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최운산 장군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숨은 영웅이다. 그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전의 주역이지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에 비해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4일 최운산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기념사업회는 “무장독립전쟁의 승리는 몇몇 부대장의 영웅 신화가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처절한 삶을 통해 이루어낸 일”이라며 최장군을 비롯하여 형님 최진동, 동생 최치흥 등의 활약을 발굴하고 기록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글은 최운산 장군 손녀 최성주 주주통신원이 쓰는 글이다.

 

큰할아버지 최진동 장군의 이름은 명록이다. 무장독립전쟁을 시작하면서 나이가 어려 함께 하지 못한 막내 명철을 제외한 명록, 명길, 명순 3형제는 진동, 운산(문무,만익 등), 치흥으로 이름을 바꿨다. 맏이인 진동이 1883년에 출생했고 둘째 운산은 1885년에 태어났다. 1910년 이후 만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인 최진동 장군은 담대한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이끌었던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이다.

연길 '도태(조선말기 연변에서 조선인들을 다스리던 관)리)'였던 부친 崔友三은 아들들이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정신을 잃지 않도록 훈육하였다. 청나라 말기, 부친 최우삼이 청나라의 간도정책에 대적해 일으킨 ‘道台의 亂’으로 투옥되자 가족들은 모든 가산을 처분해 가장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집안이 기울어져 명록과 명길 두 아들은 남의 집에 가서 일했다. 중국인 부호의 집에서 일했던 명록의 총명함을 높이 샀던 중국 부호는 명록을 자신의 양자로 삼았고 넓은 토지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남의집살이를 마다않는 명록과 명길 형제의 노력에 이어 중국의 토지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운산의 지혜로 집안은 다시 일어섰다. 경제적 성공을 이룬 명록과 명길 형제는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는 중국은 신해혁명(1911년)을 거치는 군벌의 시대였다. 진동과 운산은 장작림 군벌에 합류하여 그들이 동삼성에서 자리 잡도록 도우며 중국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들 형제는 중국군벌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무술실력과 총포술이 뛰어났던 운산이 위기에 처한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운산이 비적들로부터 동포들의 안위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자위대를 만들 때 중국군에서 사병을 모집해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최운산 장군을 따라 봉오동의 자위대로 들어간 100여명의 군인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으나 소수의 중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훗날 <대한군무도독부>의 정예 독립군으로 성장하여 무장독립전쟁의 선봉에 섰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지역에 최초의 대한민국의 정식 독립군부대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가 창설되었다. 최운산 장군이 1912년부터 봉오동에서 훈련 양성해온 자위부대가 그 모체이니 사령관은 당연히 최운산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산은 부하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이미 간민회 부회장, 광복단 단장으로 사회적으로도 명망을 얻고 있던 형 명록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백초구 순경국장을 사직하고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의 府長을 맡은 명록은 이름을 진동으로 바꾸고 운산과 치흥 두 동생과 함께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다음해 간도의 독립군들을 모두 불러모아 대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창설할 때도 최진동 장군이 총사령관인 府長으로 추대되었다. 참모장을 맡은 최운산 장군은 부대 운영을 책임지며 작전과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 최운산 장군(왼쪽) 최진동 장군(오른쪽)

둘째 운산이 형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그러나 전쟁과 훈련으로 마을을 떠나있는 시간이 많았고, 집을 드나들 때 항상 변장을 한 탓인지 두 형제를 분간하지 못하는 마을사람들도 많았다. 최진동 장군이 1932년 도문으로 이사한 이후에도 봉오동을 지킨 둘째 최운산 장군을 보았던 사람들이 그를 최진동 장군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1989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결정한 최운산의 막내아들인 호석이 막내딸 계순과 함께 마지막으로 고향집을 둘러보러 갔을 때 그들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최진동 장군의 자식들이 고향을 방문했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단다. 수남촌에 있던 최운산 장군의 집은 이미 허물어진 뒤였지만 집터와 토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가을, 우리 형제들이 봉오동을 찾았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새로운 집이 지어져 있었다.

진동, 운산, 치흥, 명철은 4형제는 정말 의가 좋았다. 첫째 진동은 카리스마 있는 맏이의 모습으로, 둘째 운산은 모든 일에 형 진동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모든 관리를 책임졌다. 머리가 좋은 셋째 치흥은 부대 운영과 각 전투에 이르기까지 독립전쟁의 전 과정에 전략통으로 형들과 함께 활약했다. 나이가 어렸던 넷째 명철은 주체적인 역할은 못했지만 심부름으로 형님들을 돕기도 했다.

경제력을 갖추고 동생들을 공부시키는 등 집안을 다시 일으킨 진동과 운산은 혼연일체가 되어 긴 시간 함께 했다.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를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셋째 치흥과 넷째 명철이 혼인하고 분가를 한 후에도 진동과 운산 형제는 한집에 살면서 무장투쟁을 함께 이끌었다. 그러나 최진동 장군이 재혼을 하고 봉오동을 떠나 도문으로 살림을 옮긴 1932년 후에는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을 지켰다.

서로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할아버지 형제들의 돈독한 우의를 돌아보자니 손자인 우리 형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화내거나 큰소리 내지 않는 조용한 카리스마로 동생들을 이끄는 큰오빠, 언제나 형님을 앞세우며 빈자리를 조용히 메꾸는 작은오빠, 형님들에 대한 절대적 신뢰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남동생, 그리고 남자 형제들의 보호와 믿음에 감사하며 주어지는 몫을 찾아 채우 나와 여동생, 일생동안 조화롭게 지내는 우리 5남매를 보면서 할아버지 형제들 삶이 이렇게 손자들에게 전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난해 우리 5남매와 봉오동 전투현장 답사를 함께 했던 역사학자들이 답사 마무리 간담회를 할 때 봉오동의 현장을 처음 보는 감동도 컸지만 우리 형제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최운산장군 형제들이 어떻게 일치해 나갔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왠지 책임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독립전쟁에 투신하면서 최진동 장군은 개인적인 시련도 많이 겪으셨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후 형제들과 간도의 독립군부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이동하자 평소 병약하던 부인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남편과의 이별에 낙담하여 병이 깊어졌다. 부인은 얼마 후 아들 셋과 두 딸을 남겨둔 채 사망하였다. 당시 막내인 셋째아들 국빈이 갓 첫돌이 지난 어린 아기였다. '자유시참변'으로 부하들을 잃고 타향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최진동 장군은 아내마저 잃는 아픔을 함께 겪어야 했다. 집안 살림을 책임졌던 제수인 김성녀 여사가 엄마 없는 다섯 아이들은 모두 돌보았다.

자유시 참변으로 수많은 동지를 잃는 절망 속에서도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북만주의 여러 지역에서 다시 부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장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24년 최운산 장군이 일제에 검거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했고 얼마 후 최진동 장군도 잡혀가 옥고를 치렀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최진동 장군을 잡기 위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거짓 정보를 보냈다. 최진동 장군은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봉오동으로 돌아오던 길목에서 잡혀갔다. 1926년 12월에야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최 장군에게 가족들은 재혼을 권했다.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결혼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라는 설득에 마음을 바꾸었다.

재혼을 결심하자 혼처가 두 군데로 압축되었다. 한 곳은 서로 잘 아는 독립운동가의 딸로 나이가 좀 많은 재혼이었고, 한 곳은 아주 나이 어린 처녀였다. 최진동 장군은 어느 혼처가 좋을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최진동 장군은 백마를 타고 가다가 갈림길에서 고삐를 놓으며 말이 찾아가는 곳의 처자를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결국 애마가 선택해준 여자와 재혼을 했는데 그 후처는 나이가 아주 어렸다. 큰딸과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무장독립군 부대의 사령관으로 무장투쟁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남편의 삶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매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고, 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가정의 안락함을 추구하기 힘들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삶이다. 이 젊은 후처는 이후 최진동 장군의 삶에 결정적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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