁명의 실 생활화는 그냥 주어진대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일 뿐, 이용자는 그 속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능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도 곧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을 가졌거나 소유할 수 있는 자본에게 편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의 방식 전체를 모두 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모든 걸 이해하고 이끌어줄 것이라는 믿음과도 같이 말이다.

출처 : 2016.7.11 한겨레

 

05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술문명 아래서 우리 인류는 그동안 공유해온 윤리, 도덕, 관습, 법률 등의 가치에 대해서조차도 더 이상 통제할 수도, 새로이 생성시키거나 발전시켜 나갈 수도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 조직의 가치를 형성해 나가고 참여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조직 사회의 기반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인 한, 인류가 그 사회의 가치와 방향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지 않을까.

“지난주 저는 가상현실(VR)에서 성추행을 당했습니다.”라는 한 여성의 글이 미국 사회를 강타했다는 한겨레 기사(2017.1.24)를 보는 순간 가상현실이 가져올 파급의 끝을 가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킬러로봇이니 유전자 편집이니 하는 IT 기술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행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찌 보면 이처럼 어마어마한 기술혁명 앞에서 기본소득 논의와 같은, 새삼 인간의 생계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술혁명으로 인해 우리가 삶과 생존의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가고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는것 아닌가. 인류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이해되어 왔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해 왔던 방식에서 인간 상호 간 적자생존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수십 억 년 전 어느 별 안에서 만들어져서 초신성의 폭발과 함께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거나 적색 거성의 표면에서 흩날려서 떠다니다가 서로 만났다. 우리는 언젠가 우주 어디선가 일어났던 초신성의 흔적이며 수많은 별들의 죽음 속에서 태어난 존재다. 우리는 언젠가 죽겠지만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는 언제까지나 남아서 지구 어느 곳인가, 혹은 우주 어느 곳인가에서 또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 불멸의 원자, 이강영 >

 

한 물리학자가 바라본 인간 존재에 대한 다소 낭만적이면서도 색다른 상상의 세계를 보면서, 인간은 역시 자신의 실존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사유하는 동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명확한 결론이 불가능함에도 인간은 끈질기게 사유하며 새로운 창조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이롭게 작용할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철학적 고민과도 무관하게 그저 대세처럼 가고 있는듯 보인다.

그래서 이런 익숙한 질문이 지금 우리에게 또 다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 또다시 우리의 운명은 자본의 손 안에서 놀아나야만 하는가. 자본의 새로운 먹거리를 위해서? 』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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